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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 20년

1987년 전대협 의장 이인영 의원의 ‘그해 6월’

“토론보다 선동의 시대, 군 나섰어도 온몸 던졌을 것”

  • 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1987년 전대협 의장 이인영 의원의 ‘그해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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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전대협 의장 이인영 의원의 ‘그해 6월’

6월항쟁 당시, 학생뿐 아니라 화이트칼라를 비롯한 시민의 참여가 적극적이었다.

그에게 오더를 내린 언더서클의 정체는 ‘나중에 알고 보니’ 고려대 기독학생회 비공개 서클이었다. 언더서클 활동이 대개 그렇듯 그도 처음엔 어떤 간판이 달렸는지 모르고 들어가 활동했다.

조직의 결정과 함께, 그도 마음을 굳히고 충주 집에 내려갔다. 그의 결심에 놀란 부모님이 서울에 있는 형에게 당장 휴학계를 써갖고 내려오라 호통쳤지만 소용없었다.

“그때는 독했죠. 그게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건 줄 알면서도 군사독재와의 싸움이 우선이라, 부모와 가족을 뒤로 하고 뛰어들었죠. 그게 ‘더 큰 어머니’ 조국에 대해 아들 노릇하는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다음 날 새벽 서울로 올라와 선거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고려대 서창캠퍼스 혈서 유세는 그의 독한 구석을 보여준다.

“고려대 안암캠퍼스와 서창캠퍼스 간에 학력고사 성적, 학생에 대한 대우 차이가 컸음에도 총학생회를 단일하게 구성했는데, 서창캠퍼스 학생들 불만이 컸어요. 선거 때만 되면 우르르 몰려와 ‘우리는 하나다’고 외치는데, 자신들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고 생각한 거죠. ‘또 표 달라고 왔냐’며 냉랭한 반응을 보였어요. 운동권의 정의를 놓고 볼 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학생운동이 핑계가 됐든, 타성에 젖어서이든 어쨌든 노력을 안 한 거죠. 그런 점들에 대해 사죄하고 싶었어요. 제 진심을 표현할 다른 방법을 못 찾겠더라고요. 당초 준비했던 원고를 찢어버리고 혈서를 썼죠. ‘서창 민주화 투쟁 만세’라고. 그런데 그럴듯하게 가공하진 못했어요. 면도칼로 그어야 피가 잘 나온다는데, 이로 깨물어서 하려니까 피도 잘 안 나더라고요. 그래도 그걸로 진심이 통하긴 했어요.”



‘정의는 승리하고, 옳으니까 싸운다’

그는 총학생회장에 당선됐지만 결국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서창캠퍼스 발전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다. 1987년 정치 투쟁이 워낙 긴박하게 진행된 탓이지만, 어쨌거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분명했다. 이 의원은 “혈서를 썼을 당시 학생들이 표구해 걸어뒀는데, 2~3년 뒤에 가보았을 땐 액자가 없었다. 그게 그들의 평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됐을 때만 해도 6월항쟁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까.

“1987년이 워낙 중요한 시기라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는 몰라도 대회전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어요. 군사정권은 정권을 재창출해 자신들의 군사독재 기반을 재편하려 했고, 학생운동세력으로선 그에 대응하는 총공세를 퍼부어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정권을 세워야 했으니까요. 물론 6월항쟁이라는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거나 성공을 예단했던 건 아니죠. 이길 거라 생각해서 싸운 게 아니었어요. 다만 ‘정의는 승리하고, 옳으니까 싸운다’였죠.

대회전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이미 각성한 사람들만으로 투쟁하는 건 동력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도록 문화적, 정서적으로 유도해야 했죠. 3월 총학생회 선거, 4~5월 대학 축제 등을 통해 참여 기반을 넓히고, 대중적 역량을 쌓아올리는 정도는 목적의식을 갖고 계획했어요. 총학생회 투쟁위원회 100명이 움직이는 것보다 1만명의 결의를 모으는 게 더 힘을 발휘하는 건 당연하잖아요. 고려대에서는 매년 4월18일에 4·19탑까지 마라톤을 하는데, 거기에 1만명 이상이 참여하면 그 합법적 공간 안에서 터져 나오는 ‘독재타도, 호헌(護憲)철폐’ 함성이 비합법적 공간에서 500, 600명이 외치는 것보다 훨씬 큰 파괴력을 지닐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최대한 합법적이고, 최대한 대중적인 방법을 고민했죠.”

▼ 5월에 서대협을 결성한 것은 대회전을 조직적으로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나요.

“학생운동세력이 군사독재에 대한 반감, 대회전의 기반 정서를 확산시키고 있는데, 4월13일에 전두환 대통령이 호헌 선언을 했습니다. 온 국민의 직선제 개헌 요구에 불이 붙고 있는데, 개헌 논의가 무의미하다며 호헌 선언을 하고, 체육관 선거를 통해 노태우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려고 하니 민심이 들끓었죠. 1월에 박종철 물고문치사사건으로 정권의 도덕성이 훼손됐는데, 4월13일에 정치적 정통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이런 선언이 나오니까 분노가 끓어오를 수밖에요. 4월19일 수도권 30여 개 대학이 연합집회를 하고, 5월 초에 각 대학 학생회장이 모여서 학생회장 협의체를 구성해 대학간 연대의 틀을 공식화하자면서 서대협을 만들었죠.”

▼ 그후 서대협 의장에 선출됐는데, 당시 학생운동의 중심이 서울대에서 고려대로 넘어온 겁니까.

“전체 학생운동의 리더 노릇은 서울대가 주로 해왔어요. 대개 서울대에서 학생운동의 이념과 노선을 팸플릿을 통해 창출하고 제공해왔기 때문이죠. 그런데 1986년 들어 서울대 운동권이 자민투, 민민투로 나눠지고, 자민투가 친북 성향을 띤다고 매도되면서 서울대 학생운동조직이 많이 파괴됐습니다. 5월3일 인천에서 직선제 개헌 대투쟁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연세대 지도부도 역량이 절반 정도 파괴되고, 10월28일 건국대 투쟁에서 나머지 역량마저 대부분 사라지고 말죠. 그 결과 고대의 지도부 역량이 상대적으로 많이 살아남았어요. 또 다른 이유는, 학생운동은 이념이나 노선에 대한 주도적 권위 못지않게 분열을 넘어선 대단결을 통해 의기로, 용기로 뚫어 나가는 것도 필요한데, 그런 면은 고대가 강했어요. 언더서클이 동아리나 총학생회 활동을 배후조종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중노선으로 전환해 대중적이고 공식적인 형태로 학생운동을 이어갔죠. 그런 것들이 학생운동의 모범으로 받아들여진 측면이 있어요. 보통은 총학생회장 뒤에서 배후조종하는 언더서클의 ‘대빵’이 따로 있게 마련인데, 고대는 그런 걸 없애버려 어떤 의미에선 제가 막강한 총학생회장이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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