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에 포획당한 삶
영화는 연기하는 삶에 전 생애를 포획당한 왕차즈를 통해 결국 산다는 것, 인생 자체가 목숨을 건 일회적 연극임을 보여준다. 연극의 절정에 결국 자기 자신을 노출한 왕차즈가 죽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안은 욕망을 통해 삶을 그려냈다. 그런데 순간순간이 바늘을 삼키듯 아프다. 에릭 사티의 ‘그노시엔’처럼 시작한 영화는 마침표를 찍는 순간까지 조금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안은 관객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흥미로운 것은 왕차즈가 이로부터 선물 받은 6캐럿 다이아몬드를 보고 그를 놓아준다는 사실이다. 그녀를 움직인 것은 6캐럿 다이아몬드의 가격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 자체다. 그것은 그녀가 평생 처음 받아본 ‘선물’이었다. 그녀는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받았다는 것 자체에 황망해한다. 그녀는 선물을 받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연기하는 막부인이 아닌 진짜 왕차즈이기를 원한다.
그녀의 인생은 그녀를 부르는 세 번의 호출로 인해 달라진다. 그녀가 쓸쓸히 봉쇄된 도로에 갇혀 ‘왕차즈’라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친구들을 떠올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무대 위에 선 그녀가 무대 밖에서 부르는 그들의 음성에 고개를 돌리는 장면은 그런 점에서 안타까운 인생의 호출처럼 느껴진다. 누구든 자신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뒤돌아보는 순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왕차즈의 것처럼 치명적이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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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색, 계’의 후반부, 적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봉쇄된 도로에 갇힌 왕차즈의 모습이 쓸쓸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격렬하게 지나간 몸의 흔적 위에 이제 시간은 상실감만을 전달한다. 몸의 언어는 기록될 수 없기에 더욱 순간적이며 한편 허무하다. ‘색, 계’는 이렇듯 색의 허무함조차 감각적인 사유로 전달한다.
결국 인생은 마지막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는 자의 편이다. 영화는 욕망의 언어에 귀 기울여 연기에 실패한 왕차즈를 따라간다. 역사는 경계하는 자들의 기록이지만 예술은 그렇게 스러져간 불운한 배우들로 인해 지속된다. 그녀가 떠난 빈자리를 쓰다듬는 이의 손길이 애틋한 까닭은 그들의 열정이 그토록 우습게 끝났기 때문이다. 전 생애를 건 연극의 끝에는 죽음의 필연성이라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그게 바로 ‘색, 계’의 잔혹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