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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2009년 2월호 별책부록 Brand New|Hangang/Essay

한강의 기억과 비전

강은 누구를 위해 흐르는가

  • 도정일 | 문학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jidoh@khu.ac.kr

한강의 기억과 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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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기억과 비전
조선시대의 한강변에서 꽃핀 ‘장터문화’는 한강이 가진 두터운 문화의 또 다른 측면을 대표한다. ‘장터’는 현대의 ‘시장’과는 다르다. 돈의 신이 지배하는, 그러므로 우리가 가끔 대문자 ‘엠(M)’으로 표기할 필요를 느끼기도 하는 것이 현대의 ‘시장(market)’이다. 시장은 구체적 행위자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드러낼 필요가 없는 거대한 추상이다. 그러나 ‘장터(market place)’는 추상의 거대 공간이 아니라 작은 구체적 공간이다. 살과 땀과 표정과 목소리를 가진 구체적 행위자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거래를 진행하는 곳, 사고파는 행위가 놀이의 차원을 넘나들기도 하는 장소다.

시장을 지배하는 최고의 명령이 ‘경쟁’이라면 장터의 거래 규칙은 ‘교환’이다. 시장에서 사람은 ‘기능’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반면 장터에서 사람은 언제나 기능 이상의 ‘인간’으로 존재한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그러나 한때 번성했던 ‘마포나루’는 그런 조선시대 장터의 하나다. 그것은 사람들이 강과 이마를 맞대고 살았던 ‘워터프런트 타운’의 한 형태다. 한강 복원 기획은 이런 형태의 장터문화에서 배울 것이 많다. 한강에서 기획되는 그 어떤 축제도 주민의 삶에 기초한 이런 종류의 토착 장터문화와 연결되지 않고서는 공허한 소비성 행사로 그치고 만다.

사람들의 생활문화와 생업활동이 강과 구체적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는 것은 한강을 살리는 일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지금의 한강은 위락업소들을 빼면 시민의 생업활동과는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있다. 나루가 사라지면서 한강은 운송, 물류, 혹은 어항의 그 어느 기능도 수행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팔도에서 양곡을 실은 조운선들이 몰려들던 양화나루, 어물공급을 담당하던 마포나루 등을 현대에 복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서울은 서해시대를 앞두고 강의 항구도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타개해야 한다.

이 문제는 지금도 한강 하류를 틀어막고 있는 남북한 대치구도와 직결되어 있다. 강물은 서해로 흘러들지만 민간선박은 한강 하류를 통해 서해로 나가거나 서울로 들어올 수 없다. 한강 하구는 민간선박의 통행이 금지된 군사구역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우리는 전쟁과 관계된 한강의 기억을 자세히 말할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한강을 무기력한 강으로 만든 요인의 하나가 전쟁구도라는 사실만은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몇 해 전에 화가 임옥상은 그 막힌 한강 하구를 상징적으로 뚫기 위해 임진강과 한강의 물살이 만나는 서해 수역까지 진출해보려는 선상 평화행진을 시도했으나 좌절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한강을 통한 서해 출입의 실현 없이 한강의 회복은 가능하지 않다.

가치와 비전



한강의 인문학적 가치와 비전을 말하는 일은 우리 시대의 절실하고도 기본적인 윤리적 질문들에 응답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 문명의 가장 이른 아침들이 강에서 열렸다면 문명을 지탱하는 지속적인 힘도 강에서 나오는가?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나일강은 지금도 흐르지만 그 강에서 나온 문명은 소멸하고 없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기른 강들은 지금도 유구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그때의 문명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농업시대의 강은 땅의 위대한 젖줄이 되어주었고 산업시대에도 제조업을 위한 강의 효용은 컸지만 그러나 지금 같은 고도 기술시대, 농업과 굴뚝산업이 생산의 위계서열에서 지배적 지위를 잃어버린 시대에 강의 효용, 강의 효율, 강의 가치는 무엇인가?

강은 직선, 속도, 경쟁과도 별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비효율과 느림의 패러다임이다. 강은 자연의 일부다. 자연이 삶의 현장에서 2선 3선의 가치로 후퇴해버린 시대에 강의 위치는 어디인가? 이런 질문들은 강의 가치를, 효용과 효율이라는 것의 의미를, 속도와 경쟁의 가치들을, 그리고 생존의 명령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각도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인문학은 바로 그 ‘다른 각도’와 ‘다른 방식’들을 공급한다.

상아탑에 안주하던 인문학을 그 탑에서 떠나 우리 시대의 절절한 문제들과 대결하게 한 사람의 하나가 현대 이탈리아 증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프리모 레비다. 그는 인문학 전공자가 아니라 화학을 공부한 과학자다.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로 끌려가 나치라는 이름의 고도 효율체제가 자행하는 살육과 파괴의 폭력을 견디어내는 동안 그가 대면해야 했던 가장 절실한 화두는 “도대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였다. 이것은 물론 인문학의 핵심적 질문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레비의 경우 그 질문은 연구실에서, 책에서, 상아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절멸수용소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 질문에 대한 레비의 응답이 무엇인가도 여기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질문 자체다. 그것은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며 어딘가 정답이 있는 질문도 아니다. 그것은 각자가 응답해야 하는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을 ‘한강의 질문’으로 돌리고자 한다. 나는 레비의 그 질문을 한강의 질문으로 삼는 것이 한강의 인문학적 가치를 요약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말은 지금의 한국이 레비가 겪었던 절멸수용소와 유사한 상황조건에 놓여 있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레비의 그 질문이 우리 시대의 세계에 가장 중요한 윤리적 질문이 된 순간에 오히려 그 질문을 기피하고 그 질문으로부터 열심히 도주하려 한다. 그 질문을 망각한 사회가 고도 효율에도 불구하고 나치 같은 지옥의 체계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다.

나는 평화의 강, 생명의 강, 공생의 강을 지향하는 것이 한강의 비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비전은 한강을 유연한 강, 에로스의 강, 서로 다른 가치와 지향들도 공생의 체계 속에 관용하고 아우르는 열림의 강이 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비전의 밑바닥에는 우리가 언제나, 궁극적으로 던져야 하는 기본적인 질문이 있다.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 강은 흐르는가?

신동아 2009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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