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호

전태일

시대의 불꽃으로 타오른 한국 노동운동의 깃발

  • 윤무한│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입력2009-04-02 1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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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일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새 39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여기서 우리의 기억을 잠시 1970년 그때로 되돌려보자. 1970년 11월13일 오후 1시30분, 청계천 6가 평화시장 앞 사거리. 피복 노동자(당시에는 ‘노동’이란 말이 금기시됐음)로 일하던 전태일과 12명의 ‘삼동회(三棟會)’ 회원이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시위 군중은 금세 500여 명으로 불어났고, 시장경비대와 경찰병력이 평화시장 일대를 삼엄하게 에워쌌다. 그로부터 10여 분 뒤, 삼동회를 조직하고 시위를 주도한 스물두 살의 전태일이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삽시간에 그의 몸 전체로 퍼졌다. 그는 불타는 몸으로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의 손에는 근로기준법 책자가 쥐어져 있었다.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를 위한다는 화려한 위로의 말잔치며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따뜻한 비단이불이었다. 법으로만 있던 그 화려한 장식물이 이날 화형을 당한 것이다. 역사가 매양 그렇듯, 새 시대가 오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도래를 정면으로 선포하는 의식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런 의식에는 으레 속죄양이 요구됐다. 역사의 비정함인가.

    전태일의 육신 위로 불길이 치솟아 오를 때까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도 몰랐다. 너무나 엄청난 광경을 보고 넋을 잃었던 것이다. 잠시 후 전태일의 동료가 달려들어 점퍼로 불길을 덮었다. 불은 한참 뒤 꺼졌다. 전태일은 이미 숯덩이처럼 탔다. 그런데도 그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 생명을 내뱉는 절규였다. 일찍이 세계 노동운동사에 없던 분신투쟁이 벌어진 순간이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이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전태일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엄마, 내가 못다 이룬 일 엄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 어머니는 약속했다. “내 몸이 가루가 돼도 네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 ” 그리고 밤 10시경, 전태일은 “엄마, 배가 고파요”라는 말을 남긴 채 숨을 거두었다.(‘이소선 여든의 기억-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후마니타스, 2008) 평생을 굶주림과 고통 속에서 살다 간 스물두 살의 젊은이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인간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전태일의 분신 후 사흘째인 11월16일, 서울대 법과대학에서는 가칭 ‘민권수호 학생연맹 준비위원회’가 발족했다. 학생들은 전태일 장례를 서울대 법대 학생장으로 치르려 했다. 이소선은 아들이 요구한 노동조합 결성과 근로조건 개선 등 8개항의 요구조건을 노동당국에 내걸고 버텼다. “(아들의 시신을) 검은 치마폭에 싸서 뒷산에 묻더라도 내 아들 장례는 내가 치르겠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노동청에서 공개적으로 그 요구조건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례식은 이틀 뒤 열렸다. 이소선이 다니던 창동 감리교회에서 영결식이 거행됐다. 장지는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마석리 모란공원. 산을 밀어 조성한 지 얼마 안 된 공원묘지는 황량했다. 그러나 훗날 이 묘역은 ‘민주열사 묘역’이 되어 동작동 국립묘지와 또 다른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성역으로 가꾸어졌다.

    서울대 법대에서는 11월20일 전태일 추모식이 열렸다. 이 모임을 주선한 인물들 중에는 장기표를 비롯,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도 있었다. 추모식에서 조영래가 초안을 작성한 선언문이 발표됐다. 곧바로 서울대에 무기한 휴교령이 내려졌다. 추모모임은 그 후 전국 각지 대학생들과 종교단체에까지 퍼져나갔다. 11월25일 개신교와 가톨릭계가 연합해 가진 추모예배에서 김재준 목사는 “우리 기독교는 여기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다”고 속죄했다. 11월27일에는 청계피복노조가 결성됐다. 전태일이 죽음으로써 쟁취하고자 했던 평화시장 노동자의 ‘둥지’가 비로소 마련된 것이다.

