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호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한 첫 백인 여성 얀 루프 오헤른

“그냥 잊으라고요? 지금도 밤마다 강간의 공포에 떠는데…”

  • 윤필립 在호주 시인 phillipsyd@naver.com

    입력2007-05-07 16: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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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가 작고 뚱뚱한 대머리 일본군 장교가 딱 버티고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히죽거리기까지 했지요.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강압적으로 나를 끌고 침대로 갔습니다. 나는 말했죠. “절대 이런 짓은 할 수 없어요.” 그러자 그가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주마. 정말 죽이겠어!”라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칼을 뽑았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을 아주 가까이에서 느꼈습니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를 침대에 집어던지고는 내 옷을 모두 찢어버리고 잔인하게 강간했습니다.
    정말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어요. 나는 고통이 그렇게 심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방을 나갔고 나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욕실에 가서 다 씻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 부끄러움과 모든 더러운 것을. 그저 다 씻어버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 공포를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마치 전류처럼 몸속을 파고 흘러들거든요. 공포는 결코 나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평생 동안 나와 함께 있었죠. 나는 밤이면 그 공포를 여기 내 응접실에 앉아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창 밖을 바라보다가 날이 어둑해질 때쯤이면 소름이 끼쳐요. 어두워진다는 것은 내가 다시 거듭해서 강간을 당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아시겠어요? 그 공포는 절대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호주 국영 abc-TV 다큐멘터리 ‘Australian Story’ 중에서


    위의 내용은 호주 국민을 펑펑 울게 만든 TV 다큐멘터리 ‘오스트레일리안 스토리’의 ‘잊힌 사람들(The Forgotten Ones)’에 출연한 호주 국적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얀 루프 오헤른(84) 할머니의 회상을 채록한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2001년 8월30일 방영됐는데, 최근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호주는 물론 국제적인 이슈로 부각되자 호주 국영 abc-TV가 지난 4월2일 저녁에 재방송했다. 2월15일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환경소위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청문회에 참석한 오헤른 할머니가 증언대에서 울먹이며 절규하는 모습이 TV 뉴스로 전해지자 시청자들이 재방송을 요청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50년의 깊은 침묵

    청문회 증인으로 나선 오헤른 할머니는 “한평생 치욕을 안고 살아왔다. 지금도 매일 그 치욕을 씻고 있지만 씻기지 않는다”면서 몸서리를 쳤다. 할머니는 격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듯 책상을 치기도 하고 눈물을 훔쳐내기도 했다. 그는 서양인 위안부라는 사실 때문에 미국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위안부(comfort woman)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힌 최초의 백인 여성이다.



    이날 한국인 이용수(79), 김군자(81) 할머니 등과 함께 청문회에 나선 오헤른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게 된 과정, 일본군들에게서 받은 수모와 강간 등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낱낱이 증언하고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역사 바로 세우기, 위안부 결의안 처리를 위한 미 의회의 적극적인 자세를 주문했다.

    미 의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가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위안부 결의안 채택에 큰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결의안은 일본 정부에 ‘위안부 존재의 공식 인정과 사죄’ ‘일본 총리의 공식 사죄’ ‘국제사회의 권고에 따라 현재와 미래 세대들에게 교육시킬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일본 측은 “1996년 이후 하시모토, 오부치, 모리, 고이즈미 총리 등이 직접 나서서 보상금과 함께 서면으로 진실한 사과를 했다”는 요지의 서면 해명서를 위원회에 제출, 위안부 결의안 저지에 주력했다.

    한편 abc-TV는 이 다큐멘터리를 재방송하면서 프로그램의 앞과 뒷부분에 미 하원 청문회 장면과 호주 한인 동포들이 주축이 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하는 호주 친구들(Friends of Comfort Women in Australia·FCWA)’이 주최한 제751차 ‘수요집회’ 관련 장면을 덧붙여 방영했다.

