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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6

愚夫의 탈 썼지만 진천 동지할 업적으로 천하통일

  • 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愚夫의 탈 썼지만 진천 동지할 업적으로 천하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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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 건조와 해운 관리

愚夫의 탈 썼지만 진천 동지할 업적으로 천하통일

북경에 있는 동악묘 대문. 조선 사절이 여기서 옷을 갈아입었다.

연교보를 지나 노하에 당도했을 때, 연암처럼 조선의 산간서 성장한 사람이라면 개벽의 경희를 느낄 수밖에. 당시 노하는 경항(京杭) 운하의 기점인 데다 천진(天津)으로 흘러가는 조백하(潮白河)의 합수점이었다. 그러니까 동쪽으로는 북경의 외항인 천진으로 가는 길초요, 남으로는 항주까지 경항 운하, 그리고 북경의 조양문까지 작은 운하가 열리는 삼거리였다. 노하에 이르자 갑자기 우렛소리가 하늘이 무너질 듯했다. 배에서 울리는 대포 소리라 했다. 그 길로 강역에 올랐다. 포구에 가득한 돛대들이 삼대처럼 늘어섰다고. 포구 가에 있는 집 그 편액에 적힌 대로 ‘만수운집(萬雲集)’이나 ‘성문구천(聲聞九天)’처럼 만 척이나 되는 선박들이 구름처럼 모였고, 선적 소리가 구천까지 사무치는 광경이었다.

연암이 놀란 것은 만리장성에 견줄 만한 선박의 운집이 아니라 그처럼 많은 선박의 건조와 해운의 관리였다. 우선 배의 구조가 밑창, 갑판, 선실, 지붕의 4층인 데다 밑창은 창고로, 갑판과 선실은 조각과 그림으로, 지붕 누각 또한 현판, 주련, 휘장, 서화 등으로 꾸민 호화 선박이었다. 그때 한 떼의 선단이 도착했다. 호북(湖北)서 조세로 수납한 좁쌀 300만 을 실은 배들이었다.

포구에 운집한 선박마다 깃발이 펄럭였다. 그때 벌써 ‘절강(浙江)’ 이니 ‘산동(山東)’이니 하는 선적(船籍)을 깃발에 표시했던 모양이다. 이래서 연암은 노하의 배 구경을 못한다면 황성의 장관을 알 수 없노라고 총평했다.

그런데 연암은 여기서 희한한 걸 구경했다. 글쎄 배에 관을 싣고 상주가 머리를 조아리며 조객을 맞고 있었다. 7월9일에 사망한 부친의 유체를 모시고 먼 호북땅 고향으로 운구 중이었다. 그날이 8월1일이었으니 벌써 22일장인 셈이다. 상복을 입은 상주가 머리도 깎지 않은 채 코앞에 의례(儀禮) 몇 권 놓고 거상 중임은 조선과 별반 다름없었지만 거상기간이 턱없이 긴 데다 상가(喪家)에 풍악도 잡히고 투전판도 벌어지는 등 이색적인 상례였다. 연암은 거기 선상의 상가, 갈매기 구름 누각 모래사장 그리고 돛들이 오락가락 옹기종기 영롱하게 비치는 파란 창가에서 문득 물위에 뜬 집임을 잊은 채 ‘월파정상인(月波亭喪人)’, 곧 달빛 물결의 정자집 상주라고 시적으로 묘사했다.



연교와 노하를 떠나 통주와 영통교를 지날 때도 경이로움은 계속됐다. 영통교에서 조양문 밖까지는 운하 양쪽으로 짐승 모양을 한 수백, 수천 개의 난간 기둥과 무지개다리 수십 길에 펄펄 안개가 날렸으며, 통주에서 황성까지 긴긴 석판로에 쇠수레바퀴들이 마주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거기도 담장으로 에워싸인 분묘는 계주성이나 다름없었다.

이윽고 북경성 동악묘. 삼사(三使)는 관복을 고쳐 입고 높고 낮은 반열을 정비했다. 눈앞에 우뚝 선 정양문, 그러나 먼지가 부옇게 하늘을 덮은지라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수레들이 물통을 싣고 여기저기서 물을 뿌리고 있었다. 숙소로 가서 여장을 풀 차례다. 더 이상 경이로운 풍경이 있다 한들 정양문, 선무문, 유리창에 견주랴! 이제 압록강에서 북경성까지 서른세 군데의 역참을 지나온, 장장 1015km의 연행에 일단 쉼표를 찍어야 한다.

한·중 선비의 우의

‘관내정사’ 후반부 122km는 경이와 격정 일색이었지만 훈훈한 이야기 한 쪽이 없는 건 아니다. 연암이 7월30일, 호타하(??河)를 건너 삼하(三河)에 들렀을 때 갈 길이 바빴음에도 민가 한 곳을 찾았다. 삼하읍 동쪽 관우묘 옆 작은 초가집 모퉁이에서 중국 선비 손유의(孫有義)란 사람을 찾고 있었다. 손씨는 연암의 친구이자 조선의 실학자 담현 홍대용(洪大容)의 친구였다. 담헌이 연암보다 15년 앞서 그의 숙부 홍억이 서장관으로 북경에 출사할 때 군관으로 수행했던지라 그때 친교를 맺은 사이였다. 담헌이 연암 편에 편지와 선물을 부탁했기로 연암이 이를 전교하려 친히 방문한 것이다. 우편이 불편했던 시대, 한·중 선비의 우의를 상징하는 미담이다.

손씨는 산서(山西) 지방에 훈장으로 출타 중이라 만나질 못했고, 집에는 딸 하나를 데리고 부인만 사는지라 주렴을 사이에 두고 선물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던 풍속 또한 애틋하다. 그때 무너진 담장에 처녀 하나 하얀 얼굴을 달고 있더라고.

북경에서 연암 일행은 곧장 서관(西館)으로 머리를 돌렸다. 청나라가 안배한 사절의 객사(客舍)였다. 연암은 조선 사관의 내력을 밝혔다. 맨 처음 배정된 곳은 옥하관(玉河館)으로 청나라 개국 초에 자금성 동남쪽으로 흐르는 개울인 옥하에 지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로 체통을 세웠지만 머지않아 까닭 없이 러시아 사람들에게 넘어갔고, 두 번째 배정받은 회동관(會同館)은 건어호동(乾魚胡同)에 있는 옛날 만비(滿丕)라는 도통의 집이었다. 회동관은 흉가라는 소문으로 음산했다. 만비가 피살되고 그 가족들이 자살하면서부터다. 하지만 회동관을 계속 객사로 썼다. 다만 별사들과 동지사들이 한꺼번에 붐빌 때면 부근의 서관(西館)을 얻어 분관으로 썼다. 그러다 연암이 연행을 시작하기 한 해 전에 회동관이 소실되자 서관을 본관으로 임시 사용 중이었다.

필자는 지난 2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관내정사’ 후반부를 답사했다. 그러니까 연암이 다녀간 지 227년 만이다. ‘열하일기’ 어느 길인들 옛날 같을까만 이 구간, 계주성에서 북경에 이르는 길 만큼 벽해상전이 현실화한 곳은 없을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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