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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 20년

1987년 청와대 민정수석 김용갑 의원의 ‘그해 6월’

전두환, 직선제 수용 건의에 “노태우를 설득하라, 특명이다”

  •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1987년 청와대 민정수석 김용갑 의원의 ‘그해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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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청와대 민정수석 김용갑 의원의 ‘그해 6월’
▼ 박군이 고문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습니까.

“저는 민정수석으로 민심 동향 파악이 주업무였고, 경찰과 행정파트는 강우혁 정무2수석 소관이었습니다. 강 수석이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박군이 탁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고 보고하길래 제가 ‘어이 강 수석,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라고 나무랐죠. 정치 담당이던 김윤환 정무1수석과 박영수 비서실장 등 모두들 못 믿겠다고 야단이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경찰의 보고는 초등학교 학생도 못 믿는다’고 했죠. 강 수석도 ‘나도 못 믿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경찰에서 그렇게 우기는데’라며 답답해했습니다. 박군 사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애초부터 직감했습니다. 취조과정에서 쇼크사했거나, 실수를 했거나 뭐 뻔한 것 아닙니까.”

▼ 당시 수사를 맡은 안상수 검사는 박군 고문치사 은폐가 청와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는데요.

“내가 아는 한 청와대의 지시는 없었습니다. 청와대에서는 말도 안 되는 보고라고 나무랐고, 정확한 사인(死因) 조사를 지시했습니다. 검찰은 자기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말을 했겠지만, 담당 수석비서관인 강우혁 수석 자신이 펄펄 뛰고 그랬는데 그게 감춘다고 감춰질 일인가요. 깊숙하게는 모르지만 안기부가 어떻게 연관됐다는 것은 이미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고. 결국 경찰의 뒤를 봐주다 문제가 생겨 장세동 안기부장이 그만두는 일이 벌어졌죠.”

“계엄령은 절대 안 된다”



▼ 전국적 시위가 있었던 6월10일 상황을 들려주시죠.

“6월10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의 대통령후보 지명 전당대회가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치러지고 있을 즈음 저는 시위가 한창이던 서울 시내에 있었습니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죠. 최루탄 무서운 줄 그때 알았습니다.

당시 김옥조 민정비서관(전 중앙일보 정치부장)을 비롯한 민정비서실 식구 20여 명 전부가 종로, 명동, 시청 앞에 나가 있었습니다. 여기저기를 둘러봤는데, 명동의 다방에도 들어가고 지나가는 행인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아, 민심이 완전히 돌아섰구나. 민심을 다시 회복하려면 대단히 어렵겠구나’ 하고요. 그래서 그날 모종의 결심을 했죠.”

▼ 경찰이 명동성당 포위를 푼 것도 김 의원의 작품이라고 하던데요.

“10일 밤 경찰이 명동성당을 원천봉쇄했는데 3000여 명이 성당 안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었죠. 다음날인 11일 아침 경찰에 통보하지 않고 명동성당에 들어가봤더니 농성자 대부분이 배고픔에 시달리며 진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뒤편으로 통로를 열어주면 좋겠다고 지휘부에 안을 냈습니다. 그러자 대다수의 농성 학생이 빠져나가고 200여 명만 남았습니다. 제가 성당 안에서 빠져나오자 경찰이 그때서야 알아보고 인사를 하더군요.”

▼ ‘모종의 결심’이란 게 뭡니까.

“국민의 여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것이었지요. 결심을 굳히고 6월12일 안무혁 안기부장, 이춘구 민정당 사무총장을 만나러 롯데호텔로 갔습니다. 민심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를 의논하던 중에 저는 ‘직선제를 받아주는 게 어떻겠느냐’고 불쑥 말을 꺼냈습니다. 직접화법을 선택한 것이죠. 그랬더니 약속이나 한 것처럼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내가 장난 삼아 그런 이야기를 한 줄 안 모양이에요. 그날 논의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끝났습니다.”

▼ 당시 정권 핵심부에선 다른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었던 겁니까.

“6월14일 청와대 녹지원에 대통령비서실장과 정무·공보수석, 군 수뇌부, 치안관계 장관 등이 모였습니다. 일요일인데도 전 대통령이 이들을 급히 불러 모은 것은 계엄령을 선포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의논하기 위해서였어요. 전 대통령은 실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대통령은 생각만 있었을 뿐, ‘계엄령’이라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습니다. 치안본부장이 경찰력으로 수습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

▼ 김 의원은 왜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쪽(병력이나 경찰력을 동원할 수 있는) 라인에 있지 않았죠. 어쨌든 그 소식을 접하고 바로 청와대로 들어갔습니다. 회의는 이미 끝났다고 해서 급히 비서실장과 공보수석, 정무1, 2수석을 불러서 비서실 입구 조그만 방에서 제 복안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방법을 바꾸는 게 좋겠다, 우선 절대로 계엄령을 선포해서는 안 된다, 그건 수습이 아니라 정국 혼란을 확산시키는 방책이다, 그 다음엔 국민이 원하는 것을 받아주자, 일단 받아주고 최선을 다하면, 즉 국민의 진정성을 이해하면 충분히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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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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