    오헤른 할머니는 ‘그 일’을 겪은 후 50년 동안 엄청난 충격과 씻을 수 없는 수치심 때문에 침묵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1992년, 호주 TV 보도를 통해서 한국계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악몽의 세월을 증언하는 것을 보았다. 보스니아전쟁 와중에 여성들이 강간을 당했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던 시점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한 첫 백인 여성 얀 루프 오헤른
    한국 할머니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일본 정부 차원의 사죄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디에서도 사과를 받아내지 못했다. 그때 오헤른 할머니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렸다. “저들을 도와야 한다. 마침내 내 인생의 암흑기를 털어놓을 시간이 됐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는 우선 두 딸에게 자신의 참혹했던 시절의 얘기를 들려준 다음 세상을 향해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두 차례의 도쿄 방문을 비롯해서 호주, 북아일랜드, 영국, 네덜란드 등 전세계에서 열리는 군대 위안부 관련 행사에 참가해 자신이 겪은 일을 증언했다.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살던 얀은 1942년 일본군이 그곳을 점령하자 가족과 함께 수용소에 억류됐고, 억류 2년째 되던 1944년 그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참담한 일을 겪었다. 당시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지역에서 최후의 결전을 앞둔 일본군의 만행이 절정에 달했다. 전쟁물자는 바닥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의 사기 또한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본군 지휘부는 병사들의 사기를 돋운다는 명목으로 식민지 국가에서 강제로 끌고 온 여성들을 위안부로 안겨주었다. 그 전쟁범죄에 희생된 숫자가 어림잡아 20만을 넘었다.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던 백인 여성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스물한 살 처녀 얀은 그때껏 성(性)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수녀가 되기 위해 프란시스코 수녀회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해서 “나는 그것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생모와 수녀들)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거든요”라고 했다.

    그럼 여기서 4월2일 방영된 abc-TV 다큐멘터리를 요약해서 옮겨본다. 다큐멘터리는 대역 없이 오헤른 할머니와 두 딸이 직접 출연해서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트럭에 소떼처럼 처박혀…

    나는 현재 인도네시아로 불리는 옛 네덜란드령(領) 동인도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1923년에 태어났고 정말로 멋진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우리 가족은 아름답고 커다란 집에 살았는데 요리며 정원 일, 빨래를 해주는 시종들과 운전사가 함께 살았지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자바 섬에서 손꼽히는 큰 무역상이었거든요.

    태평양에서 전쟁이 시작되고 1942년 3월 일본군이 자바로 쳐들어오면서 그 아름답던 시절은 끝장났습니다. 일본군이 남자는 물론,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 일본군 수용소에 억류했으니까요. 나도 가족과 함께 수용됐습니다.

    수용소에서 3년 반을 갇혀 지냈는데, 잘 알려진 대로 굶주림, 고문, 체벌, 질병이 만연했지요. 매일 누군가가 죽어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화 ‘엘리스 스프링 가는 길’에 나오는 그대로였습니다.

    1944년 3월, 일본군은 17세 이상의 젊은 여자들에게 수용소 건물 앞에 줄 서 있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높은 계급의 장교들이 오더니 우리를 아래위로 훑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얼굴과 다리 등을. 그것은 앞으로 발생할 일에 대한 선별과정이었습니다.

    性病 검사하던 의사에게도 당해

    우리는 덮개가 없는 트럭에 강제로 태워져 소떼처럼 처박혔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두려워서 작은 짐가방을 꼭 붙들고 서로 바짝 붙어 있었습니다. 트럭이 커다란 네덜란드 식민지 건물 앞에 멈추자 일본군이 내리라고 명령했습니다.

    거기서 일본군의 성적 욕구 해소를 위해 우리를 끌고 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위안소에 있었습니다. 위안소 말입니다. 온 세상이 발밑으로 꺼져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항의했습니다. 우리는 강요당했다고 말하면서 그들은 우리에게 이럴 권리가 없다고 항의했습니다. 이것은 제네바 협정 위반이며 우리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웃기만 했습니다. 그저 웃기만 했단 말입니다. 일본군은 자기들은 우리와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서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일본식 꽃 이름이 들어간 각자의 이름을 부여받았는데, 위안소 문마다 그 이름들이 핀으로 박혀 있었습니다.

