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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 20년

1987년 전대협 의장 이인영 의원의 ‘그해 6월’

“토론보다 선동의 시대, 군 나섰어도 온몸 던졌을 것”

  • 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1987년 전대협 의장 이인영 의원의 ‘그해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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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징검다리, 9월이 귀착점

1987년 전대협 의장 이인영 의원의 ‘그해 6월’

시위대 맨 앞줄에 이인영 의원과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던 우상호 의원이 있다.

4·13 호헌 선언은 메마른 민심에 기름을 끼얹었고, 거기에 불을 붙인 것이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은폐조작 폭로였다. 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년기념 추모미사가 끝난 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사건의 진상이 조작됐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박종철 사건의 범인이 경찰 고위층에 의해 축소 조작된 사실이 언론을 통해 확인된다. 1월에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처음 알려진 뒤, 2·7 박종철군 추도집회와 3·3 국민평화대행진을 진행했던 야당과 재야인사들은 즉각 6월10일에 전국 규모의 대대적 항의집회를 열기로 결정한다. 6월10일은 마침 여당인 민정당이 전당대회를 열어 노태우 당대표를 대통령후보로 지명하기로 돼 있었다. 5월27일, 야당과 재야단체 대표 2000여 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국민운동본부가 만들어지고, 6·10집회 때 박종철 사건 규탄과 아울러 직선제 개헌을 촉구하기로 결정한다.

“그때 각 대학도 6월10일에 맞춰 총궐기하기로 뜻을 모으고, 준비를 해요. 하지만 6월 안에 ‘쫑’ 날 거라고 생각진 못했어요. 6월에 ‘잽’을 날리고 9월에 제대로 붙어보자는 계산이었죠. 6월을 징검다리로 삼고, 방학 때 역량을 농축하고 넓혀서 9월에 농민 추곡수매가 인상 투쟁, 노동자 임단투와 결합해 결론을 보자는 거였어요.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대통령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필리핀 2월 혁명을 참고했고, 9월이 결국 귀착점이 아닌가 생각했죠.”

맨몸으로 방패를 뚫다

▼ 당시 기사를 보면, 국민운동본부는 국민 행동요강까지 정하는 등 아주 조직적으로 6·10 집회를 준비했던 것 같아요. 학생운동세력과의 협의나 교류는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어요. 학생들은 재야나 야당이 혁명적이지 않고 프티적이라고 과소평가했고, 반대로 재야나 야당은 학생운동권이 급진적이고 위험하다고 인식했죠. 인천 5·3사태, 10·28 건대 사태 영향이죠. 학생들은 쉽게 통제가 안 된다며 조심스러워했는데, 박종철군의 죽음으로 인해 그 모든 벽이 와해됐어요. 정권의 치부, 바닥이 드러난 마당에 서로에 대한 작은 불신 때문에 연대하지 못해 적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죄악이라고 생각한 거죠. 학생들이 화염병 던지거나 각목 휘두르는 것을 자제하고, 차도로 바로 뛰어드는 대신 인도에서 군중에 섞여 함성을 지르는 비폭력 시위로 전환하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더 강화됐지요. 학생운동은 전술적으로나 철학적으로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 광주민주화운동 7주년 기념행사 마지막 날인 5월23일에 학생들이 종로3가 도로에 드러누웠던 것은 계획된 일이었나요.

“그날 3000여 명이 나왔는데, 그중 1500여 명이 드러누웠을 거예요. 고대생이 800~900명쯤 됐죠. 지나고 나서 보면, 그날의 일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관성의 찌꺼기를 털어내는 거였어요. ‘싸움’ 하면 으레 돌 던지고, 화염병 던지고, 각목 휘둘러야 용감한 거라는 생각을 털어내고, (경찰에) 끌려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맨몸뚱이로 맞서는 더 큰 용기를 발휘했죠. 그 때문에 국민 대중의 공감을 얻었고, 도덕성을 인정받았어요.

이른바 결사항전, 옥쇄를 각오했죠. 한 사람이 잡혀가면 두 사람이 분노하고, 열 사람이 동참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거예요. 우리 몸뚱이를 내던져 불을 지핀다는 생각이었어요. 친구, 부모님, 교수님한테 편지를 썼어요.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간다, 왜 우리가 가는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가자’ 해서 간부들은 혈서로 다짐하고, 일선에 있는 활동가는 편지를 썼어요. 다 잡혀 감옥에 갇히면,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 편지를 공개하고, 대자보를 붙여 많은 학생이 총궐기하도록 하려고 했죠.

그런데 의외로 수배 중이던 서너 명을 제외하고는 그날 밤 거의 다 풀려났어요. 그게 오히려 뚫어낸 거라고 생각해요. 건국대 사태 때 1300여 명이 구속됐는데, ‘다 잡아가라’하며 나서니 정권이 오히려 풀어준 거잖아요.”

이 의원은 연좌시위나 연와시위와 같은 평화투쟁 방식이 대중의 6월항쟁 참여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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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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