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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 강영훈 전 총리

“육당은 친일파 아니고, 이기붕은 이해심 많고, 노태우는 원칙주의자”

  • 김일동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ildong@donga.com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 강영훈 전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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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사랑한 벽창우’ 강영훈 전 총리

1989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 김재순 국회의장과 환담하는 강영훈 총리(왼쪽).

▼ 이기붕 의장이 어떻게 강 장군을 찾아왔을까요?

“처음에는 창동에 있는 검찰총장 별장을 목적지로 서대문 관저(현재 4·19도서관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 가보니 전화가 없어 다시 포천 6군단까지 오게 됐다고 하더군요. 일단 군단장 숙소로 모셨는데 다음날 사태가 안정되니까 이 의장 가족은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4월25일 대학교수들이 거리로 나서면서 시위가 격화되니까 다시 나를 찾아왔어요. 그 무렵 시위대가 이기붕 의장 잡으러 미아리고개를 넘었다는 보고도 있어 임시로 부군단장 숙소로 모시고 나는 다음날 원주 군사령부 회의에 갔습니다. 그동안 경무대(현 청와대) 경관들이 이 의장 가족을 모시러 와서 경무대로 갔다가 일가족 자살로 끝난 것이지요.”

그가 후일 듣기로는, 이승만 대통령이 김정렬 국방장관에게 이 의장 가족의 미국 망명을 지시하고, 경무대 경찰에게는 6군단에 머물고 있는 이 의장 가족을 경무대 경내로 안내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이기붕 의장의 미국 망명을 놓고 김 국방장관이 미 대사와 가진 면담은 4월27일 밤 10시에 끝났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일찍 이 대통령이 이 의장에게 이 사실을 알릴 예정이었는데, 밤사이 이 의장 가족이 자결했다고 한다.

“내가 부모처럼 모시던 분인데, 어떻게 우리 부대에서 쫓아내겠어요? 돌아가신 분을 놓고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어서 그동안 가만있었던 거지요.”

“5·16은 일어나선 안 될 일”



4·19 후 그는 1군 사령관으로 나가는 이한림 장군의 후임으로 육사 교장이 된다. 그리고 거기서 5·16을 맞는다. 군인으로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가 ‘반혁명’으로 몰려 구속된 것은 5·16의 성패를 좌우하는 육사생도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막았기 때문이다. 이한림 1군사령관, 김형일 육군참모차장과 함께 그의 처남인 김웅수 6군단장도 이때 같이 구속된다.

▼ 군에 있을 때 박정희 장군과는 같이 근무한 적이 없었나요.

“내가 6군단장일 때 박 대통령이 1군사령부 참모장이었어요. 그런데 6군단은 작전상 미1군단의 지휘를 받았기 때문에 군사령부와 크게 부딪칠 일이 없었어요.”

▼ 5·16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장면 정권이 무능했기 때문이지요. 미군이 있는데, 미군의 지휘통제를 받는 한국군이 어떻게 쿠데타를 할 수 있느냐는 안이한 태도가 쿠데타의 가장 큰 성공 원인입니다. 군인들끼리도 그때 조금 위험한 거 아니냐 하는 얘기만 주고받다 만 거지요. 지도자는 어떤 위험에도 대처해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지금은 5·16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지요. 그러나 당시 정치상황으로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정도(正道)는 아니지만, 그 후 한국의 산업화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합니다.”

1962년 초 그는 이한림, 김형일, 최석, 황헌친 장군 등과 함께 유엔군사령부로 오라는 통고를 받는다. 군사혁명을 반대한 퇴역장군들에게 미 국방부에서 1년간 미국 대학 유학을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받은 것.

처음 1년은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에 있는 뉴멕시코주립대학에서 보낸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3년 남가주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공산주의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채용돼 본격적인 미국생활을 하게 된다. 부인이 이때 미국으로 오고, 그해 10월에 큰아들이 합류한다. 딸과 둘째아들은 1967년에 미국으로 건너와 온 가족이 모이기까지는 5년이 걸렸다.

“노태우는 자잘하지 않다”

박 대통령과의 불편했던 관계는 1969년에 풀린다. 닉슨 미 대통령과 회담하기 위해 그해 8월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박 대통령이 노신영 LA총영사를 통해 강 전 총리에게 “도울 일이 있으면 연락하시라”는 사신(私信)을 보낸다. 한국문제연구소 개설로 분주하던 그는 고심 끝에 박 대통령에게 재정지원을 요청하는데, 그는 이 때문에 나중에 여러 뒷말을 듣게 된다. 그의 한국문제연구소가 유신정부의 대미(對美) 로비활동을 했다는 비판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이 연구소가 펴낸 계간지 ‘저널 오브 코리안 어페어스(Journal of Korean Affairs)’를 보면 이런 주장은 당치 않다고 잘랐다.

1976년말 15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그는 귀국했다. 당초에는 국민대 학장직을 제의받고 왔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다음해 한국외국어대 대학원장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1년 후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17년 만에 복귀한 공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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