    나는 키가 작고 뚱뚱한 대머리 장교가 사무라이 칼로 위협하는 가운데 아주 잔인하게 강간당했습니다. 그 후 나는 머리를 다 잘라버렸습니다. 추하게 보이면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내 모습은 정말 흉측해 보였지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한 첫 백인 여성 얀 루프 오헤른

    일본 외교관이 호주의 일본대사관 시위 현장에 나와 항의서한을 접수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나는 오히려 호기심의 대상이 됐습니다. 일본군들은 내가 머리를 밀어버린 처녀라며 저를 더 원하게 됐어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제가 원한 것과 정반대의 효과를 낳았던 겁니다.

    그곳에는 우리가 매주 성병(性病) 검사를 받던 방이 있었습니다. 일본군들은 방문을 열어놓았습니다. 창문도요. 그래서 우리가 검사받는 동안 일본군인들이 지켜보도록 했습니다. 의사가 왔을 때 나는 그에게 말했죠. “선생님이 힘 좀 써주세요. 상관들한테 우리가 강제로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세요.”

    의사는 그저 웃기만 했고 결국엔 그마저 나를 강간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매주 정기검진을 할 때마다 그 의사는 나를 맨 먼저 강간하곤 했습니다. 이런 일이 매주, 매달 계속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소지품을 챙기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임시 수용소에 수용됐습니다. 거기서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을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그 모든 치욕을 겪고 나서 어머니를 다시 보게 된 거죠.

    어머니는 내 머리를 보시더니 내게 일어났을지도 모를 최악의 상황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첫날밤에 나는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어머니의 팔에 안겨 있었고(지금도 느낄 수 있군요), 어머니는 날 감싸주셨습니다. 그러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죠. 내 대머리를요.

    다음날 나는 어머니에게 저와 다른 소녀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얘기했습니다. 그 소녀들도 모두 어머니와 함께 있었습니다. 어머니들은 어떻게 대처할지 몰랐습니다. 그들에겐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죠. 그래서 어머니에겐 그 일을 절대로 다시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너무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꽃을 싫어했던 이유

    내가 모든 걸 다 털어놓은 지금에야 내 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딸들은 이야기를 다 듣고는 오랫동안 울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왜 엄마가 의사한테 가는 것을 싫어했는지 알겠어요”라고. “아! 그랬군요. 그래서 엄마가 남들은 다 좋아하는 꽃 선물을 거절했군요.”

    그러나 나도 이제는 꽃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다 털어놨기 때문이지요. 나도 이제 꽃을 보고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 부질없는 생각을 합니다. 일본인들이 내게 꽃 이름을 붙이지만 않았어도….

    나는 내 이야기를 도쿄에서만큼은 증언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호주로 돌아오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내가 도쿄에서 비밀을 다 털어놓았을 때 그 앞에는 전세계 사람들이 있었어요. 내 증언은 바로 큰 뉴스가 됐습니다. 저는 생각했죠. “오 이런, 애들레이드에 있는 친구들과 가족들도 봤겠구나”라고요.

    다시 호주로 돌아와 교회에 가자 친구들과 교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 팔을 벌려 나를 감싸안았습니다. “얀, 집에 잘 돌아왔어요. 그리고 정말 잘했어요”라고 했어요. 심지어 그들은 내가 앉던 자리에 꽃까지 갖다놓았더군요.

    그리고 두 딸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서로 껴안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우리는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걸로 충분했거든요. 솔직히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특히 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딸들이 나를 그렇게 안아준 겁니다.

    비밀을 털어놓은 후 나는 결심했어요. 남은 생애를 전쟁에서 상처 입은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살겠노라고요. 그래서 지난 15년 동안 아시아의 일본군 위안부들을 위해 투쟁했습니다. 북아일랜드와 영국, 네덜란드 회의에서 제 비밀을 털어놓았고 도쿄에는 두 번이나 갔습니다. 최근에는 미국 하원 청문회에도 참석했고요.

