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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시나리오’‘장성택의 눈’으로 본 북한 권력엘리트 파워게임

“다 같이 살자는 겁니다, 아님 정말 총과 총이 맞붙는 걸 보시겠습니까”

  • 황일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가상 시나리오’‘장성택의 눈’으로 본 북한 권력엘리트 파워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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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시나리오’‘장성택의 눈’으로 본 북한 권력엘리트 파워게임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동승한 리무진이 군복 차림의 호위사령부 요원들의 삼엄한 경호 속에 평양 시내로 향하고 있다.

“당은 그래도 제 뜻을 따라주지만, 군 인사는 위원장 본인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기력을 찾으시면 들어가 뵐 겁니다. 와이프도 그게 좋겠다고 얘기하고요. 이건 그전에, 그러니까 준비작업에 해당하는 겁니다.”

아내가 동의했다는 말에 정남은 한층 누그러진 듯했다. 어린 시절부터 고모 말이라면 꼼짝 못하는 정남이었다. 지금 이 미묘한 시점에서, 그들 부부가 같은 판단을 내렸다면 다른 이에게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일 터였다.

30분 뒤, 집무실 자리에 앉은 그의 눈에 메모가 띄었다. 보고 싶지 않은 이름. 갑자기 저녁을 먹자는, 그것도 오늘 저녁이어야 한다는 강한 톤의 전갈이었다. 그 순간 그의 등에는 소름이 쫙 끼쳤다. ‘그들’이 자신을 보자고 할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누군가 정남과 그의 대화를 엿들었고, 그들에게 전한 것이다.

장성택이 후계구도에서 김정남을 지지해왔다는 견해는 정설에 가깝다. 두 사람은 모두 ‘친중파(親中派)’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장성택 실각 직후 김정남이 프랑스에 머물던 장금송 등 장성택의 가족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줬다는 정황이 확인된다.

장성택의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실각 이후 후임으로 임명된 리제강이 당시 친(親)김정철파의 리더로 분류된 것 역시 정보당국 관계자들이 인정하는 부분이다. 장성택의 좌천 이후 그의 측근인 최춘황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과 리광근 무역상 등을 제거하는 데 리제강 부부장이 주요 임무를 담당했다는 것. 장성택 부부장이 리제강, 리용철 조직지도부 군사담당 제1부장 등 친김정철파에 의해 축출당한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온 배경이었다.



주목할 것은 장성택의 실각을 전후해 ‘김정철 후계론’의 핵심 증거로 급부상했던 ‘학습제강’의 제작처가 조선인민군출판사였다는 사실이다. 김 위원장을 향한 ‘존경하는 어머님’의 한없는 충성심을 강조하는 학습제강은 고영희 우상화를 통해 정철이나 정운을 후계자로 옹립하기 위한 준비작업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전직 정보당국 최고위 관계자는 “문제의 제강은 실제로 2003~04년에 인민군 전방부대에 대대적으로 배포돼 강연 자료로 활용됐다”고 말한다. 바꿔 말하자면 이러한 움직임이 당시 군부 핵심인사들의 협조 혹은 양해하에 진행됐음을 의미한다. 이 무렵부터 요직을 차지하기 시작한 군사파 지도자들이 정남보다는 정철 혹은 정운에 더 무게를 두고 있음을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2004년 5월 고영희가 사망한 이후 김정남의 활동공간은 넓어지고 장성택은 중앙무대에 복귀한다. 그러나 이후 리제강, 리용철 등 친김정철 인사들은 물론 김명국, 리명수, 현철해 등 군부인사들도 건재했다. 대부분의 북한 전문가는 이들이 이 무렵부터 김정일 위원장의 관리하에 일종의 세력균형 상태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에 동의한다.

그러나 지난해 말 알려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인사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김 위원장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 상태에서 이처럼 핵심 포스트의 인사발령을 냈다는 사실은 급박한 사정이 있거나 혹은 김 위원장을 대리한 인물의 독자행동이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 북한 군사 전문가는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 임명된 김경옥은 1970년대부터 중앙당과 서기실에서 군사 분야를 담당해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며 “군부보다는 장성택과 더 연결고리가 많은 인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김경옥은 조직지도부 내에서도 군, 특히 총정치국을 담당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은 친김정철파의 핵심으로 알려졌던 리제강과 리용철 두 사람이 맡고 있었던 것도 우연치고는 공교롭다. 이 시기 병석의 김 위원장을 대신해 장성택 부장이 상당 수준의 결정권을 행사했다는 소식을 감안하면 김경옥의 임명이 권력투쟁과 관련 있다는 분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장면3‘총참모장 연락두절, 연금상태 추정’

자정이 넘었다. 거나한 술자리, 어둠침침한 조명 건너편의 그들의 머릿속도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게 손에 잡힐 듯 훤히 읽힌다. 좀처럼 본론을 꺼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혹시 다른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일까. 껍데기뿐인 미소 속으로 살얼음 같은 긴장이 흐른다.

그는 군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미국과 남한이 언제든 휴전선을 넘어 치고 올라올 것이라고 시도 때도 없이 반복하는 그들의 주문을 믿지 않는다. 무력만이 해결책이라고, 본때만이 돌파구라고 믿는 군사력 지상주의자들의 말에 조직 이기주의 외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너희는 무엇을 염려하는가, 일신의 안위인가. 나는 공화국의 미래를 걱정할 뿐이다.

보좌관이 급히 뛰어 들어와 쪽지를 건넨 것은 그때였다. ‘총참모장 관저에 정체불명 군인들 습격, 총참모장 연락두절, 연금상태 추정.’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이것이었나. 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테이블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가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지요. 총참모장은 저희가 모시고 있습니다. 민방위부장, 인민보안상, 다른 분들도 저희가 길목을 확보하고 있고요.”

“뭘 원하는 거요? 위원장이 이 일을 묵과할 것 같습니까?”

노기 띤 음성이 흔들린다. 사실 그건 노기가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나올 거라고는 미처 상상 못했던 자신의 순진함에 대한 실망감과 공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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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일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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