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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32

평양 중국인 배척 폭동 사건

사상 최악의 오보가 불러온 사상 최악의 참사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평양 중국인 배척 폭동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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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악의 오보

평양 중국인 배척 폭동은 사흘 전인 1931년 7월2일 한밤중에 간행된 ‘조선일보’의 호외에서 촉발됐다.

싼싱바오(三姓堡) 동포 수난 갈수록 심해져. 200여 동포 또다시 피습. 완공된 수로를 전부 파괴. 중국농민 우리 동포를 대거 폭행. (창춘 김이삼 특파원 급전)


만주 완바오산(萬寶山) 부근 싼싱바오에서 조선 농민 200여 명이 석 달 동안 피땀 흘려 닦은 수로를 중국 관민 400여 명이 모조리 파괴, 매립해버렸다는 어처구니없는 소식이었다. 호외는 이튿날 밤에도 이어졌다.

중국 관민 800여 명과 200여 명 동포 충돌 부상. 대치한 중·일 관헌 한 시간 여 교전. 중국 기마대 600여 명 출동. 급박한 동포 안위. (창춘 김이삼 특파원 급전)




평양 중국인 배척 폭동 사건

완바오산 사건의 발단이 된 싼싱바오의 수로.

수로 파괴 이후 중국 관민 800여 명과 조선농민 200여 명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다수의 조선농민이 ‘살상’되었고, 150m 거리를 두고 대치하던 일본 경찰과 중국 경찰 사이에 교전이 발생했다는 소식이었다. 호외에 적힌 대로라면, 야박한 중국인들은 먹고살 길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이주한 조선 농민의 생활 터전을 짓밟는 것으로도 모자라 목숨까지 빼앗은 셈이었다. 연이틀 한밤중에 간행된 호외는 조선인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중국인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다.

흥분한 사람들은 전보의 발신지가 ‘싼싱바오’가 아니라 ‘창춘’인 것을 눈여겨 살필 겨를이 없었다. ‘조선일보’ 창춘 특파원 김이삼은 일본영사관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사실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서둘러 타전했고, 서울의 본사 편집국은 전보만 믿고 부랴부랴 호외를 간행했다. 너무 서둘러 간행한 나머지 ‘부상’이 ‘살상’으로 오기된 것조차 걸러내지 못했다.

역사상 최악의 오보는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튀었다. 첫 번째 호외가 간행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은 7월3일 새벽 2시, 인천 율목리 중국인이 경영하는 호떡집 앞에 격분한 조선인들이 몰려들어 돌을 던졌다.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조리 깨졌고, 잠결에 놀라서 뛰쳐나온 중국인은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구타당했다. 성외리, 중정, 용강정 등 7곳에서 중국인 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뒤늦게 출동한 경찰은 주동자 7명을 체포하는 데 만족했다.

날이 밝자 인천경찰서 도가와 서장은 인천 전역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비번인 순사까지 소집하는 한편 경기도 경찰부에서 40명의 순사를 지원받아 시내 곳곳에 비치했다. 중국인이 경영하는 상점의 영업을 중지시키고, 시내에 흩어져 사는 중국인들을 중국영사관으로 대피시켰다. 인천 시내는 전시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날이 저물자 중국인 거류지로 또다시 성난 군중이 몰려들었다. 수천 군중은 철통 같은 경찰의 경계선을 돌파하고 중국인 가옥과 요릿집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인천에서 시작된 중국인 배척 폭동은 이튿날부터 전국적으로 번졌다. 7월3일 밤 11시, 서울 봉래정 중국음식점 동문루에 10여 명의 장정이 몰려가 돌을 던졌으나 이웃집인 동북여관 유리창 넉 장을 깨뜨리는 데 그쳤고, 같은 시간 30여 명의 장정들이 장기환의 호떡집에 돌을 던져 유리창 수십장을 깨뜨렸다. 이후 태평통 유효서의 호떡집, 북미창정 중국집 고빈루, 남미창정 서수승의 호떡집, 봉래정 중국집 중화루, 무교정 중국음식점 다옥점 등에 차례로 돌이 날아들었다. 7월3일 밤부터 4일 오전까지 서울에서만 55건의 폭행과 기물파손 사건이 발생했고, 47명이 검거됐다. 7월4일 밤 평양에서는 6건의 중국인 폭행 사건이 발생했고, 중국인 5명이 중상을 입었다.

‘조선일보’ 호외 이후 인천, 서울, 평양, 진남포, 부산, 전주, 대구, 개성, 사리원, 원산, 함흥, 흥남, 청주, 공주, 이리, 군산, 안주, 재령, 신의주, 의주, 선천, 수원, 청주, 춘천, 마산, 선천, 운산, 해주, 안변 등 전국적으로 400여 회의 중국인 배척 폭동이 일어났다. 심지어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에 있는 중국인들을 폭행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일주일 남짓 지속된 중국인 배척 폭동으로 전국적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 추산 142명의 중국인이 사망했고, 546명이 부상당했으며, 91명이 실종됐다. 조선에 있던 7만여 명의 중국인 중 1만7000여 명이 영사관에 피신했고, 재산 피해도 400만원(현재 가치 4000억원)에 달했다. 인명피해의 대부분은 7월5일 밤 무정부 상태에 놓인 평양에서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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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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