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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5

소소한 일상도 기록하면 죽지 않는다

  • 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소소한 일상도 기록하면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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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도 기록하면 죽지 않는다

갈석산 오봉에 있는 한유의 사당. 해발 400m에 자리잡고 있다.

‘관내정사’에는 ‘호질전’말고 문학 얘기가 더 있다. 연암이 영평성에 갔을 때, 멀리 강물이 휘감고 아득히 산맥들이 노루처럼 달려가는 지형을 조망하면서 자기의 조국 평양, 대동강 푸른 물이 흐르고 부벽루가 우뚝 솟은 풍경을 상기하고 비교했다. 조선의 시인 김황원(金黃元)이 쓴 등부벽루시(登浮碧樓詩)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을 떠올렸다. 그 절경과 절구의 절묘함에 수긍하면서도 ‘溶溶’이란 형용사와 ‘大野’란 수식은 실제에 맞지 않다고 비꼬았다. 말하자면 가벼운 시화(詩話) 한 토막이었다.

천속한 민간의 애탄

또 한 가지, 연암은 이색적인 체험을 했다. 쓰기에도 어렵고 눈감기에도 어려웠다. 7월27일, 연암이 사하(沙河)에서 풍윤(豊潤)으로 옮기는 도중, 진자점(榛子店)에서 점심을 들었다. 거기서 사단이 벌어졌다. ‘양한(養閒)’이란 아리송한 이름으로 성업 중인 창루(娼樓)였다. 강희 황제의 서릿발 같은 엄명으로 강남의 기관(妓館)들이 쑥대밭이 된 판국인데, 창루에선 기녀들이 주렴 속에서 비파와 젓대, 박자판을 타거나 불고 또 두들겼다. 그들의 이름도 시적이어서 유사사(柳絲絲), 요청(?靑)이라 했고,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계생초(鷄生草)’ ‘답사행(踏莎行)’ ‘서강월(西江月)’ 같은 곡조를 노래했다. 그것은 노래라기보다 창에 가까웠다. 가사 또한 인생의 무상이나 나라의 흥망이나 인걸의 부침 등 필부의 정서를 그린 것들이다.

계생초(혹은 기생초), 답사행, 서강월 등은 노래의 고유 제목이 아니다. 그것은 일정한 틀의 이름이다. 다만 그 이름만큼은 시에서 발췌했다. 사(詞)인 경우 사패(詞牌), 곡(曲)인 경우 곡패라 한다. 시가 남성적인 내용에 통일적인 근엄한 형식이라면 사곡은 여성적인 내용에 들쑥날쑥한 자유로운 형식이다. 사와 곡은 또 다르다. 사가 시의 변형으로 여성적인 우아한 내용이라면, 곡은 사의 변형으로 여성적이되 현실적이고 사회적이다.

사(詞)는 고려 사대부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반면, 곡(曲)은 그러지 못했다. 곡이 원(元)나라 때, 북경 지방부터 사회 일반에 널리 영향을 끼쳤지만, 폐쇄적인 조선의 성리학 풍토는 그걸 용인하지 않았다. 연암이 창루 현장에서 녹취한 그 세 편도 명·청대의 언정소설(言情小說)에 인용됐거나 교방(敎坊·가무를 가르치는 관아나 관기를 교육하는 기구)에서 불리던 산곡(散曲)이었다. 그러니까 매우 대중적이면서 천속한 민간의 애탄이었다. 그러한 가두의 창이 조선 사대부 문인에게 읽혔을 뿐 아니라, 연암이 그 녹취 과정을 부끄럼 없이 털어놓은 것은 진실 앞에 주저하지 않는 실학의 풍모를 드러낸 장면이라 하겠다.



연암은 일찍이 한중 간의 문화 갈등이나 조선 동족 간의 반목을 간파했는지 모른다. 지난번 신민둔 참외밭에서 중국 참외 장수와 조선 사절 수행원이 참외값을 두고 옥신각신 싸우던 사건을 비롯해 명·청의 격전지 고교보에서 우리 사절이 공금을 유실당한 뒤 한중 간 갈등이 심각했다는 이야기 등이 그랬다.

동족 간 삐걱거림, 중국인 촌극

그런 일이 또 있었다. 7월25일, 사절 일행이 호호탕탕 무령의 서학년 저택을 집중 참관했던 때다. 백하 윤순이 우연히 이 집을 참관한 뒤로 그 명성이 한양에까지 알려져 연경에 가는 길이면 으레 이 집에 들렀지만, 피차의 예속이 다른 데다 주인이 작고한 뒤론 더더욱 접대가 소홀했다. 골동을 감추고 보여주지 않고, 심지어 피닉(避匿)하기도 했다.

동족 사이의 삐걱거림은 이러했다. 7월26일, 우리 사절은 영평의 이제묘(夷齊廟)에서 예의 고비나물 닭찜을 먹었다. 조선에서 고비를 조달해 먹다 죽은 백이숙제를 기려 그의 사당에서 고비를 먹는 것은 일종의 세리머니였다. 연암은 십수년 전의 일을 들은 대로 기록했다. 조선 본국의 건량청(乾糧廳)에서 고비를 조달해 요리해야 하는 데 차질을 빚자 건량관이 서장관의 곤장을 맞았고, 그 뒤로 관아들이 고비가 사람 잡는다고 저주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거북한 화두다. 풍윤 성밖에 고려보(高麗堡)라는 초가 마을이 있었다. 병자호란 때 끌려온 동포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북경 가는 길목이라 사절들이 오가며 들렀다. 처음엔 떡이고 엿이고 있는 대로 주고받았다. 그런데 웬걸, 말꾼과 하인들이 술값을 떼먹거나 토색하고 훔쳤다. 그러자 배반이 벌어졌다. 동포는 사절을 만나면 음식을 감추고, 사절은 동포에게 봉을 잡혔다. 결국 서로 소 닭 보듯 했고 심지어 삿대질하고 욕을 하기도 했다.

연암은 우리의 슬픈 풍속도를 그려놓고 속이 얼마나 아팠는지 중국인과의 촌극을 스케치했다. 어쩌면 피장파장을 만들려는 속셈일지 모른다. 연암이 고려보에서 소나기를 만나 어느 점방에서 비를 피했을 때 일이다. 앞채에선 부인네들이 부채를 만드는 참인데 웬 말꾼 하나가 알몸에 헝겊 한 조각으로 치부만 가린 채 뛰어들더라는 게다. 모두 혼비백산해 주인이 욕을 해대다 끝내 흙탕에 자빠지고, 보리기울을 사러 왔다던 말꾼은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주인이 연암 일행에게 연신 사과했다. 주인은 열 살이 채 안된 셋째딸을 데리고 나와 연암에게 수양딸 삼아달라고 간구했다. 그의 인격을 흠모한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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