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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철녀들 2

실패한 뒤 더욱 빛나는 칼리 피오리나

‘주어진 환경’보다 중요한 건 ‘환경을 해석해내는 능력’

  • 허문명 동아일보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실패한 뒤 더욱 빛나는 칼리 피오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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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힘

칼리는 기업 CEO로서 큰 명성을 얻었지만 그것이 본래 꿈은 아니었다. 나중에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을 자퇴할 때까지 그녀는 ‘비즈니스 우먼’을 한 번도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 때 학부 전공은 뜻밖에 ‘철학’이다. 언뜻 보면 그녀의 인생과는 전혀 상관없는 과목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그녀의 삶에서 대학 때 심취한 철학은 여러 고비마다 큰 힘을 주었다. 그녀가 철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한 계기는 고교 시절 읽은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이었다고 한다. 칼리는 “선택의 힘과 중요성, 정체된 것보다는 이뤄가는 움직임, ‘자신을 어떻게 만드느냐’는 신에게 주는 선물이다”라는 뫼르소의 말에 밑줄을 치며 이렇게 속으로 외쳤다.

“누구든지 자신의 처지를 선택하지는 못할지언정 그 처지에 대한 반응은 선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부모나 가정환경은 고를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이상이 되겠다고 선택할 수는 있다는 이야기다. 선택을 그만두는 것이야말로 죽어가는 것이다.”

필자는 이 대목을 읽으며 깊이 공감했다. 살아갈수록 절실히 느끼는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주어진 환경’이 아니라 ‘환경을 해석해내는 능력’이다. 우리의 삶이란 제약과 한계 투성이다. 누구에게든 제약과 넘어야 할 장벽이 존재한다. 그 제약과 한계를 자기의 논리로 해석해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 인생의 묘미는 바로 그것에 있다고 본다.



칼리는 대학 시절 철학자 중에서도 특히 헤겔에 빠졌다. 헤겔이 주창한 정반합(正反合)의 철학, 다시 말해 어느 순간 맞섰던 것처럼 보이는 생각이나 사상이 나중에 화해한다는 상상력은 탁월하면서도 현실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나중에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마다 어떤 기준에 의지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헤겔의 정반합 철학을 정신적 모델로 사용한다”고 말했다. 가장 좋아하는 경영서의 저자가 누구냐는 질문에도 서슴지 않고 “헤겔” 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칼리는 대학에서 헤겔 공부뿐 아니라 윤리학도 공부하는데 이 역시 나중에 소비자 윤리를 생각하는 각종 의사결정과 행동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또 논리학 공부 덕분에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과정을 학습하면서 “좋은 답 못지않게 좋은 질문이 중요하다”는 것도 배운다.

실패한 뒤 더욱 빛나는 칼리 피오리나

2004년 10월 12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HP 한국개발센터 개장식. 칼리 피오리나가 새로 나온 자사 노트북을 진대제 정통부 장관에게 소개하고 있다.

언어마술사가 되기까지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그녀의 공부 방법이다. 흔히 책을 읽으면서 가장 좋은 훈련이 ‘요약하기’라고 한다. 칼리는 토마스 아퀴나스, 베이컨, 아벨라르 같은 중세 철학자들의 걸작을 매주 한 편씩 읽으며 내용을 축약하는 훈련을 통해 핵심을 이해하고 추려내는 비법을 배웠다고 한다. 중세사를 전공할 당시 그녀가 가장 좋아한 수업은 종교 서적을 일주일에 몇백 장씩 읽고 A4 용지 두 장으로 요약하는 것이었다. 칼리는 그것을 “생각이라는 몸에서 지방을 정제하고 의미의 본질에 도달하는 작업”에 비유하기도 했다.

아퀴나스 베이컨 아벨라르에 대한 지식은 가끔은 쓸모가 있겠지만 요약작업은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재산이 되었다. 피오리나가 후에 유명한 말들을 만들어내며 미국 기업의 대표적인 슬로건 주창자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도 그 덕분이었다고 한다.

칼리 피오리나 평전을 쓴 미국 기자 조지 앤더스는 “AT&T에서 그녀가 실제로 판매한 것은 전화교환기가 아니라 진보와 희망이었다. 그것은 말(言)의 힘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녀는 언어의 마술사와 같았다. 힘 있고 열정적이며 간단하고 쉬운 언어로 그녀는 고객이나 동료들, 상사들과 열정을 나누며 매년 자신과 그들의 삶을 향상시켰다”고 평한다.

실제로 칼리는 사내 연설문 담당자들이 작성한 원고를 살펴보고 ‘소심함’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엿보이면 곧바로 삭제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그녀를 키운 팔할은 ‘교육의 힘’이다. 네 살 때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해 스물두 살에 대학과정을 마칠 때까지 그녀는 온갖 종류의 지식을 접했다. 학창 시절을 회고할 때 그녀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수학과 과학에서는 분석기술을, 음악과 미술에서는 영혼의 양식을, 문학과 철학에서는 정신의 풍요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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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동아일보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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