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후반 최태민의 행적에 대해 이야기하는 채병률 실향민중앙협의회장.
“당시 전국적으로 새마음갖기운동 성금모금이 있었다. 총 5억7000만원 정도 걷혔다. 당시 화폐가치로는 상당한 거액이다. 중앙정보부는 최태민이 이 돈을 횡령한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김재규 부장이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이것이 친국을 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그러나 친국 과정에서 최태민이 돈을 횡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성금은 상업은행(지금의 우리은행) 효자동지점에 박근혜 명의로 고스란히 입금돼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그 사실을 파악하지도 않은 채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친국 도중 김재규의 얼굴에 통장을 집어던지며 ‘네 놈들이 도둑놈이니 남들도 그러는지 아냐. 조사를 하려면 똑바로 해’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김재규는 그야말로 박살이 났다. 비약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때의 원한으로 10·26의 비극이 잉태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채 회장은 박 대통령의 친국을 직접 목격했는지, 혹은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었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확답하지 않았다.
채 회장은 “박근혜를 처음 만날 당시 최태민은 지하 사글셋방에 살고 있었다”는 한 월간지 보도 역시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최태민은 당시 서대문구 송월동, 지금 관상대가 있는 자리에 살고 있었는데, 35평쯤 되는 단독주택으로 최태민 소유였다고 한다.
채 회장도 최태민이 아주 깨끗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했다.
“기업체나 기관에 구국봉사단 후원금을 받으러 가면 후원금 봉투와는 별도로 여비조로 얼마씩 넣은 봉투를 건네는 관행도 있었다. 최태민이 그런 돈까지 거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태민이 어느 정도 청탁에 관여하는 일도 있었는지 모른다. 당시 권력층과 선이 닿아 있거나 힘 있는 사람들에게 민원성 청탁이 들어오는 일은 수없이 많았다. 그런 청탁을 전부 다 거절한 청렴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나. 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대부분 미미한 액수였다. 최태민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 정도의 큰 비리를 저지르거나 부정축재를 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중앙정보부가 최태민을 샅샅이 뒤졌지만 처벌하지 못했고, 1980년대 신군부의 보안사 역시 1년여 동안 정밀조사를 했지만 별다른 혐의가 없어 최태민을 풀어줬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채 회장은 본인이 인정하듯 박정희 대통령 및 최태민과 가깝게 지내 온 인사이며, 구국봉사단 운영의 세세한 부분은 알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의 증언만으로 최태민 관련 의혹이 모두 해소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후보검증위 등 한나라당 일각에선 최태민과 그 일가의 재산내역은 박근혜-최태민 관련설이 계속 쟁점화되는 이상 대선후보 검증 및 의혹 해소 차원에서 상세히 규명될 필요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사인(私人)에 불과한 김재정씨가 이명박 후보의 처남이자 이 후보 재산관리인이라는 의혹이 일어 정치권 공세와 언론보도, 검찰수사 등 ‘3각검증’을 받고 있는 것과 여러모로 유사해 보이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이어 ‘신동아’는 이 전 총리 홈페이지의 ‘崔太敏 關聯 資料’ 문건 내용의 진실성을 검증했다. 이를 위해 문건의 최태민 비리혐의 중 핵심 사안 세 가지를 추출했다. 이 세 가지 혐의는 문건에 있는 최태민의 다른 혐의와는 달리 ‘박근혜’라는 이름이 직접 거명돼 있어 박 후보와의 관련성이 높았다. 또한 내용에서도 대규모 관급공사 수주 개입, 정경 유착에 의한 부실 기업인 해외 출국 알선, 국회의원 공천 비리 등 다른 혐의에 비해 훨씬 더 위중했다.
▼ 대규모 관급공사 수주 개입 의혹
이 전 총리 홈페이지의 ‘崔太敏 關聯 資料’는 최태민의 ‘利權 介入’(이권 개입)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78.12.30 부산시가 시행하는 서면지하상가 건설공사(공사비 58억원) 업자지명에 개입, 공사능력이 없는 대현실업(주) (成社長)에 지정토록 하기 위해 朴槿惠 비서관 金○○으로 하여금 朴槿惠의 의도임을 憑藉, 부산시 기획관리국 및 건설국장에게 압력 작용하여 동사를 假認可者로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