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브레터’
특기할 점은 남겨진 애인 와타나베가 죽은 애인의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자 후지이 이츠키가 잊고 있던 기억의 일부를 복원한다는 사실이다. 후지이 이츠키는 편지로 인해 잊고 있던 과거를 한 꺼풀씩 벗겨내 대면한다. 후지이 이츠키는 그녀가 완전히 잊고 있었던 학창 시절의 한때를 소환한다. 그리고 마침내 소환장처럼 마지막 장면의 도서 대출카드 한 장은 그녀의 봉인된 기억을 일깨우고 영화를 보는 관객의 추억과 환상까지 두드린다.
대출 카드는 남자 후지이 이츠키가 여자 후지이 이츠키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기억 속 원본으로 자리 잡고 있던 첫사랑의 그녀가 바로 여자 후지이 이츠키였던 셈이다. 영화 ‘러브레터’의 독특한 구성 중 하나는 바로 애인을 잃은 비련의 주인공 와타나베와 여자 후지이 이츠키가 1인 2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과거의 첫사랑과 현재의 애인이 1인 2역이다.
이러한 점은 남자 후지이 이츠키가 어린 시절의 그 여학생과 닮았다는 이유로 와타나베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통해 좀 더 의미심장해진다. 그러니까 이 영화 ‘러브레터’는 결국 하나의 이미지 주변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남자의 첫사랑을 교묘한 로맨스로 보여주는 작품인 셈이다. 여자 후지이 이츠키는 자신이 과거 남자 후지이 이츠키의 첫사랑이었음을 알게 되지만 현재의 그를 잊지 못하는 애인 와타나베는 원본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만다. ‘그녀와 닮았다는 이유로 나를 선택한 걸까요’라고 아파하는 것이다.
눈 덮인 산을 보며 “당신은 잘 지내십니까”라고 묻는 연인,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고 묻어두었던 첫사랑을 길어내는 ‘러브레터’의 정서는 온통 ‘뒤돌아보기’ 투성이다. 와타나베 역시 죽은 후지이 이츠키를 잊지 못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 못하고 언제나 그를 그리워할 뿐이다. ‘러브레터’는 만나고 불꽃 튀는 에로스가 아니라 이미 얼음 속에 곱게 빙장된 추억을 향유하는 영화다. 마음속 냉동고에 하나씩 숨겨두었을, 영원히 썩지 않을 과거, 추억을 건드리는 영화 말이다.
어쩌면 수많은 어른, 그리고 현대인들은 뒤돌아보지 않아 너무나 많은 것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 뒤돌아보는 순간 마주치는 것은 형편없는 내가 아닌 여리고 순수한 ‘나’의 모습이다. 세상은 그 순진한 모습을 요구하지 않는다. 뒤돌아보는 것이 힘겨운 까닭도 어쩌면 여기에 있을지 모를 일이다.
발효되기 전에 변질되는 감정
4월이면 캠퍼스는 온통 수런거린다. 서로 낯설었던 수강생들이 따뜻해지는 날씨와 더불어 조금씩 가까워진다. 누군가 발표를 하면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하고 장난기 어린 야유나 환성도 간혹 빚어진다. 그러다 보면 어떤 남학생 곁에는 항상 그 여학생이 앉게 되고 우리가 캠퍼스 커플이라고 말하는 연인들이 생겨난다.
스무 살, 초란처럼 순결하고 연약한 나이에 그들은 사랑을 시작한다. 그것은 아마 고등학교 시절 영어책 사이에 쪽지를 끼워 일상의 고단함을 나누던 동료애와는 다를 것이다. 고등학교 때, 재수할 때 사랑이라고 느꼈던 것들이 새로 시작된 캠퍼스의 사랑 앞에서는 이상하게 유치해진다. 무릇 스무 살의 사랑이란 이런 거만에서 시작된다.
곽재용 감독의 2003년 작 ‘클래식’은 이처럼 새로 시작하는 사랑의 감정을 잘 다스려놓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에는 두 가지의 사랑이 중첩된다. 하나는 어머니가 고등학교 시절 고향에서 경험했던 첫사랑,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딸이 현재 겪는 대학시절의 첫사랑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간 여행 속에서 증폭되는 것은 봄날의 벚꽃처럼 환하게 흐드러진 첫사랑의 열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