    나는 계속해서 싸울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우리가 모두 죽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나는 죽지 않을 것이며 아시아의 일본군 위안부들이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받아낼 때까지 투쟁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들은 정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내 이야기의 가장 큰 메시지는 믿음과 용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나는 다른 여성들이 나처럼 평생을 공포 속에서 사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 공포를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어두워진다는 것은 내가 다시 거푸 강간당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죠. 아시겠어요 그 공포는 절대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국제적 이슈 된 위안부 문제

    지난 3월 내내 미국, 중국, 일본, 호주 언론에는 사설과 특집기사 등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 관한 보도가 이어졌다. 특히 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그동안 이 문제를 잘 다루지 않던 미국과 호주 언론들이 함께 움직인 이유가 궁금해진다. 부시 대통령 취임 이후 더욱 돈독해진 미일관계와 최근 호주-일본 안보조약이 체결되는 등 긴밀해진 미국-호주-일본의 ‘삼각동맹’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그리고 호주에 거주하는 백인 출신 위안부 피해자 오헤른 할머니가 공로자다.

    아베 총리는 3월5일 일본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미 하원 외교위원회 결의안과 관련해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결의안이 통과된다고 해도 사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한국, 중국의 언론이 한목소리로 비판적인 보도와 논평을 실었다. 미국과 호주의 주요 언론들도 한국이나 중국 못지않은 특집기사와 사설을 게재했다. 전에 없던 현상이었다. 그 가운데 미국과 호주 신문에 게재된 사설 몇 편을 요약해서 소개한다.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치인들은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 창피한 과거를 극복할 수 있는 첫 단계라는 것을 인식할 때가 됐다. 그 사안은 위안이 아니다(No Comfort). 일본군 위안부 동원에 일본군이 관여했고, 이는 일본 정부의 국방문서에도 기록돼 있다. 일본군 위안부가 있는 곳에서 이뤄진 행위는 상업적 성매매가 아니라 일련의 성폭행이었다.
    일본이 이 문제에 대해 모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기대하는 나라는 미국뿐만이 아니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추락한 국제적 신망을 회복하는 것보다는 자민당 내 우파의 지지를 얻는 것에 더 신경 쓰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은 진실을 왜곡하려다 치욕만 당할 뿐이며, 솔직한 사과와 함께 생존 희생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상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
    -3월6일자 ‘뉴욕타임스’ 사설 ‘위안이 아니다(No Comfort)’

    존 하워드 총리는 일본을 방문해 군사협력 강화 및 미국을 포함한 3자 협력체제 방안 등 전략상으로 중요한 논의를 했다. 그러나 최근 아베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망언을 내뱉어 상황을 힘들게 하고 있다. 아베 총리의 발언은 1993년 당시 일본 외무상의 위안부 동원에 대한 인정과 사죄발언(고노 담화)을 철회하려는 태도로 풀이된다.
    그리고 그는 20만명에 달하는 위안부 여성은 자발적으로 모집된 것이며 위안부 체제 역시 일본 군부가 아닌 민간업체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지난 달 미국 하원에 참석해 비통한 심정을 토로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 총리의 공식 답변이다. 여기에는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의 민간인 포로였던 호주 출신의 얀 루프 오헤른씨도 포함돼 있다.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과 많은 다른 증거를 통해 볼 때 당시 위안부 여성들은 매춘부가 아닌 강제로 동원된 강간의 희생양들이다. 일본의 강제납치 성노예는 전시상황의 사실적 사건이다. 성매매업체들이 위안부 체제를 설립했다면 이것은 군부의 직접적인 명령에 의한 것임에 틀림없다.
    1945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로서는 처음 총리직에 오른 아베 신조가 위안부 동원 사실을 인정하고 일본 청소년에게 역사의 진실을 교육하며 또한 전후 독일이 나치 정권하에서 강제동원된 사람들에게 했듯 부자 국가 일본도 당시 희생자들에게 배상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가?
    중국과 한국,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끊임없는 비난의 화살을 받으면서도 아베 총리의 반응은 여전히 무덤덤하며 형식적인 사과에 그치고 있다. 하워드 총리는 아베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이 문제에 대한 호주의 목소리를 전해야 한다. 일본이 계속 보수적인 국내 여론에 영합하면서 주변 아시아 국가들을 자극한다면 호주와 일본의 친밀한 전략적 관계형성이 지속되기 힘들다는 우리의 태도를 표명해야 한다.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역시 호주에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3월14일자 ‘디 오스트레일리안’ 사설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회피하는 일본’


    그동안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아시아 국가들의 문제로만 인식해온 미국과 호주 국민이 백인 피해자의 등장으로 시각을 달리한 듯하다. 더욱이 오헤른 할머니는 부유한 가정 출신이고 전쟁포로 상태에서 끌려갔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행한 성매매’라는 일본 정부의 논리가 무너진 것이다.

