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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 별곡─한국의 碑銘문학 4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한국의 나무와 흙이 되다

덕망의 코스모폴리탄 아사카와 다쿠미

  • 김영식 수필가, 번역가 japanliter@naver.com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한국의 나무와 흙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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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한국의 나무와 흙이 되다

‘조선의 소반’에 들어간 삽화(왼쪽)와 ‘조선도자명고’에 들어간 삽화.

출간 당시 평자들은 이 책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경성대 교수로 후에 문부대신까지 지낸 아베 요시시게는 “단지 학자가 문헌을 나열하며 쓴 글이 아닌, 실제 소반을 직접 사용해보고 쓴 글로, 지식뿐 아니라 사랑과 지혜가 담긴 책”이라 했고, 교사이자 민예연구가인 홍순혁은 동아일보(1931. 10.19)에서 “외국인 가운데는 우리의 미술, 공예를 중국, 일본과의 사이를 연락하는 하나의 매개체로서 보는 피상적 연구도 있지만, 한걸음 나아가 이해와 동경을 가진 연구와 감상이 또한 적지 않아 그 독특한 가치를 찾고자 하는 이도 많다.… 이 책이 외인의 손으로 이만큼의 재료와 연구를 우리에게 제시한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이 책의 초판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맨 뒷면을 보면 도쿄 소재 공정회(工政會) 출판부 발행으로 ‘민예총서 제3편, 일본민예미술관편’으로 1929년 3월15일 발행, 저작자는 조선경성부 외 청량리 아사카와 다쿠미로 되어 있다. 맨 뒷면 오른쪽 페이지에 있는 글은 야나기의 발문 마지막 부분인데, 이 글에서도 아사카와에 대한 야나기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지금 밖에는 잔 눈발이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네. 여느 때보다 더 추운 교토의 저녁이라네. 군(君)이 있는 경성의 교외는 영도 이하 어느 정도까지 떨어졌을까. 그러나 지금쯤은 온돌방에서 조선의 소반을 둘러싸고 조선의 식기로 일가 단란한 식사를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이렇게 말하는 내 가족도 매 끼니 조선의 소반을 떠난 적이 없다네. 어떠한 운명이 군과 나를 평생 조선과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어준 듯하네. 가능한 한 우리 함께 조선의 일을 함세. 군의 ‘조선도기명휘’는 머지않아 완결되리라 생각하네. 나는 그 훌륭한 저작이 이 책처럼 하루라도 빨리 상재(上梓·출간)되기를 바라고 있네.”

야나기가 이처럼 하루빨리 상재되기를 바라마지 않던 ‘조선도기명휘’는 아사카와 타계 5개월 후인 1931년 9월에 ‘조선도자명고’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이 책은 아사카와가 오랫동안 조선 도자기의 명칭, 형태와 기원을 조사해 정리한 책이다. 아사카와는 이 책을 집필한 이유를 머리말에서 이렇게 밝혔다.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 민족의 생활을 알고 시대의 분위기를 읽으려면 우선 그릇 본래의 올바른 이름과 쓰임새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나아가 그릇을 사용하던 조선 민족의 생활상이나 마음에 대해서도 저절로 알게 되리라.”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이건 역사의 기록이 소중한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으니 ‘조선도자명고’가 후세의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우리에게는 사실 소반이나 도자기가 실생활에 사용되는 물건이었지, 예술품으로 대접받으리라는 생각은 별반 없었고 또 그럴 여유도 없었다. 비록 그들의 조국이 저지른 죄는 크지만 후세의 연구자들이 야나기와 아사카와 형제의 업적에 큰 도움을 받은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자기를 만든 나라, 그리고 고려청자로 중국을 뛰어넘은 독보적 미를 창조했던 우리의 지금은 어떠한가. 손님에게 유럽제 찻잔을 자랑스럽게 내놓으며 우리 도자기는(그것도 옛날 것만) 벽장 안에 모셔놓고 있지 않은가. 우리 도자기가 생활을 떠나 과시나 관상용 골동품으로 ‘전락’할 때 새로운 미는 창조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물건의 탄생은 당시대인의 생활에서 얼마나 친숙하게 사용되느냐에 달렸다. ‘조선의 소반’에서 아사카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친 조선이여, 남의 흉내를 내는 것보다 갖고 있는 소중한 것을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 자신에 가득 찰 날이 오리라. 이 말은 비단 공예의 길에 한한 것만은 아니다.”

국립산림과학원의 정원에는 1892년생 소나무(盤松)가 크게 가지를 뻗고 서 있다. 1922년 아사카와가 동료와 함께 인근 홍파초등학교에 있던 나무를 옮겨 심은 것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의 마음은 조선 민예 연구뿐 아니라 한일교류의 가지도 크게 뻗어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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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수필가, 번역가 japanli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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