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호

‘삼성맨’들이 보는 삼성의 오늘

“국민 지지 못 받을 이유가 없다… 승계 ‘절차’와 ‘분위기’가 유일 변수”

  • 이규성 아시아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bobos@newsva.co.kr

    입력2008-01-09 15: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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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맨’들이 보는 삼성의 오늘
    “삼성이라는 거함이 망망대해에서 불이 나 좌초된 형국이다. 처음엔 쓰레기 소각장에서 난 작은 불쯤으로 치부했는데, 어쩌다 보니 진화가 안 돼 선박의 심장이라 할 엔진실까지 번진 셈이다. 쓰레기 소각장은 늘 화재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라 안전수칙 교육을 철저히 시키는데, 예상치 못하게 뒤통수를 맞은 격이다. 차라리 외부의 공격이면 맞서 싸우면 되는데, 내부에서 터진 재해다 보니 어떻게 손쓸 틈이 없는 상황이다.”

    삼성그룹 전략기획실의 한 고위 임원은 최근의 ‘삼성 사태’를 바라보는 삼성 내부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그룹 법무실장)의 폭로를 계기로 삼성증권, 삼성SDS 등에 대한 검찰 압수수색이 이어졌고, 2008년 1월부터는 특검 수사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파문이 걷잡을 수 없는 형국으로 퍼지자, 당사자 격인 ‘삼성맨’들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폭로 내용의 진위 여부를 떠나 삼성으로선 김 변호사의 폭로 자체가 여간 당혹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삼성 고위직을 지낸 인사의 내부고발도 처음인 데다 삼성의 ‘머리와 심장’으로 불리는 구조조정본부 법무실장을 지낸 사람이 ‘비자금 조성’ ‘정관계 로비’ ‘경영권 승계’ 같은 민감한 사안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삼성의 조직문화에선 여태 발생한 적도 없고, 발생해서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관리의 삼성’ 강박관념

    삼성그룹은 국내 임직원만 16만명, 해외지사 인력까지 포함하면 25만명이 넘는다. 삼성전자만 해도 110여 개의 국내외 법인을 관리하고 있다. 해외 생산법인(공장)도 11개국에 걸쳐 21개나 된다.



    이런 매머드급 글로벌 조직을 그동안 별 탈 없이 운영해온 비결 중 하나가 삼성만이 가진 ‘관리’의 힘이었다. 원래 ‘관리’란 단어는 삼성의 직책을 일컫는 용어 중 하나에 불과했다. 과거 삼성은 관리부장, 관리본부장이 사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관리본부장은 요즘 ‘재경팀장’ ‘재무팀장’ 등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과거 재무·경리 관련 인력이 승진하는 코스가 관리부장, 관리본부장이었다.

    삼성이 재무가 강하고 재무통(通)이 대접받는다는 사실은 삼성 내부뿐 아니라 재계에선 공공연한 비밀이다. 당장 이학수 부회장(전략기획실장)과 김인주 사장(구조조정본부)을 필두로 주요 계열사 사장들 중 태반이 재무 출신이다.

    삼성맨들은 ‘관리의 삼성’이라는 표현에 대해 외부와는 조금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그룹 고위 임원은 “‘관리의 삼성’엔 단순히 재무팀의 파워가 세다는 뜻만 담겨 있는 게 아니다. 삼성의 조직관리 기법을 통칭하는 것이기도 하다”며 광의의 의미로 받아들이길 당부했다. “삼성 계열사가 수십개를 넘고 오너가 일일이 계열사 경영을 챙기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면서 관리본부장을 통해 이원화된 조직관리를 해온 게 삼성의 전통이었다”는 것. 이렇듯 일사불란하고 치밀한 조직관리를 자랑하는 삼성에서 내부고발자(deep throat)가 생겨난 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삼성의 처지에선 관리의 중대한 허점이 발견된 것이다.

    삼성 IT계열사의 한 간부는 “삼성맨들은 내부에 문제가 발생해도 절대 외부로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을 갖고 있다. 김 변호사가 그런 관행을 깨뜨린 첫 번째 사례가 된 셈”이라고 말했다.

