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산 안창호(앞)를 중심으로 오른쪽부터 유상규, 전재순, 김복형
테허가 세상을 떠난 후 부인은 30세 청상과부의 몸으로 삯바느질과 하숙을 치며 어렵게 두 아들을 키웠다. 옹섭씨는 네 살 때 도산과 흥사단원이 함께 찍은 사진 맨 앞줄에 서 있었고, 어머니와 함께 도산의 병 문안을 간 적이 있다. 아마 현존 인물 중 도산을 직접 눈으로 본 유일한 이가 그일 것이다.
옹섭씨가 ‘태허(太虛)’가 곧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기까진 많은 우연이 함께 했다. 그는 고인의 유품을 뒤지던 중 작은 쪽지에서 ‘태허’라는 단어를 발견했지만 당시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서야 그 쪽지가 집으로 찾아온 심훈(沈熏·1901~1936, ‘상록수’의 작가)이 부친 앞으로 남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여러 문헌 속 ‘태허’라는 필명의 글이 모두 부친 유상규의 글이라는 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그는 독립기념관의 도움을 얻어 찾은 부친의 원고와 보관 중인 미발표 원고 일부를 묶어 전기 ‘애국지사 태허 유상규(흥사단)’를 최근 출간했다.
“정치인만이 위인은 아니다”
태허가 남긴 글 중에 눈에 띄는 글이 있다. 1925년 5월 ‘동광’ 창간호부터 1926년 12월 8호에 걸쳐 연재한 ‘방랑의 일편, 특이한 결심을 가지고 상해를 떠나 나가사키, 오사카로 노동생활을 체험하던 작자의 회상기’라는 글이다. 이 연재물은 고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을 하며 겪은 일을 적은 수기 형식의 글로, 당시 일본에 간 조선 노동자들의 삶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1931년 7월(23호)에 실린 ‘피로 그린 수기 젊은 의사와 삼투사’, 1931년 12월과 1932년 1월(29, 30호)에 쓴 ‘의사평판기’는 당시 의학계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필자는 그의 글을 찾는 과정에서 연보비에 새로 새겨 넣을 만한 문구를 찾아보았다. 정치가나 문필가가 아니라 행동의 지사였던 유상규의 글에는 치밀함은 있어도 정치성은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우리 조선 사람은 위인 혹은 세계적 위인이라면 곧 정치가를 연상한다. 더군다나 근일의 신사조로 인해서 위인과 영웅의 의미를 혼동해서 민중시대에 모순되는 것으로 여겨 위인을 부정하려는 경향까지도 보인다. 이렇게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사상환경 속에서 과학적 위인, 그야말로 인류 영겁에 행복을 주는 위인이 자라나긴 고사하고, 싹트기도 바라기 힘들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의사평판기’, 1931. 12 ‘동광’ 29호)
‘의사평판기’의 서론 부분에 해당하는 이 글에서 필자는 정치가만이 위인이 아님을 설파한다.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최고의 실력을 연마해 그것이 자기실현에 그치지 않고 나라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자는 모두 위인이라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국내 흥사단 조직인 동우회는 ‘수양단체를 가장한 독립운동’ 혐의로 1937년 일제에 의해 검거됐는데, 이때 붙잡힌 도산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병환을 얻어 경성제대부속병원에 입원했다가 1938년 3월10일 60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도산의 시신은 망우리공원 유상규의 묘지 바로 오른쪽 위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