    일본의 자업자득

    오헤른 할머니는 “아베 총리의 망언 때문에 미국과 호주 언론이 자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다보니 두 나라 국민의 관심이 고조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상황에서 존 하워드 총리와 조지 부시 대통령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 “이런 기회를 흘려보내지 말고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또 “일본은 미국을 두려워한다. 미국이 압박을 가하면 일본 정부가 공식 사과할 가능성이 높다. 민주당이 집권하면 일이 더 수월해질 것이다. 그게 내가 건강하게 살아야 할 이유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을 때까지 나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종전(終戰) 62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한 일본 정부의 어리석음과 용기 없음이 아시아의 문제로 국한될 뻔했던 사안을 마침내 세계적인 문제로 키워놓은 셈이다.

    그 결과 미국 하원에서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는 마이크 혼다 결의안이 통과 직전에 있고, 호주 상원에서 발의된 비슷한 내용의 캐리 네틀 결의안도 두 번의 부결 끝에 긍정적인 분위기로 변하고 있다. 캐나다 의회도 최근 같은 내용의 결의안을 상정했다.

    이런 현상은 일본 정부가 자초한 것이다. 일본 정부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군부의 위안부 강제동원을 재차 부인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초 일본 정부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내각회의를 통해 “일본 정부가 발견한 자료에서는 군대 위안부 강제연행을 직접 나타내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밝힌 것. 이로써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는 없다” “광의의 강제성은 있었어도 협의의 강제성은 없었다”는 아베 총리의 태도를 추인해준 셈인데, 이는 1993년 군대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한 이른바 ‘고노 담화’를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다.

    미국도 등 돌린 아베 망언

    지난 2월26일 미 국무부 톰 케이지 부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일본이 강제 성노예와 관련된 범죄의 중대성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방향으로 이 사안을 처리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그동안 시종일관 일본을 감싸고 도는 태도를 취해온 부시 행정부가 위안부 문제에서는 일본 정부에 강력하고도 직접적인 권고를 한 것이다. 그간 이 문제와 관련해 ‘아시아 각국의 당사자 해결원칙’을 고수해온 미국이 ‘책임질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라’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

    아베 총리의 첫 미국 방문을 앞둔 일본 정부가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최근 아베 총리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위안부 문제를 거론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미국과 일본 외교당국의 이 같은 태도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오헤른 할머니는 존 하워드 호주 총리에게도 압박을 가하고 있다. 아베 총리를 만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고 분명하게 책임을 물으라는 것.

    하워드 총리도 외면할 수 없는 요구였을까. ‘호주와 일본 안보협력에 관한 공동선언’에 서명하기 위해 3월11일부터 일본을 방문한 하워드 총리가 뜻밖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거론해 큰 관심을 모았다. 그동안 하워드 총리는 미국 다음으로 중요한 무역 파트너인 일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런 행보를 보여왔는데, 다른 일도 아닌 안보조약 서약을 위한 공식 방문 자리에서 일본의 아킬레스건인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하워드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그것은 비극적인 시대에 벌어진 소름끼치는 사안이었다.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여성이 피해를 당했고 그중에 호주 여성도 포함됐다는 것은 더 이상 둘러댈 수 없는 엄정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하워드 총리의 기자회견을 보도한 ‘디 오스트레일리안’은 “1944년 일본군에 의해서 끌려가(captured) 3개월 동안 위안소에서 강간을 당한(raped) 호주 국적의 오헤른씨가 대표적인 증인”이라면서 “강제연행을 증명할 증거(testimony)가 없다는 아베 총리의 발언은 거짓”이라고 공박했다.

