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호

비욘디 산티 vs 솔데라

생명력 탁월한 숙성 와인 vs 자연이 키운 순수 와인

  • 조정용│와인평론가 고려대 강사 cliffcho@hanmail.net│

    입력2009-03-06 16: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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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욘디 산티 vs 솔데라
    프랑스 와인의 명품화를 지켜보는 이탈리아 양조장의 분위기는 어둡다. ‘원조’를 따지자면 프랑스보다 이탈리아가 훌쩍 앞서건만 ‘와인의 종주국’이니 ‘최고급 와인’이니 하는 미사여구는 죄다 프랑스 차지니 말이다. 프랑스에 보르도와 부르고뉴가 있다면, 이탈리아에는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가 있다. 작고 후진 마을이었지만, 육종과 재배, 양조에 쏟아 부은 한 집안의 남다른 정성 덕분에 몬탈치노는 와인 애호가들이 꼭 한 번 들러야 하는 행선지가 됐다.

    이탈리아는 1963년에 원산지 규정을 제정했다. 프랑스의 1932년보다 한참 뒤진다. 성문법이 잘 짜여 있기로 이름난 나라라서 그런지 규정을 만드는 데도 무수한 세월이 걸렸다. 하지만 로마의 후예는 저력을 발휘한다. 1980년 마침내 국가에서 마련한 심사에서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가 최고 등급에 올랐다. 애호가들이 잘 아는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 바롤로, 바르바레스코와 더불어.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는 오늘날 프랑스 포이약이나 생테밀리옹처럼 단위 마을에서 생산되는 고급 와인이다. 하지만 그 이름이 단순히 마을 범주에 머무르지 않고, 크게 외연하여 이탈리아 고급 와인의 대명사가 됐다. 그 기틀을 마련한 이가 있는데, 생명력이 탁월한 장기 숙성형 와인을 만드는 데 평생을 바쳤다. 종래의 이탈리아 와인은 맛이 감미롭지만 몇 년 지나면 별로라는 게 일반적인 평이었다. 비욘디 산티 가문은 브루넬로 품종을 이용, 이탈리아도 프랑스 못지않게 숙성이 뛰어난 와인을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비욘디 산티 vs 솔데라

    비욘디 산티(왼쪽),솔데라.

    비욘디 산티가 낳고, 솔데라가 키우고

    비욘디 산티가 브루넬로를 잉태했다면, 브루넬로를 최고급 반열에 올려놓은 건 솔데라다. 비욘디 산티의 긴 역사에 비할 수 없지만, 품질과 가격 면에선 절대 뒤지지 않는 솔데라에선 맑고 고운 향기가 난다.



    비욘디 산티(Biondi-Santi)는 의심할 여지없는 이탈리아의 국보급 양조장이다. 대를 이어 와인 양조에 매진, 토스카나의 자그마한 마을 몬탈치노(Montalcino)를 이탈리아 와인의 중심에 놓았다. 비욘디 산티의 할아버지 페루치오(Ferruccio)가 육종에 성공한 브루넬로는 산지오베제의 변종으로, 위대한 와인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를 만든다.

    비욘디 산티 가문은 브루넬로의 비밀을 독점하지 않았다. 주위 농부들과 품종을 나누었다. 양조 시범도 선보였다. 평범한 와인이 아니라 특별한 와인을 만들도록 일일이 돌보았다. 가문이 처음으로 병에 담은 1888년 와인은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의 최초 빈티지다. 마을 사람들은 이 가문의 장손인 프랑코 비욘디 산티(Franco Biondi-Santi)를 존경한다. 나라에서 가장 큰 와인 행사 비니탈리(Vinitaly)에 그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그에게 예를 갖추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비욘디 산티의 명성은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됐지만, 프랑코 없이 이만큼 명성을 높일 수 있었을까? 90세를 바라보는 그는 요즘도 종종 자신의 빈티지를 잊을 정도로 일에 열중한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양조한 브루넬로의 최초 빈티지 1888을 지금껏 잘 보관하고 있다. 그는 단순히 선대의 유산을 잘 지켜낸 보수적인 인물이 아니다. 불굴의 투지로 무장, 불의에 대항하며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마을의 대표이기도 했다.

