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망우리 별곡─한국의 碑銘문학·마지막회

근대 서양의학의 선구자 지석영과 오긍선

“우리 가족을 실험해야 남에게 쓸 수 있지 않느냐”

  • 김영식 수필가, 번역가 japanliter@naver.com

근대 서양의학의 선구자 지석영과 오긍선

3/5
최초의 관립 의학교장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으로 갑오경장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 수구파 정권이 들어서자 개화파 지석영은 한직으로 물러나고 곧 다시 유배를 가게 됐다. 하지만 이때는 서재필의 독립협회가 나서서 나라의 처사를 성토하는 운동을 벌여 정부는 지석영을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협회는 1898년 7월15일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 정부에 서양의학을 교육하는 학교 설립을 요구했고 지석영도 11월에 상소를 올리자,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1899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 의학교가 설립됐고 지석영이 그 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됐다. 관립 의학교는 후에 대한의원, 경성의전을 거쳐 지금의 서울의대로 바뀌었다.

한편 지석영은 상소를 올려 “세종대왕 창제 국문이 표시하지 못하는 음이 없고 매우 배우기 쉬운 글임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그저 민간에 방임한 결과 형식이 정립되지 못했으니 국문을 새로 개정해 나라의 자주와 부강을 도모”할 것을 건의했다. 정부는 지석영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1905년 7월19일 ‘신정국문(新訂國文)’을 공표했다.

지석영은 이와 같이 많은 업적을 쌓았으나 1910년 나라가 일제에 강점되자 대한의원(원장은 일본인) 학감을 사임하고, 두문불출 독서와 저술로 세월을 보내다 1914년에 유유당(幼幼堂)이라는 소아과 의원을 열어 봉사를 시작했고 1915년에는 전선의생회(全鮮醫生會) 회장을 지냈으며 1935년 2월1일 생을 마쳤다.

그는 출세의 보증수표인 과거 급제자이며 능력 있는 의사였기에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풍족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손자 지홍창의 증언을 들어보자.



“할아버지는 평생 돈을 몰랐습니다. 생기는 돈이 있으면 몽땅 우두 시술소 등을 차려 대중 진료에 쏟아 넣었지요. 유산 한 푼 안 남겼고….”(한국의 명가, 김덕형, 일지사,1976).

묘 입구에 서 있는 지석영의 연보비에는 지석영의 삶이 잘 요약돼 있다.

‘송촌 지석영 선생. 의학자, 국어학자. 우두 보급의 선구자이며 의학교육자, 한글 전용을 제창한 사회, 경제, 문화 각 영역에 걸쳐 선각자.’

근대 서양의학의 선구자 지석영과 오긍선

오긍선 선생의 생전 모습.

그리고 오늘날의 의학자들에게도 귀감이 되는 한마디가 연보비문의 끝을 장식한다.

‘우리 가족에게 먼저 실험해 보아야 안심하고 쓸 수 있지 않겠느냐.’

조선 의학계의 대부

지석영 묘 입구를 지나 500여 m 올라가면 동락천 약수터가 나온다. 그 약수터에서 10m 쯤 더 가면 해관(海觀) 오긍선의 연보비가 서 있다.

‘해관 오긍선 선생. 교육자, 의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최초 한국인 교장을 역임하고 현대의학 도입과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일생동안 우리나라 의학발전과 사회사업에 헌신하시다.’

해관(海觀)은 인류를 생각하면서 세계를 바라본다는 의미라 한다.

뒷면에는 ‘1878 충남 공주군 사공면 운암리에서 출생. 1907 미국 루이빌 의과대학 졸업(의학박사 학위). 1917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한국 최초 피부과 창설. 1919 경성보육원 및 양로원을 설립하여 사회사업 시작. 1934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제2대 교장에 취임. 미국 센추럴 대학에서 명예이학박사. 루이빌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취득. 1949 사회사업 공로표창. 의학교육 공로상. 공익표창 등을 받음. 1963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추증’

근대 서양의학의 선구자 지석영과 오긍선

망우리공원 해주오씨 묘역에 있는 오긍선의 묘. 무덤의 모양이 특이하다.

근대의 선구자들이 그러했듯 해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타이틀이 많다. 그는 최초의 피부과 의사였고 세브란스 최초의 한인 교수와 교장이었으며 고아원(1919년 경성보육원, 현재 안양의 ‘좋은집’)과 양로원(1931년 설립, 1936년 이윤영에게 인계. 현재의 청운양로원) 설립 또한 조선인 최초였다. 동아일보 1962년 11월3일 기사는 소파상 수상자가 해관임을 알리면서 그가 ‘의학박사이면서 우리나라 제1호의 의사면허를 가진 분’이라고 소개했는데, ‘제1호’를 그대로 옮겨 적은 자료는 많아도 정확한 근거를 댄 자료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1914년 총독부로부터 받은 의사면허는 70번이었다. 아마 광복 후 미 군정청이나 대한민국 정부가 새로 면허를 발급하는 과정에서 제1호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실제로 서재필은 조선에 돌아와 독립협회 일에 분주하다 다시 미국으로 쫓기듯 돌아갔고, 김점동도 34세에 일찍 타계했으며 다른 의사들도 뚜렷한 흔적을 남긴 이가 없으니, 해관은 조선 의학계의 기반을 만들고 키운 대부로서 상징적인 제1호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3/5
김영식 수필가, 번역가 japanliter@naver.com
목록 닫기

근대 서양의학의 선구자 지석영과 오긍선

댓글 창 닫기

2021/05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