    3월7일 시드니 수요집회에 참석해서 연설한 캐리 네틀 호주 연방 상원의원(녹색당)은 3월12일 필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번 일을 계기로 호주 의회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호주 상원에서는 미국 하원보다 먼저 일본 정부 사과 촉구 결의안이 두 번이나 상정됐으나 모두 부결된 바 있다. 민주당 소속 나타샤 데스포야 의원과 녹색당 소속 캐리 네틀 의원이 발의했지만 민주당과 녹색당은 두 당을 합해도 10석이 안 되는 미니 정당이다.

    결국 두 의원은 다수당인 노동당을 끌어들여 결의안 채택을 모색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전혀 기대하지 않던 자유-국민 연립당의 하워드 총리가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관심을 보이자 캐리 네틀 의원이 크게 고무된 것이다.

    ‘나비 효과’

    이런 현상을 ‘나비 효과(The butterfly effect)’라고 하면 혹여 억지소리일까. 3월7일 정오, 호주에서 최초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시드니 수요집회의 반향이 전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일본 정부가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다. 시드니에서 촉발된 ‘나비 효과’가 호주 대륙은 물론 일본, 미국 등지로까지 파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축을 받지 않고서는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80~90세에 이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출신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그러나 할머니들이 힘들게 토해내는 절규의 메아리는 거대한 폭풍처럼 커져갔다. 때마침 간간이 떨어지는 빗방울에 촉촉하게 젖어들던 할머니들의 떨리는 음성은 뉴욕타임스, 로이터통신, CNN 등의 보도를 통해서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호주 내에서도 시드니모닝헤럴드, 호주 국영 abc-TV 등 거의 전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일본의 아시아 국가 경시 풍조

    일본에서 온 기자들의 취재 열기는 더 높았다. 비록 그들은 일본 우익단체의 테러 위협 때문에 공개적으로 신분을 밝히지 않았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관련된 아주 작은 사안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시드니 주재 일본 총영사관 앞에서 열린 제751차 ‘수요집회’의 하이라이트는 한국의 길원옥(79) 할머니, 대만에서 온 우이시우메이(91) 할머니, 그리고 호주의 얀 오헤른 할머니가 아베 일본 총리에게 보내는 항의 성명서를 히로시 바나베 시드니 주재 일본 부총영사에게 전달하는 순간이었다.

    “우리 세 사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오늘 시드니 주재 일본 총영사관 앞에서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일본이 저지른 인권 유린의 참상을 일본 정부로부터 보상(사과)받기 위해서 왔다”로 시작되는 성명에는 세 할머니의 요구사항과 서명이 들어 있다.

    한국에서 열린 ‘수요집회’에는 단 한 차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일본 외교관이 시드니에서는 나타났다. 물론 아주 잠깐 총영사관 건물 앞에 나와 성명서를 전달받는 데 그쳤지만 그런 과정에 함의된 상징성은 컸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듯 총영사관 관계자와 안전요원을 대동하고 나타난 바나베 부총영사는 아주 긴장된 목소리로 “이 성명서를 아베 신조 총리께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집회 참석자들의 격앙된 모습에 다소 위축된 듯했다.

    시드니 집회를 주관한 한인동포 박은덕 변호사는 “일본 정부의 태도를 보면 그들의 아시아 국가 경시풍조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에서 시비를 걸지 않으면 아시아 국가들의 항의쯤은 무시하고 지나가겠다는 일본 정부의 오랜 습관이 읽힌다는 것.

    FCWA의 간사를 맡고 있는 한인 2세 송애나(23)씨는 “이번 행사는 호주 사회에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알리고, 지금도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국제연대 캠페인의 일환으로 기획됐다”고 설명했다.

    이런 국제연대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한국의 윤미향 정대협 공동대표를 비롯해 대만과 필리핀의 여러 여권 운동가가 참가했다. 특히 윤미향 공동대표는 첫 집회를 여는 시드니 팀을 돕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모습이었다. 호주노동조합 산하 LHMU 소속 노동자들도 깃발을 들고 나타나 행사에 적극 참여했다. 그들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주최측에서 준비한 전단을 나눠주기도 했다.

    한 노동자는 국제노동기구(ILO)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오래전부터 개입한 사실을 기자들에게 상기시켰다. 한국과 일본의 노동조합들이 ILO에 군위안부 동원이 ILO의 강제노동금지규약 위반이라며 문제를 제기했던 것. 그 결과 ILO는 일본의 위안부 동원 및 착취가 ILO 규약 위반이며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해 적절한 배상을 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채택했다.