    1970년 겨울부터 이듬해까지 전태일이란 이름 석자가 한국 사회를 휩쓸었다. 그것은 폭풍이었다.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노동문제를 사회적 관심사로 다루었다. 성장신화의 한 귀퉁이에 내팽개쳐져 있던 노동문제에 관심이 집중됐다. 학생들 사이에선 노학(勞學)연대의 싹이 돋았다. 종교인들은 참회와 속죄의 기도회를 열었다.(구혜근,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창비, 2002)

    ‘신동아’는 1971년 1월호에 전태일 수기를 단독으로 입수, ‘인간 최소한의 요구입니다’를 실었다. 이어 3월호에는 ‘평화·동화·통일시장-근로기준법의 소외지대’를 심층 취재했고, ‘그 후의 평화시장’을 제목으로 생생한 현장르포를 담았다.

    전태일, 이 젊은 청년이 우리 사회에 준 충격은 엄청났다. 노동자는 물론 학생 지식인 종교인 언론인 할 것 없이 양심에 가시가 찔린 듯 아픔을 겪었다. 특히 수출주도형 산업화와 한강의 기적이라는 외형적 성장신화의 그늘에 가려져있던 노동자들이 전태일의 ‘인간선언’에 눈을 떴다. 그들은 더 이상 ‘기계’가 아니고 인간이고 싶었다. 노동조합 결성이 무엇보다 당면한 과제였다. 그 결과 1970년 46만여 명이던 조합원이 1977년에는 100만명을 돌파했다.

    그와 함께한 사람들

    전태일과 함께한 삶은 많다. 이후 그의 가족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일일이 말하기엔 지면이 부족하다. 당시 대학생으로는 장기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장기표에게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어머니’였다. 그는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조영래와 함깨 1년6개월의 징역살이를 했다. 장기표는 이소선에게서 받은 전태일의 육필수기를 조영래에게 건네주었다. 그밖에 손학규, 제정구, 이신범, 김문수 등이 전태일과 한때를 같이한 사람들이다.

    서울법대 학생회 간부였던 이광택은 뒷날 독일유학을 거쳐 노동법 교수가 됐다. 지금 그는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기념사업회 상임이사를 맡고 있는 민종덕은 청계천 고서점에서 우연히 ‘신동아’에 실린 전태일의 수기와 평화시장 르포 기사를 읽고 충격과 감동에 사로잡혔다. 곧바로 이소선을 찾아 전태일을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장기표와 조영래 사이에서 연락을 하면서 1983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 출간에 숨은 기여를 했다.

    조영래는 전태일이 분신할 당시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기표의 연락을 받고 황급히 달려 나와 추모모임의 선언문 초안을 쓰는 등 참여하다가 다시 시험 준비를 계속했다. 조영래에게 근로기준법은 단순한 법전의 문제가 아니었다. 노동자의 삶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규범이었다. 그는 제도권에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 사법부에 진입하려 했고, 1971년 마침내 고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조영래는 사법연수원 생활을 하던 중 ‘국사범’으로 옥고를 치렀다.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이라는 거창한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조영래는 장기표와 함께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른 뒤 1973년 4월에 출옥했다. 조영래는 출옥 후 장기표로부터 전태일의 수기를 건네받았다. 조영래는 전태일보다 한 살이 많았다. 그는 이 스물두 살 청년의 아름답고 눈물겨운 모습에 가슴이 찢어질듯 아팠다. 그러나 1974년 발생한 민청학련사건에 연루, 장기표와 함께 당국의 수배를 받고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됐다.

