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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훈 시인의 작가 열전

흙 씻어주는 ‘詩 배달부’ 도종환

“숲 속 산방에서 꽃뱀과 동거 중입니다”

  • 원재훈 시인 whonjh@empal.com

흙 씻어주는 ‘詩 배달부’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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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씻어주는 ‘詩 배달부’ 도종환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의 산이 보인다. 그 산에서 쓴 시는 경전처럼 내게 다가온다. 흙이 저절로 씻겨 내려가는 문장을 읽으면서 내 마음의 그 무엇도 조용히 쓸려 내려간다. 일종의 세례의식처럼 한 편의 시가 마음을 씻어준다. 마음의 얼룩은 눈에 보이지 않아 병이 들면 더 아프다. 우울증은 마음의 얼룩이 깊이 스며들어 탈이 난 것이다.

최근에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한 적이 있다. 언제 내가 아무 말 없이 하루 종일 있었던 적이 있나 싶었다. 그러나 가끔 시집을 읽는 동안에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말을 줄인다는 것이다. 말을 줄이고 책을 보면 그 자리에 생각이 머문다. 그 생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삶의 길이 보일 수도 있으리라.

법원의 등기부등본에는 구구산장이 도종환의 땅과 집으로 등재돼 있다. 그러나 막상 산에 들어가보니 이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헛갈렸다. 시인은 산속에 사는 산짐승들과 마당을 공유하고 있었다. 산방 앞에는 작은 개울이 흐른다. 이 물은 짐승들의 식수다. 처음에는 인간의 눈을 피해 밤중에 와서 물을 먹었는데, 언제부터인가는 시인을 빤히 쳐다보면서 아무 때나 드나든다.

살쾡이 똥

“이놈들이, 나를 인간 취급하질 않아. 허허. 이것 좀 봐요. 이 똥 좀.”



마당에서 난생 처음 살쾡이 똥을 보았다. 마당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살쾡이 똥이 있었다. 군데군데 전날 잡아먹었을 짐승의 털이 박혀 있었다. 짐승들은 오줌이나 똥으로 자신의 영역을 표시한다. ‘여기 들어오는 놈들은 죽어’ 하는 식이다. 즉, 이곳은 자신의 영역이라고 울타리를 친 것이다.

시인은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상한다면서 너털웃음을 날렸다. 그는 살쾡이 똥을 치우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살쾡이를 몰아낼 수는 없는 일이다. 동물이 사는 산속에 인간이 잠시 머무르는 것이다. 마당을 가로질러 개울가로 내려간다. 개울가로 이어지는 비탈에 꽃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산수유네?” 하고 탄성을 지르자 시인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비슷하지요. 똑같다고 해도 될 정도로, 그런데 저건 생강나무입니다. 나무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손님에게 차 대접을 해야지요.”

그러곤 막 돋아오르는 꽃잎을 손으로 땄다.

생강꽃잎차를 마셨다. 차를 마시는 나무 탁자에 이철수 선생의 판화 글씨를 새긴 보자기가 덮여 있었다.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 없다’는 정호승 시인의 시 구절이었다. 이문재 시인은 이 시구로 자신의 시 엮음집의 제목을 달았다. 멀리 내다보이는 산속에 꽃봉오리가 움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다. 분명 꽃은 피고 또 질 것이다. 시인이 이곳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썼는지는 이미 활자화되어 있다. 책이나 글로 선생은 자세하게 심경을 토로했다.

“내게 오는 모든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지내는 동안 아침마다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나와 내 삶을 끌고 가는 것이 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나는 내 마음의 주인도 내 몸의 주인도 아니었습니다. (중략)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분이 나의 수발을 들어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분을 위해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욥의 말처럼 ‘주셨던 분도 그분이요 도로 가져가시는 분도 그분’이시라면 나를 세우고 쓰러뜨리시는 분 역시 그분이신 걸 알고는 그분께 다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구약의 욥은 말했다. 고통은 인생의 섭리를 깨닫게 하기 위한 신의 뜻이라고. 그것 역시 인생을 알기 위한 한 방편인 것이다. 오로지 안락함과 즐거움만으로 이루어진 인생은 허상이다. 그래서 세상에 없는 행복한 나라가 유토피아라고 했던가.

차 한 잔을 마시면서 나는 조금 전에 본, 마당에 피어 있는 민들레 이야기를 했다. 아직 풀이 돋아나지도 않았는데 넓은 마당에 딱 한 송이의 민들레가 흙 속에서 솟아올라 있었다. 귀엽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했다. 어떻게 저 무거운 땅을 뚫고서는 고개를 내밀었단 말인가. 무엇을 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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