    이날 저녁 7시부터 시드니 한인회관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한인 동포들과 만났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모임에 세 할머니는 지친 몸을 이끌고 참석해 60여 년 전의 비극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오헤른 할머니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기력이 쇠진한 모습을 보일 때가 종종 있다. 다음은 한인회관의 밤 모임을 마친 후 오헤른 할머니가 필자에게 들려준 속마음의 일단이다.

    ‘깊은 슬픔’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성노리개로 목숨을 부지했던 3개월은 ‘짐승의 시간’이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the dignity of human being)’이라는 단어는 책 속에나 존재하는 허상이었습니다.

    1942년, 일본군이 인도네시아 자바섬을 점령하기 전까지 나는 온전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19세 성년이 되도록 슬픔의 실체를 잘 모르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내가 (짐승에게도 감정이 있는지) 잘 몰라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지만, 사람만이 슬픔에 잠기고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싶어요. 자아를 발견하고 슬픔을 느끼는 것은 형이상학의 영역이거든요. 바로 그런 슬픔이 어느 날 갑자기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그것도 끊임없이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슬픔에 잠겨서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됐습니다. 문제는 그런 성숙의 과정이 내 인생을 통째로 우울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는 데 있습니다. 마음의 분노를 억누르다보니 그 분노가 응고돼서 우울증으로 변하더군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인데 자꾸 되살아나서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겁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참기 어려운 생각들을 무의식으로 내려보낸다고 합니다. 나쁜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무의식으로 내려가서 그림자가 돼버린 기억들이 어느 순간 불쑥 되살아나서 나를 한동안 앓게 만드는 거지요.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싸울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우리가 모두 죽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나는 믿습니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며 아시아의 일본군 위안부들이 사과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투쟁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들은 정의의 심판을 받을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고통을 그냥 저버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일본은 치욕을 안고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위안부라고 불렀지만 사실은 ‘성적 노리개’였습니다. 정말 끔찍했지요.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겁니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통해서 우리의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고 일본의 도덕성도 회복해야 합니다. 거듭 일본에 촉구합니다. 이젠 가면을 벗어야 할 시간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할머니들이 자꾸 돌아가시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수치심 때문에 침묵하고 있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하루빨리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생생하게 다 증언해야 합니다. 그래야 전쟁의 참상이 반복되지 않습니다.

    60년도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이미 용서했습니다. 다만 잊을 수 없을 뿐입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의 태도를 보십시오. 국제사회가 나서서 규탄해야 합니다. 특히 일본과 친밀한 국가인 미국과 호주 등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합니다. 그건 내정간섭이 아닙니다.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는 겁니다.”

    오헤른 할머니는 인터뷰를 하다가도 문득문득 악몽이 되살아나는지 몸서리를 치는가 하면 목이 메어서 말을 잇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의 슬픔은 강 같은 슬픔이었고, 바다 같은 슬픔이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어나곤 했다. 내가 공연히 인터뷰를 한답시고 할머니를 괴롭히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슬픔은 극복돼야 하는 것, 극복되고 승화돼서 미래의 전망까지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무릇 ‘슬픔만한 거름’이 없기 때문이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한편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모임인 아시아연대회의가 5월19일부터 21일까지 서울 대방동 여성플라자에서 ‘앞으로의 과제와 연대를 위하여’라는 주제로 열릴 예정이다. 오헤른 할머니도 여기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할 예정인데, 한국에 가면 3년 전에 돌아가신 정서운 할머니 묘소를 참배할 계획이다. 14세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온 사실을 세상에 맨 처음 고발한 정서운 할머니가 1992년 호주 TV에서 본 바로 그 할머니이기 때문이다.

    “내가 죽기 전에 꼭 바라는 것은… 확실하게 그놈들한테 사죄를 받고… 그런데 못 보고 눈 감으면 억울해서 우짤꼬….”

    숨지기 직전 정서운 할머니가 그토록 소원했던 일본의 사죄는 할머니가 숨을 거둔 지 3년이 넘도록 이뤄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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