    “어느 누가 103세 와인만큼 건장할까?”

    상상해보라. 오늘날 몬탈치노 마을에 대규모 쓰레기 소각장이 들어섰다면,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면, 매일같이 대형 덤프트럭 수십 대가 마을의 좁다란 길을 타고 들고난다면, 과연 몬탈치노가 이탈리아 와인의 중심지가 될 수 있겠는가? 프랑코는 정치인들의 연합에 과감히 맞서 결국 승리했다. 회유와 위협에 시달렸지만, 자연 친화적 포도밭이라야 와인의 생명이 보장된다고 끈질기게 설득해 소각장 설립 계획을 무산시켰다.

    폐쇄 위기에 몰린 산탄티모 수도원도 슬기롭게 보호했다. 수도원은 몬탈치노 마을 남쪽의 카스텔누오보 델라바테(Castelnuovo dell‘Abate)에 있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둥근 모양의 수도원은 바라보기만 해도 안식을 얻을 정도로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몬탈치노 여행에서 이 수도원 바라보기를 빼면 영적인 감흥이 빠진다고 말할 수 있다. 미사가 없더라도 의자에 앉아 울려 퍼지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노라면 여정의 고단함은 눈 녹듯 사라지고 정신이 맑게 정화된다.

    비욘디 산티 vs 솔데라

    비욘디 산티(왼쪽),솔데라.

    약 500년 이상 방치됐던 탓에 박물관이 될 운명이었던 이곳에 한 프랑스 신부가 나타나 영성 훈련 공간으로, 즉 500여 년 전의 수도원 기능을 복원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프랑코는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수도원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관공서를 제집 드나들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2년 낡은 수도원은 새롭게 거듭났다. 그때까지 이곳저곳을 떠돌던 성직자들이 그의 도움을 받아 수도원 생활을 시작했다. 몬탈치노의 수도원이지만 신부는 모두 프랑스인이다.

    프랑코는 십수년 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하기도 했다. 숭례문의 기풍 당당함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비욘디 산티의 특별한 전통은 이미 오래전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 런던 주재 이탈리아대사관의 만찬에 제공된 1955 리제르바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한 많은 국빈을 놀라게 했다. 이탈리아에도 이렇게 훌륭한 와인이 있다는 사실에 와인 애호가가 경탄해 마지않았다. ‘여왕의 와인’이란 별칭을 얻었을 정도다. 미국 와인잡지 ‘와인스펙테이터’도 그 진가를 놓치지 않았다. 1955 리제르바를 20세기를 대표하는 ‘베스트 10’으로 선정했다. 이탈리아 와인 중 유일하게 순위에 들었다.

    브루넬로의 숙성력은 1994년에 열린 세기의 시음회를 통해 전세계에 알려졌다. 이 시음회에서 1888년부터 1988년까지 무려 100년에 걸쳐 잘 여문 열다섯 빈티지가 개봉됐다. 관심의 초점은 당연히 1888과 1891. 특히 1891 빈티지는 대단한 맛과 향을 지닌 것으로 기록됐다. 영국 출신 와인저널리스트 니콜라스 벨프리지는 “어떤 인간이 이 103세 와인만큼 건장하리요?”하며 10점 만점에 10점을 줬다.

    비욘디 산티 vs 솔데라

    솔데라 명품을 만든 지안 프랑코.

    비욘디 산티 브루넬로의 비밀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신맛이 강하고, 타닌이 풍부한 브루넬로를 전통 있는 포도밭 일 그레포(Il Greppo)에서 재배한다. 페루치오는 필록세라(포도뿌리 혹벌레)로 황폐해진 이 밭에 미국산 나무를 들여다 산지오베제 접붙이기를 했다. 남들이 여러 품종을 혼합해 당장 마시기 좋은 와인, 팔기 쉬운 와인에 매달릴 때도 비욘디 가문은 오로지 마을의 정체성이 담긴 산지오베제를 통해 숙성력이 뛰어나 오래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와인을 양조하려고 애썼다. 청포도를 섞어 산지오베제의 타닌과 신맛을 잠재우기보다 오히려 긴 숙성기간에 그 속성들이 와인에 스며들도록 했다. 비욘디 산티는 양조기간이 5~6년 이상 걸린다.

