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머니 목에 난 혹의 정체는 암세포였다. 작은 달걀만한 그 혹 아래로 단단한 조직이 만져졌다. 단단한 그 조직은 말랑말랑한 정상적인 조직을 움켜쥐고 잡아당기는 듯했다.
“목을 누가 쥐어뜯는 것 같다고 말했어요. 아프신가 봐요. 아직은 고통을 많이 느끼는 것 같지는 않지만 밤에 잠을 잘 좀 주무시라고 약을 드리고 있어요.”
할머니는 전문병원에 가서 암을 진단받은 게 아니었다. 요양원에 와서 노인들의 건강상태를 정기적으로 살피는 은퇴한 의사가 보고는 암이라고 피력한 것이다. 앞으로 좀 더 여윌 것이며 3개월 정도 생존할 것이라는 게 의사의 소견이었다. 설암, 후두암, 식도암 등 입 주변에 걸리는 암들은 진행도 빠르고 고통도 상대적으로 크다고 알려져 있다. 할머니는 그중에서 하필이면 후두암, 후두의 앞쪽에 자리 잡은 경부후두암이었다. 요양원에 온 지 일주일 만에 혹의 크기 변화를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할머니는 침을 삼키는 데 불편함이 있는지 침을 조금씩 흘렸다.
할머니의 몸은 30㎏도 안 됐다. 153~154㎝ 키에 28~29㎏, 미라나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허벅지는 지름 8㎝ 통나무 같았다. 정상적인 세포보다 수백, 수천 배 더 왕성한 대사를 하는 암세포는 인체의 다른 기관에서 자신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를 빼앗아간다. 살과 근육의 양이 조금 더 많다면 죽음에 이르는 시간이 조금 더 연장될 것이다. 할머니의 몸무게는 앞으로 버틸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해줬다. 한편으로 할머니의 몸무게는 그간 어떤 환경에서 생활했는지도 증언해 줬다.
할머니는 90세 되던 해에 화장실에 갔다 오다 넘어져서 엉덩이뼈가 부서졌다. 부서진 뼈를 고정하기 위해 나사를 몇 개씩 박는 대수술을 했지만 뼈는 놀랍게도 두 달 만에 붙었다. 문제는 병원에서 퇴원한 이후에 일어났다. 거동이 불편하다 보니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고, 그 때문에 며느리는 밥과 물의 양을 줄여버렸다. 좋아하던 커피도 소변 양을 늘린다는 이유에서 끊어버렸다. 딸들은 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학대당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침묵했다. 요양원이 유일한 대안이었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한 이유는 비용 때문이었다.
밥과 삶에 대한 욕심
할머니들의 식사시간. 작은 소반이 나란히 놓이고, 한 상에 세 사람씩 앉게 국과 밥을 갖다놓았다. 상이 다 차려지자 수건이 하나씩 주어졌고, 할머니들은 그것을 무릎 위에 얌전하게 펴놓았다. 저녁 반찬은 미역국에 상추겉절이, 검은콩조림, 버섯볶음이었다. 요양원 3년차인 정릉 할머니는 갑갑하다는 이유로 밖에서 어슬렁거렸다. 요양원에서도 ‘짬밥’이 있었다. 8시쯤 기상해서 기저귀를 간 뒤 9시쯤 아침을 먹고, 오후 1시쯤 점심, 6시쯤 저녁을 먹었다. 수시로 귤 같은 간식이 주어졌고, 도우미가 있는 날은 필요에 따라 목욕을 했다. 적당히 눈치를 보아가며 씻겨달라는 요구를 하거나 산보를 하더라도 밥 때나 간식 때가 되면 와서 대기하는 식이었다. 정릉 할머니는 식사기도가 끝날 때쯤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뻣뻣하게 누워 있던 할머니들이 일어나 앉아서 열심히 숟가락질을 하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할머니 말아요?” “국에 마는 것 싫어?” “말아버렸는데 어떡하지?” “싫어? 그럼 바꿔서 맨밥 드릴게!” 산송장처럼 보여도 할머니들의 취향은 까다로웠다. “콩이 딱딱해요?” “김치 매워요?” “국이 뜨거워요?” 말을 못하지만 누군가 옆에서 말을 시켜주는 것을 좋아했다.
눈뜰 기력도 없어 보이던 할머니도 젓가락으로 콩을 집었다. 할머니들은 버섯이 입맛에 맞는지 숟가락이 부닥칠 정도로 바쁘게 버섯볶음을 자신의 밥그릇으로 퍼갔다. 숟가락질을 못하는 할머니들에게는 떠먹여주었다. 숟가락이 얼굴 주위로 가면 입을 크게 벌렸다. 스스로 숟가락질을 할 수 있든 없든 할머니들의 식성은 왕성했다. 웬만한 성인 남자의 양을 먹었다. 변을 잘 보게 하기 위해 미역이나 채소 같은 반찬을 빠뜨리지 않았고, 모두 바로 조리한 반찬들이었다. 우리 할머니의 식사 양은 다른 할머니 양의 반의 반밖에 안됐지만, 아침식사 후에 좋아하는 커피를 한 잔 마실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할머니는 많은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