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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회 2000만원 고료 논픽션 공모 최우수작

아이스크림

  • 윤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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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친정어머니

젊었을 적 엄마는 천하에 무서운 것이 없고 어려운 것 모르고 매사에 똑 부러진 성격이셨다. 동네에 무슨 일이 생기면 재판장처럼 쓰윽 나서서 해결하시던 어른이신 엄마가 사위인 남편이 어려워 눈치를 보신다는 것을 안 것은 이번에 다시 함께 살기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였다.

보통 장모가 사위에게 하는 ‘하게’ 소리도 못하고 반쯤 경어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60세가 넘은 사위의 집에서 살게 된 처지라 어려워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당신의 장대 같은 두 아들 집을 곁에 두고 90세 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온전하지 못한 딸과 부대끼며 사는 딸에게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주눅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미국에 오셔서 오빠 집으로 가시기 전의 당당했던 처신을 생각하면 그 몇 달 동안 엄마가 처했던 불행의 늪이 얼마나 깊었던지는 입을 꾹 닫아버린 엄마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만했다.

전에도 물론 딱 부러지게 ‘하게’를 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 오셔서는 출근하는 사위에게 딴 일을 하다가도 지팡이를 휘두르며 달려와 ‘잘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공손하게, 단지 허리만 굽히지 않고 조아리는 것이었다. 그것이 나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그렇게 된 엄마가 불쌍하고 서러워서 나는 엄마에게 모질게 퍼부었다.



“엄마, 딸자식도 자식이야. 나는 시어머니를 30년 모시고 살고 있어. 엄마는 딸집에서 당당히 살 권리와 자격이 있어. 왜 그렇게 눈치를 보고 그래?”

“누가 눈치를 본다고 그러냐?”

그렇게 자신없게 말하며 엄마는 시어머니 눈치를 살폈다.

엄마의 생년월일과 시어머니의 생년월일을 대조해보면 엄마가 꼭 3개월 빠르다. 엄마 얘기로는 그 옛날 태어났을 때 하도 골골해서 출생신고를 했다가 죽으면 번잡하니까 2년이나 기다리다 다행히 살아남아 그제서야 출생신고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실은 두 살이 더 위라고 하셨다.

누가 세상을 더 오래 살았는지는 따져볼 필요도 없었다. 어느 날 미리 연락도 없이 사돈청년이 차에 싣고 와서 거실에 짐짝처럼 부리고 간, 거동이 불편한 사부인이 평생 아들집을 떠나본 적 없는 시어머니의 기득권을 감히 넘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서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엄마도 거동이 불편하지만 그래도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서 당신의 몸을 추스를 수는 있었다. 그래서 거실에 앉아 있는 엄마를 처음 봤을 때의 놀라고 당혹스러웠던 기억은 그대로 남았다 하더라도 그냥 그렇게 함께 살아도 무방할 것이라는 계산이 체념과 같이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89세의 동갑내기 사돈인 시어머니와 엄마, 그리고 스물아홉 살이지만 정신연령은 서너 살밖에는 안 되는 딸. 유노.

엄마의 자존심

엄마는 오빠와 나, 그리고 남동생 이렇게 삼남매를 혼자 키우셨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아버지는 세상을 일찍 떠나셨다. 엄마는 눈물과 땀을 흘리면서 아마 이를 악물고 사셨을 것이다.

호강은 못했지만 홀어머니 밑에서 우리 삼남매는 학교 납부금 걱정 같은 것은 모른 채 모두 대학을 나와 결혼한 후 나를 선두로 하나씩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엄마는 자녀들을 모두 미국으로 떠나보낸 채 혼자 사셨다. 그리고 더 이상 혼자 몸을 움직여 장사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당신이 판단을 내리신 여든 살 되던 해 50년간 살던 집을 팔고 그 돈을 사립 양로원에 맡기고 몸을 그곳에 의탁하셨다.

“나는 절대로 너희들 신세는 안 지고 산다. 이제 이곳에서 살다가 죽으면 된다.”

엄마는 남자로 태어났으면 장군이 되어 싸움터에서 누구보다도 앞서서 적진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졸병을 앞세우고 뒤에서 우물거리는 장군이 아닐 것이다.

사실 엄마의 계획은 큰 차질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냥 경기도 수원 근교의 양로원에서 멀리 가 있는 자식들 그리워하면서 명이 다할 때까지 사셨다면 서로가 좋았을지도 몰랐다.

엄마는 그때까지 근력이 아주 좋았던지 양로원에서 제공되는 식사만 받아먹으며 같은 노인들끼리 하루하루 축내며 지내기에는 아직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멀든 가깝든 연락이 닿는 일가들을 버스를 타고 찾아다니며 환영을 받지 못하는 대신 밥도 사주고 몇푼 용돈도 아이들에게 쥐어주며 외로움을 달래며 지냈다.

그런데 만나는 친척마다 아들딸이 미국에 가서 잘살고 있는데 왜 여기서 이렇게 외롭게 지내느냐고, 미국에 가시라고 위해주는 듯이 한마디씩 하더니 점점 반강제적으로 아들에게 가라고 떠밀다시피 하기 시작했다. 잘못하다가는 자식들 없는 땅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들이 장례라도 치르게 될까 부담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엄마는 아무리 자식들이 다 와서 살고 있어도 미국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으셨다. 엄마에게 미국은 살 곳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탓이기도 했다.

15년쯤 전이었다. 엄마가 일흔 되던 해 내가 엄마를 초청해서 우리 집에 오셨다. 그때 꼭 한 달 머물고는 미국은 살 곳이 못된다고 선언하고는 들고 온 옷보따리를 단단히 싸놓고는 당장 보내달라고 하셨다. 하긴 엄마가 오시기 전에는 그런대로 계획을 좀 세웠었다. 그런데 유노의 발가락에 염증이 생긴 일과 시어머니의 발병으로 (의사는 신경성 위염이라고 했다) 단 하루도 자유롭게 집 밖에 나갈 수 없었다.

원래는 나도 아직 못 가본 나이애가라 폭포도 그 참에 가보고, 멀리서만 본 자유의 여신상에도 올라가보려고 계획을 했는데 결국은 동네 그로서리와 한국 식품점에 두 번 간 것이 엄마의 한 달 미국 방문 일정의 전부였다. 아, 그리고 내가 나가는 교회에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구경 삼아 주일마다 따라 나서기도 했으니까 미국에 와서 미국사람보다는 한국사람 얼굴만 보았다고 해도 되었다.

“미국 구경 잘 했으니 이젠 가야겠다.”

엄마는 일부러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빈정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엄마 성격에 내가 살고 있는 꼴을 더 이상 봐줄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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