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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의 ‘지구 위의 작업실’ ④

“내가 아는 로맨틱은 죄다 새가슴 뿐. 호탕한 주색잡기는 낭만 아니다!”

  • 김갑수 시인, 문화평론가 dylan@unitel.co.kr

“내가 아는 로맨틱은 죄다 새가슴 뿐. 호탕한 주색잡기는 낭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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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로맨틱은 죄다 새가슴 뿐. 호탕한 주색잡기는 낭만 아니다!”

요즘 줄라이홀 주인장의 시간은 커피의 세월이다.

그런 건 은밀한 곳에 숨겨놓으라는 뜻이다. 그런 사람은 학교 교장이 되거나 훌륭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요약하자면 자의식 과잉을 쪽팔려 하라는 규범세상의 준열한 가르침이다. 자의식 과잉으로 타(他)를 불편하게 만든 죄를 반성하라는 꾸짖음이다. 안 그런가?

말의 무게를 위해 죽은 사람의 이름을 빌려와본다. 아놀드 베닛이라고 100년 전에 활동한 영국의 작가이자 문예이론가가 있다. 엄청 박식하고 내용 있는 사람이다. 그가 목메어 외친 것이 ‘열정적인 소수’의 가치다. 다수로부터 독립해 있는 존재의 가치다. 그가 말한 문학에 대한 열정적 소수를 인생으로 치환시켜 옮기자면, ‘열정적 소수는 생(문학)에서 예민하고 지속적인 즐거움을 발견한다. 그들은 영원히 새로운 탐구를 하고 영원히 자신을 훈련시킨다. 그들은 스스로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들은 내일이면 따분해질 것을 오늘 즐기지 않는다.’

아놀드 베닛은 열정적 소수와 대비되는, 요즘 말로 규범의 생을 사는 존재를 ‘길거리 군중’이라고 표현한다. 길거리 군중 앞에서 열정적 소수자는 애처롭다. 저 혼자 느끼고 발견한 생의 의미와 가치 혹은 즐거움을 다수에게 전달하고 싶어 안달하는 충동이 온갖 치기와 소동을 낳는데 길거리 다수는 힐난과 비아냥거림으로 응답하기 때문이다. ‘다수는 거기에서 즐거움을 얻어내지도 않고 거기에 일말의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 열정적 소수는 모른다는 것이다.

열정적 소수자

에니어그램 제4번형 인간으로 태어난 팔자라면 열정적 소수의 자부심으로, 이른바 저 잘난 맛으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베닛의 주장이 건방졌건 어쨌건 감정기복이 심하고 평범 대열에서 이탈하느라 사는 일이 고달픈 자의식 과잉 인간들에게도 살맛은 주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름하여 저 잘난 맛!



나의 작업실 줄라이홀의 요즘 ‘조오시’는 어떠한가. 여전한 커피의 세월이다. 로스팅의 매캐한 연기를 견딜 수 없고 혹시 오디오 기기에 해라도 끼칠까봐 지상으로 통하는 계단 난간에 묶어 20m짜리 알루미늄 연통을 설치했다. 주로 새벽 두세 시경에 커피를 볶는데 점검차 내다보면 동물의 왕국에서 본 아나콘다가 몸을 비비 틀며 검은 연기를 토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문득 친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쉬이익, 아나콘다 친구.

물론 이 조오시에 새로운 탐구가 없을 수 없다. 새 메뉴 두 가지를 추가하게 됐다. 첫째는 요즘 우리나라 커피동네에도 유행이 시작됐다는 더치커피를 만들게 된 것. 몇백 년 전 네덜란드가 세계를 제패했던 시기가 있다. 수많은 상선과 함대들이 대양을 누비는데 배 안에서 일일이 커피를 끓이는 게 여간한 수고가 아니었다. 커피를 꼭 뜨거운 물로 끓여야만 할까. 더치 뱃사람들이 꾀를 낸 게 이른바 ‘워터드립’, 상온의 물로 오래 우려내는 것이다. 워터드립을 위한 특별한 도구가 필요했다. 상부에 물을 담는 볼이 있고 중간 용기에 에스프레소용처럼 곱게 간 커피가 담기고 다시 아래에 우려진 커피를 받는 볼이 놓인다. 이 3층 더치 툴의 모양새가 꼭 학교 때 과학 실습실에서 보던 플라스크를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더치커피의 핵심은 시간이다. 망망대해에서 남아도는 것은 시간뿐이었을 테니까. 2초에 세 방울씩 떨어뜨리라는 레시피도 있고 4~8초마다 한 방울씩 떨구라는 권유도 있다. 어쨌든 대롱대롱 한 방울씩, 그러니까 커피 한 잔 내리는데 최소 4시간, 느리게 내리면 8시간이 걸린다는 얘기다. 빠르면 부드러운 맛이 나오고 느리면 느릴수록 짙고 강해진다. 그래서 뭔 일이 벌어지느냐고? 숙성된 와인을 만드는 것이다. 오래오래 숙성된 커피의 와인을. 더치커피의 별칭이 바로 ‘커피의 와인’이다. 간혹 저녁에 세팅해놓고 아침에 일어나면 바라만 보아도 ‘므흣한(네티즌 용어·흡족한)’ 자줏빛 커피의 와인이 넘실거리고 있다.

8시간 공들여 만든 커피 한 잔

모닝을 와인커피로 적신다고? 그런데 아니올시다이다. 빈속에 마셔보면 그 강하고 독한 향미에 속이 뒤집힌다. 더치 뱃사람들은 그걸 그냥 마셨다지만 줄라이홀은 하멜이 탔던 스페르베스호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스무디 설탕시럽을 분사하거나 값비싼 지상 최고의 설탕 알라뻬르쉐 앵무새 설탕을 한 알 넣고 얼음을 채워 아이스커피를 만든다. 기분에 따라 위스키를 넣기도 하고 레몬을 짜 넣기도 한다. 방문객들의 관심은 대개 특이하게 생긴 용기 때문에 일어난다. 내가 구입한 더치 툴은 일본 하리오 사가 만든 ‘포타’라는 슬림 타입이어서 오리지널처럼 괴상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눈길을 끌게 생겼다. 그 신기해하는 표정 앞에서 400여 년 전 네덜란드가 일본의 나가사키항을 개항시켰던 역사 강의를 일장 덧붙이며 한 잔 내놓으면 하나같이 감탄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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