    프랑코가 후회하는 일이 하나 있다. 오크통 숙성기간을 단축한 것이다. 서둘러 판매하려는 지역 양조업자들에게 손을 들고 말았다. 짧아진 숙성기간 안에 브루넬로의 타닌과 신맛을 다스리려니 기존의 큰 오크통 대신 바릭(barrique·225ℓ들이 오크통)을 쓰게 됐다. 프랑스에서 흔한 바릭이 국경을 넘어 몬탈치노에까지 범람한 것이다. 그 결과 전통의 맛이 사라지고 인위적 오크향이 짙어졌다. 결국 브루넬로라고 해서 다 같은 브루넬로가 아니다. 생산자를 가려야 한다. 그래도 역시 비욘디 산티의 브루넬로는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대표급 와인이다.

    “비욘디 산티, 체르바이올라, 체르바이오나 등은 있는데, 손님이 찾으시는 건 없네요. 죄송합니다. 그건 좀 구하기 힘들어요.” 주인장은 못내 아쉬워한다. 여기는 이탈리아의 몬탈치노. 일주일 전 피렌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월에 벌어지는 시음회에 참여하러 몇 년째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이 와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몬탈치노에서 비욘디 산티보다 구하기 힘든 게 하나 있다. 바로 솔데라다.

    “그건 좀 구하기 힘들어요”

    지안프랑코 솔데라(Gianfranco Soldera)는 밀라노에서 보험중개업을 하다 문득 자기 이름의 와인을 만들고 싶어졌다. 그는 점찍어둔 몬탈치노에 양조장을 차렸다. 그리고 브루넬로(Brunello)에 남은 인생을 걸었다. 브루넬로는 산지오베제의 변종으로 몬탈치노가 고향인 검은 포도의 일종이다.

    그는 1972년 타벨넬레(Tavelnelle) 지구의 황량한 풀밭을 매입해 30여 년 만에 몬탈치노의 간판 양조장으로 일궈냈다. 카제 바세(Case Basse)라 불리는 양조장 전체 면적은 25㏊, 그중 포도밭은 9㏊ 정도다. 포도밭 전체가 숲이나 개울로 둘러싸였다. 지극히 자연에 가까운 포도밭이다. 개울을 건너면 안젤로 가야의 양조장이 있다.

    “포도나무 버팀목 위의 저 상자들은 무엇인가요? 많기도 하네요.”

    “아, 그거요? 새집이에요. 포도가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해충을 막기 위해 수백 개의 새집을 놓아두었어요. 대학 연구팀이 매년 새의 생태를 연구하기도 합니다. 모든 새집에는 실제로 새가 살고 있지요.”

    카제 바세는 새집 외에도 퇴비를 직접 만들고, 장미를 곳곳에 재배하고, 양봉을 하는 등 자연환경에 무척 공을 들인다. 한쪽에 지은 주택에는 아기자기하게 단장된 정원이 있다. 주변을 돌아보면 온통 식물 천지다. 포도나무가 끝도 없이 줄 서 있는 대규모 반피(Banfi·신흥 명문 와이너리. 토스카나 지역을 대표하는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를 생산하며 지역 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와는 사뭇 대조적인 광경이다. 원예학적으로 아름답게 꾸민 프랑스 포이약의 샤토 피숑 라랑드나 소테른의 레이몬드 라퐁에 견줄 만하다. 지안프랑코의 딸 모니카는 포도밭을 안내하던 중 흙을 한줌 쥐어 보였다. 물기를 흠뻑 머금은 흙덩이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니 곧 곱게 부서졌다.

    “이곳 토양은 미네랄이 풍부합니다. 보통 덩어리를 이루고 있으며 수분도 잘 흡수하죠. 기후는 점점 더워지지만, 이런 토양 덕분에 매년 훌륭한 포도를 수확합니다. 특히 가물어 메마를 적에도 여기는 어느 정도 안심이랍니다.”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솔데라의 개성을 설명했다. 그 토양은 태고에 바다가 융기해 조성된 땅덩어리를 구성하는 요소라 포도 재배에 적합하다.