    ‘삼성맨’들이 보는 삼성의 오늘

    매년 4000억원이 넘는 돈을 사회 공헌사업에 내놓는 삼성. 그러나 이번 사태로 그 빛이 바랬다.

    “삼성은 톱니바퀴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예외나 일탈이 허용되지 않는다. 내부에서조차 냉혹하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지만 직원들은 엄격한 상명하복의 원칙에 따라 열심히 일하는 대신 이에 상응하는 높은 보상을 받는다.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관리경영을 펼쳐온 것이다.”

    그룹의 한 관계자는 “‘관리의 삼성’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임직원들의 크고 작은 불만들을 재빨리 파악하고 해소하는 관리 위주의 경영을 해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회사에 독기를 품고 달려든 임직원들도 회유와 설득으로 잘 이끌어왔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고백이다.

    조직보다 라인에 충성?

    하지만 이런 철저한 관리에서 비롯된 폐쇄성이 한 명의 내부고발에 그룹 전체가 휘청거리는 취약성을 드러냈다는 반성도 나온다.

    삼성전자의 모 과장은 “삼성의 관리경영은 기업의 성장기에서는 유효하지만 성숙기 혹은 변혁기에선 실효성이 떨어진다. 다양성이 중요시되는 요즘엔 조직의 이런 일사불란함과 완벽주의가 오히려 발목을 잡는다. 지금 삼성은 수직적 커뮤니케이션은 잘 발달된 데 반해 수평적 문화는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삼성맨들 중에는 삼성이라는 ‘조직’에 충성하는 사람보다는 ‘라인’에 충성하는 사람이 많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대원 삼성중공업 고문은 얼마 전 펴낸 ‘삼성 기업문화 탐구’라는 책에서 “지금 삼성은 갈수록 냉정하게 변질되는 관리식 기업문화로 문제에 봉착했다”며 조직문화에 대한 개선을 강조하기도 했다.

    삼성의 조직문화를 둘러싼 논란은 전통적으로 중앙집권적인 기업문화를 갖고 있는 데다 외환위기 이후 삼성차 매각 등의 영향으로 ‘성장과 확장’보다는 ‘관리와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어지면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많다.

    삼성물산의 한 임원은 “원래 삼성은 성장을 중시하는 ‘기획통’과 안정을 유지하려는 ‘재무통’ 간의 건전한 경쟁 속에서 발전했는데, 삼성차 매각 등 외환위기 이후 성공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재무통의 입지가 확고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그러다 보니 리스크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다소 부족한 수동적, 보수적인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과장급 이하 젊은 삼성맨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높다. 삼성그룹 내부통신망 ‘싱글’엔 지난 11월5일 김 변호사의 폭로 기자회견 후 이틀 동안 200건이 넘는 댓글이 쏟아졌다. 처음에는 “기업이 살아야 국가경제가 산다” “삼성인들 모두 단결해서 위기를 극복하자” 등 삼성을 옹호하는 내용이 주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내용이 올라왔다. “무조건 충성하자는 것은 답이 아니라고 본다” “(비자금 폭로와 관련해) 최고 경영진과 최하위 말단사원의 생각이 같은 것은 아니다” 등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싱글’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과 달리 댓글을 올리면 소속과 이름이 그대로 드러나는 내부통신망이다. 따라서 그런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모험’이다. 일사불란한 조직문화로 정평이 난 관리의 삼성에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일부에선 이런 현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삼성SDI의 모 과장은 “실명으로, 그것도 부정적인 의견을 마음대로 올릴 수 있는 분위기로 바뀐 것 아닌가. 과거 같으면 불이익을 당하고 해당 댓글도 바로 삭제됐을 것이다. 이는 매우 긍적적인 변화 조짐”이라고 말했다.

    오너 경영이냐, 전문 경영이냐

    ‘삼성맨’들이 보는 삼성의 오늘

    에버랜드 CB 문제 등 경영승계 비판에 직면한 이재용 전무는 확실한 리더십을 입증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삼성의 관리문화는 오너 경영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지금까지 이건희 회장이 없는 삼성은 생각할 수 없었다. 이 회장의 경영철학이 곧 삼성의 경영철학이었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삼성의 관리문화는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 때부터 비롯돼 이건희 회장 때에 완성됐다. 계열사가 수십개가 넘고 오너가 일일이 계열사 경영을 챙기기 어려운 상황에서 CEO를 견제할 또 다른 힘이 필요했다”라고 설명했다.

