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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강유정의 시네마 테라피 ①

아버지, 아버지, 불쌍한 우리 아버지

  • 강유정│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아버지, 아버지, 불쌍한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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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아버지, 불쌍한 우리 아버지

‘베사메 무초’

여기까지만 보면 아버지 강인구는 정말이지 불쌍한 ‘우리 아빠’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 오늘 밤 뉴스에 비리나 협잡,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거나 경찰에 체포된 범죄자들은 대부분 다 누군가의 아버지다. 그들은 말한다. 가족을 위해 그런 방식으로라도 돈을 벌어야 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다르게 말해보자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순간 아버지인 그 남자가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하는 게 아닐까.

무책임한 아버지의 뒤늦은 후회

우리 시대 아버지가 살아가는 생활전선이란 조폭 아버지의 싸움판과 다를 바 없다. 칼 대신 펜을 들고 각목 대신 운전대를 잡았을 뿐, 40대 아버지의 일상은 강인구의 전쟁터보다 나을 것이 없다. 자신만을 바라보고 카드 명세서에 서명하는 아내를 위해, 아이의 학원비를 벌기 위해 전쟁 같은 삶의 현장에서 아버지는 조금씩 소루한 존재로 사라져간다. ‘우아한 세계’는 전쟁 같은 삶에서 돈을 벌어 가족을 건사하는 지리멸렬한 세상에 대한 풍자극처럼 보인다.

범죄자 강인구가 가족을 내세워 폭력을 정당화하듯 수많은 아버지가 가족을 명분 삼아 불의를 자행한다. 가족의 윤리보다 가족의 생존을 중요한 가치로 선택할 때 아버지는 현금지급기로 전락하고 만다. 현금지급기는 가족사진에 끼어들 틈이 없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아버지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돈을 벌어다주지 않고 윤리적 태도를 보여주는 아버지는 무능하다고 비판받는다. 한편 돈을 벌어다주는 유능한 아버지가 돈을 지상 최대의 과제로 내세울 때 아이들은 속물로 그에게서 거리를 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버지, ‘우아한 세계’는 그 불쌍한 아버지들의 초상이다.

‘우아한 세계’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자식에게 너무 많은 것을 해주고 싶은 최근의 아버지상(像)을 대변한다. 그런데 우리 부모 세대의 아버지는 어땠을까, 과연 그 아버지들은 아들들을 어떻게 키워냈고 지금은 또 어떤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갈까.



여기,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노인네가 뒤뚱뒤뚱 논두렁을 걸어가고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노인의 모습이라기보다 1960년대 기록사진에서 뛰쳐나온 듯한 모습이다. 그의 곁에 있는 아내의 모습도 마찬가지. 기름으로 곱게 가름한 쪽찐 머리, 언젠가 흑백사진 속에서 본 듯싶은 할머니의 모습 그대로다.

이대근이 오랜만에 주인공을 맡은 영화 ‘이대근, 이댁은’은 독특한 작품이다. 고희가 된 노인 이대근은 찾아오는 이 하나 없는 적적한 나날을 보낸다. 그나마 도장 파는 일과 족발 가게를 운영하는 친구가 전부. 자식이 셋이나 있다지만 그의 곁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만한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지친 채 잠든 노인 앞에 고급 승용차가 등장하고, 노인은 자식들을 만나러 어디론가 향한다.

지나치게 환한 조명 아래 펼쳐진 집안 풍경은 어딘가 무대처럼 낯설고 기이하다. 큰아들 내외, 작은딸 내외의 등장 역시 연극적이다. 무대에 등장하고 퇴장하듯 그들은 적절한 타이밍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말을 타고 들어오는 손자나 택시기사 옷을 입은 목사 사위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 영화는 이 어색한 풍경의 진실을 밝히면서 완만하던 호흡을 숨차게 밀어붙인다.

아버지는 강한 존재인가?

영화의 마지막 3분의 1을 관통하는 가쁜 호흡은 반전이라고 부를 법한 비밀로 가득 차 있다. 중요한 것은 반전의 내용이 무대 위 연기만큼이나 환상적이라는 사실이다. 젊은 시절을 길에다 버린 아버지는 이제 노인이 돼 집으로 돌아와 자식들의 애정을 간구한다. 아버지로서 아버지 노릇을 단 한 번도 제대로 하지 못한 이 남자가 인생의 뒤안길에 들자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자식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 ‘이대근, 이댁은’은 마초적 남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이대근을 기용해 자신만의 삶을 살았던 우리 아버지 세대의 아버지들, 그러니까 할아버지 세대의 초라한 노년을 그려내고 있다. ‘우아한 세계’의 그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해주고 싶어 자신을 잊고 산다면 ‘이대근, 이댁은’의 아버지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가족을 등한시 여긴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세대들에게 가족은 내버려두어도 대략 건사되는, 굳이 애정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낳아놓으면 대략 성장해가는 그런 대상으로 압축된다.

‘이대근, 이댁은’에 조영된 왜곡된 가족상(像)은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 간의 충돌과 갈등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기에 아들의 애정을 요구하고, 아들은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아니기에 그럴 수 없다며 거절한다. 이 불행한 가역반응 속에서 관계는 틀어지고 외상은 깊어진다. 가족이기에, 그러니까 가까운 사람이기에 생겨났던 아픔이 지울 수 없는 상처로 각인되는 셈이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새롭게 등장한 노후문제 또한 이런 맥락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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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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