    솔데라의 자연친화적 포도밭 관리는 양조장 운영 방침과도 맥이 통한다. 현대적 스타일로 치닫는 이웃들과 대조적으로 솔데라는 바릭을 전혀 쓰지 않는다. 150헥토리터(1헥토리터는 100리터) 혹은 75헥토리터 용량의 캐스크(와인 담는 큰 나무통)에서 와인을 묵힌다. 캐스크는 온도조절을 하지 않는 등 극히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숙성시킨다. 4년 후에는 일반 브루넬로로, 5년 후에는 리제르바로 탄생하며, 9개월의 병 숙성 후에 출시된다. 시장에서 지금 팔리는 빈티지는 2000이다. 습기 충만하고 서늘하다 못해 추운 듯한 지하 셀러에서 통 속에 든 다섯 빈티지를 차례로 시음했다. 시음하는 동안 자코모 콘테르노의 몬포르티노(Monfortino)가 떠오른 것은 우연일까? 모니카에게 그 느낌을 얘기하니 그 집안과 친하다며 반색했다.

    오직 자연에 매달려 얻은 단순미(味)

    솔데라는 백합이란 뜻도 지니는데, 와인 맛을 보면 그 뜻이 더 잘 통한다. 그 맛은 한마디로 순수하다. 백합처럼 순수하고 단순한 맛. 포도즙 외에 일절 치장하지 않으며, 순진무구함과 간결함만 남는다. 거칠고 단단한 브루넬로 포도로 이런 깔끔하고 자연스러운 맛의 와인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포도가 완벽하게 익어야 하고, 그 포도의 타닌과 산도를 양조장에서 잘 다스려야 한다. 색은 투명한 붉은색이며 맑고 정결하다. 이런 수준의 와인은 몬탈치노에서 찾기 어렵다. 아주 드물다. 오직 자연에만 매달려야 이런 자연스러움을 와인에 담을 수 있다.

    솔데라는 비욘디 산티를 벤치마킹한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비욘디 산티는 지난 120년간 브루넬로의 종가(宗家)로서 자연스러운 브루넬로 맛을 연구해왔기 때문이다. 솔데라의 깊고도 간결한 맛은 외서 ‘앗 뜨거워’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흔히 단순하다는 말은 쉽다는 뜻으로 해석되지만, 주방장이 그 말을 할 땐 그 뜻을 터득하는 데 한평생이 걸린다.”

    지안프랑코는 성격이 불같이 급하다. 단신에 동글동글한 외모는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을 연상시킨다. 그는 자신의 비위를 조금만 건드려도 금방 성을 낸다. 그 밑에서 일해봤다는 한 젊은이는 특히 양조장 내에서는 조심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워낙 위생에 민감하기 때문에, 털끝 하나라도 잘못 관리하면 불호령이 떨어진다고 했다.

    솔데라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여기에는 주인의 괴팍한 성격도 한몫했겠지만, 와인이 지닌 단순함의 극치가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30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브루넬로의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으니 말이다. 평가의 결과는 팔리는 가격이다. 이미 안젤로 가야의 부르넬로를 능가하며, 심지어 비욘디 산티보다도 비싸게 팔리기도 한다. 이 점이 비욘디 산티의 심기를 건드린다. 둘 다 뉴욕 경매장의 단골 메뉴다.

    브루넬로의 유명세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시음 중에는 절대 뱉을 수 없다는 사실. 오직 와인이 상했을 때만 뱉는 것이 솔데라의 규칙이다. 그는 수년 전에 밀라노 회사를 완전 정리하고 몬탈치노에 정착했다. 이젠 와인에만 집중한다. 쌍둥이를 포함해 4녀를 둔 딸 가족과 함께 그는 오늘도 멜빵 바지를 입고 자연으로 걸어들어간다.

    브루넬로의 유명세는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와인스펙테이터’가 선정한 2006년 최고의 와인으로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가 선정됐다. 현대 건축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카자노바 디 네리의 2001년 빈티지였다. 우리 안방에도 등장했다. 탤런트 고현정이 30대 노처녀로 분했던 드라마 ‘여우야 뭐하니’에서 친구의 남동생인 천정명이 고현정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브루넬로 디 몬텔치노가 깜짝 등장했다. 안티노리 소유의 피안 델레 비녜라는 브랜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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