    “현재 우리 실정에서 오너가 회장이 아니면 회사가 흔들린다. 은행과 종업원이 불신한다. 이게 현실이다. 삼성은 내가 없어도 흘러간다. 그럼 뭐가 다르냐. 5년 후에는 흐물흐물해지고, 10년 뒤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건희 회장이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할 당시 가족(오너)경영 체제의 장점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말이다. 그로부터 10년이 훨씬 넘었지만 당시의 ‘현재 우리 실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인간은 65세 전후면 노망기다. 절대 실무를 맡으면 안 된다. 60이 넘으면 손을 떼야 한다. 65세 넘으면 젊은 경영자에게 넘기고 명예회장을 해야지 어느 그룹처럼 70~80세에 실무를 맡으면 안 된다.”

    이 회장이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회의 때 한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건희 회장은 2007년 65세를 맞았다. 자신의 말대로라면 현역에서 은퇴해야 할 나이인 셈이다. 이에 대해 그룹의 고위임원은 “이 회장이 주장한 65세 노망론은 전문경영인을 의미하는 것이고, 오너는 평생 기업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면서 함께 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해명했다.

    이 임원의 말대로 삼성이 국내총생산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세계 12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이 중요한 버팀목이 되어 준 게 사실이다. 일례로 삼성전자의 2006년 매출은 85조원, 영업이익은 9조원을 넘어섰다. 지난 10년간 매출액은 4배, 영업이익은 6배나 늘어나는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삼성 계열사의 고위 임원은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에 대해 “외부에서 회장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모르지만 그룹 내부에선 회장이야말로 경영에 대한 ‘심미안(審美眼)’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라고 강조했다. 이 회장의 천부적인 경영감각이 반도체 사업을 성공시켰고, 오늘의 삼성을 만들어냈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삼성 내에서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을 부정하는 목소리를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오너 경영의 한계도 존재한다. 바로 ‘가족경영’의 정당성 여부다. 이미 ‘이재용(삼성전자 전무,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의 삼성’을 그리는 데 어색하지 않은 시점인데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3대에 걸친 가족경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

    삼성의 모 관계자는 “솔직히 JY(이재용 전무)에게 그룹 지배권을 승계하려는 일련의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무리수를 뒀던 게 사실이다. 그에 따라 여론이라든지, 여러 영향력 있는 기관들을 우호세력으로 확보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진짜 상속은 시작도 안 됐는데…”

    ‘삼성맨’들이 보는 삼성의 오늘

    삼성증권에 대해 전격 압수수색을 실시하는 검찰.

    삼성은 가족경영을 유지하기 위해 편법 논란을 무릅쓰면서까지 이재용 전무를 위해 비상장사의 전환사채 발행을 단행했다. 소위 삼성의 ‘원죄(原罪)’가 시작된 것이다. 삼성은 JY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1996년 12월 이재용 전무에게 에버랜드 CB(전환사채)를 넘겼다. 이어 삼성은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 등 후속작업을 진행해 이 전무에 대한 승계 작업을 마무리짓는다.

    이 전무는 이를 통해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순환 고리를 확보해 그룹 지배권을 넘겨받게 된다. 이 같은 경영권 승계는 시민단체가 에버랜드 CB를 헐값에 넘겼다며 삼성을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시민단체에선 “교보생명의 상속세 납부액이 1338억원이고 대한전선의 상속세 납부액이 1355억원인데 교보생명 매출액의 11배, 대한전선 매출액의 97배나 되는 삼성의 이재용씨가 납부한 증여세 총액은 고작 16억원”이라며 도덕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삼성 내부에선 억울하다는 목소리가 지배적이다. 그룹의 고위임원은 “JY의 상속은 사실 아직 시작도 안 됐다.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 관장이 세상을 뜨면 아마도 국내 최대 규모의 상속과 상속세가 발생할 것이다. 이미 상속이 완료된 다른 기업들과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항변했다. 계열사의 모 임원은 시민단체의 공격에 대해 “다른 기업보다 잘나가서 욕을 먹는 것 같다. 삼성이 여타 기업과 비슷했으면 이 정도로 공격을 받았겠느냐”고 반문했다.

