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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이 쓰는 이 사람의 삶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회장

“살아서 100만 달러 받는 화가 다섯은 있어야 하는데…”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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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재 가나아트센터 회장

1997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FIAC에서 세계적 작가 자오우지와 함께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로댕이나 부르델의 조각 작품을 가져오면 원작이 아닌 복사품으로 여기고 무시했다. 소조(塑造)는 일반적으로 작가가 제작한 틀로 8개의 에디션을 가진 동일한 작품을 만들 수 있으며, 이들 모두를 원작으로 인정했지만 그런 국제 개념이 당시 우리에겐 없었다. 일본에서의 비즈니스는 만만치 않았고 이 회장에게도 비행기삯 정도만 남았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점차 에디션을 포함한 조각시장의 존재와 개념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노력은 훗날 삼성이 로댕갤러리를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 뒤에도 말링규와 이 회장의 만남은 죽 이어져 꾸준히 작품과 정보를 나누었다. 이 회장은 말링규의 소장 작품을 한국에 전시하는 계획을 타진한다. 1985년 3월과 11월 가나화랑에서 개최된 ‘인상파전’은 국내 화랑으로는 처음으로 해외 미술작품을 유치한 전시였다. 즉 해외작품을 판매하는 한국화랑의 존재를 최초로 세계에 알린 것이다.

매그(Maeght)재단과의 인연도 이 회장에게는 의미가 깊다. 가나화랑이 안정기에 들어선 1991년쯤 그는 해마다 여름이면 남프랑스에 위치한 매그재단을 방문했다.

“매그는 세계적 미술관과 문화재단을 가진 화상으로 남프랑스 방스에 별장이 있었어요. 그의 선친은 1930년대부터 2차대전 전후까지 칸딘스키, 샤갈, 미로, 자코메티, 레제 등 서양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들의 작품을 관리하고 소장했던 인물이죠. 아들 애드리앙 매그가 내게 여름이면 방스에 레오 카스텔리가 찾아온다고 말해요. 그를 만나기 위해 유명 화랑들이 모조리 이곳으로 몰려온다고도 하고….”

레오 카스텔리야말로 미술계의 큰손이었다. 앤디 워홀, 제임스 로젠퀴스트, 프랭크 스텔라, 짐 다인, 제스퍼 존스, 리히텐슈타인, 탐 웨셀만 같은 굵직한 작가들이 다 그에게 작품을 줬다. 이호재 회장에겐 호박이 덩굴째 굴러들어온 셈이었다. 그해 여름 방스에서 레오 카스텔리와 만난 이호재는 이들 작품을 국내에서 전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1995년 즈음부터 가나화랑에서 우리가 볼 수 있었던 짐 다인, 제스퍼 존스, 리히텐슈타인 전시는 방스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다.

거기서 만난 유명 화상 중 부르노 비쇼버거도 있다. 그 역시 앤디 워홀, 바스키아, 바르셀로, 엔조 쿠키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이 회장은 바르셀로와 엔조 쿠키의 국내 전시를 추진했고 비쇼버거는 흔쾌히 수락했다. 바르셀로는 화폭의 새로움을 보여줬는데, 소말리아의 움막에 아틀리에를 두고 캔버스에 비도 맞히고 행인의 발자국도 찍어가며 학대하는 과정을 작업에 포함시켰다. 그의 그림을 나는 이 회장과 동행한 장흥아트파크 전시장에서 드디어 볼 수 있었다.



“인간에겐 의식과 무의식이 있지요. 그린다는 의식 없이 무의식적으로 그려진 그림이 더 강렬하고 매력 있다는 걸 바르셀로에게서 느껴요. 여기 원숭이 형상이 보이지요. 이 작가에게 동양식으로 치면 원숭이띠라고 말해줬더니 내 말대로 여기다 원숭이 한 마리를 그려놨네요.”

“작가에 투자하라”

초창기 가나의 힘은 그런 큼직한 국제 전시에서 비롯됐다. 일련의 국제전이 가나화랑에서 개최된다. 부르노 비쇼버거의 협력으로 열린 1993년 바르셀로전, 매그재단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열릴 수 있었던 1994년의 미로전, 그리고 이 회장의 큰 조언자인 바이엘러의 컬렉션을 통해 개최된 1995년의 추상표현주의전과 자코메티와 현대조각전 등이 그것이다. 특히 당시 안젤름 키퍼를 후원하고 있던 바이엘러는 이 회장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

“당신이 가진 작품들을 팔아서 작가를 지원하라. 작품을 소장하기보다는 작가에 투자하는 것이 화랑 본연의 임무다. 만약 실패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돈을 잃더라도 당신은 명예를 얻을 것이다.”

국제적인 화상뿐 아니라 해외 작가와의 만남도 빈번했다. 그중에서도 이 회장에겐 1980년대 중반 중국계 프랑스 작가인 자오우지(趙無極)와의 만남이 가장 인상 깊었다. 자오우지는 동양인으로 유일하게 국제무대에서 성공한 작가였다. 그런 자오우지가 첫 만남에서 “동양인으로서 해외 현대미술을 취급하는 가나 같은 화랑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며 “대만이나 중국에선 언제 ‘무슈 리’ 같은 화랑주가 나타날까”라며 끌어안을 때는 정말 뿌듯했다.

자오우지의 작품은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국내에서 외국작가 작품 거래 시장이 막 태동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때 2만~3만달러에 팔리던 자오우지의 그림이 지금 100만달러를 호가하고 있어요. 우리에게도 그런 작가가 있어야 합니다. 살아서 100만달러를 받는 화가가 5명 정도는 있어야…그래야 우리 미술계의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어요.”

카라라의 결심

인사동에 화랑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종로경찰서의 형사가 그를 찾아온다. 뜻밖에 그 형사는 이 회장에게 작가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종로 제주은행 2층에 조그마한 화실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전병현이란 작가를 도와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20대 후반이던 그보다 나이가 어린 작가였다.

전병현은 파리에서 미술공부를 하고 싶은데 비행기 삯을 지원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이호재는 기꺼이 지원하겠다고 대답했다. 그게 다였다. 다른 약속도 계약도 없었다. 이 회장의 첫 번째 작가 지원이었다. 그리고 전병현과의 인연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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