    계열사의 또 다른 임원은 “삼성이 스웨덴의 대표적인 가족기업인 발렌베리그룹처럼 국민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에버랜드 CB 건으로) 일부 국민에게 비판과 질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압축성장 과정에서 빚어진 일부 잘못된 행태로 인해 촉발된 반(反)기업 정서의 영향이 크다. 결국 국내 최정상인 삼성이 그 일차적인 표적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원죄’ 때문에 매년 4000억원이 넘는 돈을 사회공헌사업에 쏟아 붓고, 국내총생산(GDP) 중 20% 이상을 차지하는 막대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시민단체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는 처지에 몰린 셈이다.

    삼성 계열사의 모 부장은 “매년 대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으로 이건희 회장을 손꼽고, 가장 들어가고 싶은 기업으로 삼성을 꼽는데도 불구, 가족 경영과 관련해 일부 정치권과 시민단체에서 ‘편법 세습경영’이라든지 ‘삼성공화국’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때마다 기운이 쑥 빠진다”고 토로했다.

    ‘가족경영’의 명암

    고 이병철 창업주부터 이건희 회장에 이르는 2세대까지의 삼성은 가족경영의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 받았다. 지난 2003년 11월 ‘뉴스위크’는 삼성의 오너 경영체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콧대 높은 일본도 삼성의 가족경영에 대해 칭찬일색이었다. 2002년 9월자 ‘주간 다이아몬드’를 보면 “이건희 회장의 선견지명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주위에서 삼성이 호조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삼성은 장래를 내다보며 개혁을 한다는 점이다”라며 이 회장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했다. 호리에 다카후미 라이브도어 사장도 2005년 3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 대기업들이 성장을 멈춘 것은 한국의 삼성 같은 강력한 지도자(오너)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럽에는 가족경영을 통해 기업을 성장·발전시킨 사례가 부지기수다. 스위스 기업 10개 중 9개는 가족에 의해 운영되고 있고, 가족기업의 60%는 가족이 경영에 대해 완전한 통제력을 행사한다. 이들 기업의 실적이 상당히 좋다는 평가보고서도 나오고 있다.

    5대에 걸쳐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부자가문인 스웨덴의 발렌베리가(家)는 에릭슨, 사브, 일렉트로룩스 같은 글로벌 기업을 키워왔다. 삼성도 이를 벤치마킹하려는 물밑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발렌베리 가문이 150여 년에 걸쳐 흔들림 없이 가족 경영을 펼칠 수 있었던 데에는 전대에 걸쳐 축적된 경영 노하우를 후대에 물려주고, 그 전통과 노하우를 한 단계 발전시켜온 탁월한 오너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너의 확고한 주인의식, 가족 전통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리더십, 신속한 의사결정에 따른 과감한 투자 등으로 대표되는 가족경영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해온 곳이 삼성이다.

    ‘삼성맨’들이 보는 삼성의 오늘

    이건희 삼성 회장.

    삼성맨들도 가족경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전문경영인은 아무리 혼신의 힘을 다해도 오너만큼 하기 어렵다. 삼성은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이 거대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대안이 오너 경영이다. 전문경영인은 이건희 회장의 바통을 받아 삼성을 끌고 갈 구심력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삼성맨들은 ‘포스트 이건희 체제’로서 이재용의 자질 검증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대해 부담을 갖고 있다. 한 중견 간부의 이야기다.

    “JY가 국내 경제의 20%를 쥐락펴락하는 거대그룹을 단순히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이라는 이유로 맡아도 되느냐는 지적에 대해 이렇다 하게 내세울 반박논리가 없는 게 사실이다. 그저 ‘그간 경영수업을 꾸준히 받아왔으니 한번 믿어달라’는 감성 어린 호소밖에 방법이 없다는 게 고민이다.”

    삼성 일각에선 이재용 후계자론에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우선 ‘경쟁과 검증 없이 무혈입성한 후계자’라는 꼬리표가 여전히 그를 괴롭힌다. 계열사의 모 간부는 “이건희 회장의 경우 두 형과 치열한 경쟁을 거쳐 그룹을 물려받은 데 이어 1993년 이른바 ‘신경영’ 선언 뒤 삼성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며 강력한 카리스마를 구축했다. 하지만 이 전무는 미지수”라고 지적했다.

    “이 전무는 1991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16년 동안 뚜렷한 성과나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오히려 2000년 전후로 시작된 e삼성 등 인터넷 사업이 1년이 채 안 돼 인터넷 거품이 꺼지는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졌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투자 실패로 삼성그룹 계열사에 부담을 안긴 뼈아픈 전력이 있다. 그룹 내 위상에도 불구하고 소니와의 합작 LCD 제조 법인인 S-LCD에만 등기이사로 등록되어 있는 등 ‘온실 속 화분’이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삼성그룹의 고위임원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e삼성 산하에 아직도 아이마켓, 오픈타이드 등 비상장 우량 자회사가 많다. 또한 게임온, 크레듀 등은 기업공개를 통해 대박신화를 일궈냈다”고 반박했다. 그에 따르면 e삼성재팬의 온라인게임사업본부로 출발한 일본 온라인게임업체 게임온은 2006년 10월 일본 마더스 증시에 상장, 지금까지 수천억원대의 상장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그는 또한 “아이마켓차이나와 오픈타이드차이나는 중국 증시에 상장을 추진하고 있어 상장시 큰 수익이 예상된다. 크레듀의 경우에도 ‘e러닝’이 낯선 사업이라 초기에는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지만 체계가 잡히면서 급성장, 7년 만에 200배 수익을 터뜨리는 대박신화를 이뤘다”고 강조했다.

    2007년 1월 고객총괄책임자(CCO)에 임명된 이재용 전무의 행보가 주목을 받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눈에 띄는 업적을 쌓아 ‘투자 실패’라는 과거를 소멸시켜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확보된 지분은 지킬 수 있어도 카리스마는 결코 물려받거나 구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JY가 향후 그룹 총수 자리에 오를 것에 대해 의심하는 임직원은 없다. 다만 어떤 절차와 분위기 속에서 그룹을 맡게 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남아 있을 뿐”이라는 삼성 고위 관계자의 말이 이 전무의 현 위치를 설명해준다.

    전략기획실은 ‘필요악’?

    이건희 회장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오너 경영을 펼칠 수 있었던 데에는 구조조정본부(현 전략기획실)의 힘이 컸다는 것이 삼성그룹 안팎의 일반적인 견해다. 실제로 삼성 내부에서조차 “삼성의 비결은 이건희 회장, 전략기획실(이학수), 계열사로 이어지는 3각편대에 있다”고 자평할 정도다. 특히 그룹 내 2인자이자 이건희 회장에게 직언할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인사로 손꼽히는 이학수 전략기획실장(부회장)의 존재는 삼성의 성장과 맥을 같이한다고 봐도 과함이 없다.

    전략기획실의 원조는 회장비서실이다. 1959년 이병철 창업주의 지시로 만들어진 회장비서실은 초기 20여 명으로 구성된 삼성물산 비서과(課)에 불과했다. 비서실이 막강 파워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삼성 조직의 규모가 갑작스럽게 커진 1970년대와 궤를 같이한다.

    ‘삼성맨’들이 보는 삼성의 오늘

    삼성맨들은 이번 사태에 실망하면서도 ‘글로벌 삼성’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건희 회장이 총수에 오른 1987년 이후 비서실은 한동안 축소의 길을 걷지만,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비서실은 자연스럽게 구조조정본부로 전환된다. 이학수 당시 구조조정본부장은 대규모 ‘살생부’를 만들어 구조조정을 추진, 삼성이 위기를 벗어나는 토대를 구축하게 된다. 당시 이 회장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자동차 사업도 매각했다. 이를 계기로 구조본의 위상은 한껏 높아졌다.

    지금도 구조본 후신인 전략기획실의 파워는 막강하다. “전략기획실 임원이 계열사 사장보다 더 세다”는 말도 나온다. 실적악화로 전략기획실로부터 경영진단을 받은 모 계열사 임원은 “전략기획실에 불려가는 날은 괜히 주눅이 든다”며 “비단 우리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계열사 임원들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고 전했다.

    삼성 내부에서조차 전략기획실의 위상 강화가 삼성 내부의 관료화를 부추기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지만, 향후에도 명칭이야 어떻게 변하든 전략기획실의 기능을 담당할 부서가 사라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특히 삼성이 이재용 전무를 경영 전면에 내세우는 오너 경영을 유지하는 한 전략기획실의 기능은 필요하다.

    계열사 임직원들은 전략기획실의 호출을 두려워하지만 전략기획실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을 훨씬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전략기획실이 삼성과 오너를 보위하는 최후의 방어선이자 최전선을 지키는 병사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 계열사 임원은 “전략기획실에 소속된 것 자체가 승진 코스인 데다 연봉 등 다양한 혜택을 받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총수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다 보니 한번 실수가 곧바로 퇴출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전략기획실 출신이라고 무조건 승승장구하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피를 말리는 스트레스가 있다는 것이다.

    삼성의 오너 경영에서 전략기획실의 기능은 매주 중요하다. 계열사 모 임원은 “전략기획실 재무팀은 그룹 전체의 재무 활동에도 관여하지만 이 회장을 비롯한 삼성가(家)의 경영권 유지를 위한 지분관리에 대해서도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재용 전무가 향후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지분 확보 차원에서 보유한 비상장사의 지분 상당수를 이학수 실장이 함께 보유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는 것.

    물론 전략기획실의 기능이 단지 총수의 오너십 유지에 국한된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게 삼성 내부의 중론이다. 이건희 회장 수행, 삼성 관련 소송, 계열사 감사, 각종 재무 계획, 계열사 임원인사, 삼성브랜드 가치 높이기, 경영전략과 정보 등 실·팀별로 기능이 분화돼 있다. 그룹의 모 인사는 “전 계열사 사장단에는 전략기획실 출신 인사가 20여 명이나 포진해 있을 정도로 그룹 차원에서 볼 때 인재사관학교의 성격도 분명히 갖고 있다”며 “각 계열사의 사업이나 이해관계를 조정·관리하는 등의 전체 밑그림을 그려나가는 데 전략기획실의 기능은 반드시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외부 수혈 침체 우려

    내부 인사의 폭로로 촉발된 삼성 사태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사기가 떨어진 삼성맨들 자신이다. 비자금 조성의 진실 여부를 떠나 모든 삼성맨이 마치 범법자인 양 죄책감에 위축되고 있다는 것이다.

    계열사의 모 부장은 “삼성은 국내 모든 기업 조직 가운데 가장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일하는 마당에 이런 일이 터져 실망스럽기 그지없다”고 푸념했다. 그룹의 한 간부도 “삼성이 정말 대한민국 악의 축인지 되묻고 싶다”며 다소 격앙된 어조로 시민단체와 정치권의 지적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삼성이 뭇매를 맞아서 쓰러지면 과연 누가 좋아하겠느냐”고 덧붙였다.

    일부에선 삼성이 강점으로 내건 ‘하이브리드’식 인재경영의 위축 가능성도 우려하고 있다. 그룹의 고위 임원은 “공채를 통한 순혈주의를 지향했던 이병철 선대 회장과 달리 이건희 회장은 진대제, 황창규 등 해외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지속적으로 영입해 삼성을 한 차원 높은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김 변호사의 폭로로 앞으로 외부 영입을 경계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과거와 달리 시장의 성장이 분초를 다툴 정도로 빨라지면서 우수한 외부 인재 영입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정이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외부 인재에게 신뢰를 보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외부에서 영입된 인재 또한 삼성의 문화에 적응하기가 전보다는 힘들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번 사태로 적지 않은 삼성맨이 실망감을 표시했지만 상당수는 기죽을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계열사의 모 과장은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최선을 다해 뛰고 있으며, 거대 글로벌 기업들과 힘겨운 악전고투를 거듭하고 있다. 우리가 세계를 전장으로 삼아 뛰어다니는 이유는 국민의 성원을 받고 있음을 철썩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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