    ‘대학생 친구’ 조영래

    수배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조영래는 피신에만 급급할 수 없었다. 그는 틈틈이 이소선을 만나는가 하면, 평화시장 노동자들을 몰래 접촉해서 그들의 생존조건을 샅샅이 조사했다. 만 1년 이상을 그렇게 해서 뒷날의 ‘전태일 평전’을 준비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한 1년 동안 도망 다녔는데, 조 변호사(1983년 변호사 개업-필자 주)에게 넘겨주었지요.(전태일 수기 복사본. 원본은 이소선에게 반환-필자 주) 그렇게 해서 그 책은 1976년 초가을에 거의 마무리됐지요.”(‘조영래변호사 유고집: 진실은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창작과 비평사, 1991)

    조영래는 고달픈 수배생활 중에도 ‘전태일 평전’ 집필에 매달렸다. 1976년 가을 초고가 완성됐다. 완성된 원고는 미로와 같은 경로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국내 상황은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계엄령 상태’였다. 어쨌든 1977년 한국에서 넘어간 한 뭉치의 원고가 이듬해 일본어로 번역·출간됐다. ‘불이여, 나를 감싸 안아라’라는 제목에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부제를 단 ‘전태일 평전’이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에서 역수입됐다.(안경환, ‘조영래 평전’, 강, 2006)

    국내에서 이 책은 유통이 철저하게 금지됐다. 금서 중의 금서였다. 1983년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가 결성됐다. 문익환 목사가 회장이었을 때 일이다. 문익환은 그해 6월 돌베개출판사에서 ‘어느 청년…’을 펴내기로 했다. 책은 출판과 동시에 판금됐다. 그러나 입을 발로 해 이 책은 빠른 속도로 독서시장에 퍼져나갔다.

    ‘어느 청년…’은 수많은 독자의 가슴을 두드리고 혼을 흔들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이 책은 더 이상 ‘불온문서’가 아니었다. 1990년 가을 개정판 출간 준비 작업이 시작됐다. 길고도 모호한 제목을 군더더기 없이 ‘전태일 평전’으로 바꾸었다. 저자 역시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대신, 조영래 이름 석자를 세상에 처음으로 밝혔다.

    책 내용도 달라진 시대상황에 맞춰, 숨길 수밖에 없었던 부분을 드러내고, 부분적으로 수정도 했다. ‘전태일 평전’의 ‘복권’이었다. 그러나 정작 조영래는 1990년 폐암선고를 받고 12월12일 세상을 떠났다. 개정 증보판이 산뜻한 장정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기 불과 며칠 전이었다. 전태일이 그토록 갈망하던 ‘대학생 친구’ 조영래는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 후 20년 만에 그의 곁에 누웠다. 뒤늦은 만남이지만, 그 역시 아름다운 인연이 아니겠는가.

    평화시장에 첫발

    조영래는 ‘전태일 평전’ 서장의 글머리에서 1976년 현재 전태일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태일.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라는 이름의 청년 노동자. 1948년 8월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둘의 젊음으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그의 죽음을 사람들은 ‘인간선언’이라고 보았다.”

    전태일의 어린 시절은 1950~60년대 하층민의 삶을 밑도는 참담한 것이었다. 봉제 노동자였던 아버지 전상수와 어머니 이소선 사이에서 2남2녀의 맏이로 태어난 전태일은 1956년 남대문초등공민학교 2학년으로 들어갔다가 1960년 남대문초등학교로 편입했으나 그마저 중퇴했다. 평생 그는 배움에 목말랐다. 삶의 근거지도 들쑥날쑥해서 대구에서 서울로, 다시 대구로, 다시 서울로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전형적인 뜨내기 삶이었다.

    전태일

    생각 많고 가슴이 따뜻했던 전태일.

    1963년 전태일은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다. 훗날 그는 이때를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했다. 그러나 행복했던 시절은 잠깐이었다. 그해 겨울 아버지의 명령으로 전태일은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재봉틀 한 대에 온 가족이 매달려야 했다. 공부에 굶주린 전태일은 동생 태삼이를 데리고 서울로 가출했다가 견딜 수 없어 다시 대구로 되돌아갔다.

    이듬해에는 어머니가 단신 상경, ‘식모살이’에 나섰다. 전태일은 이번에는 막냇동생을 데리고 다시 서울로 가출했다. 코흘리개 여동생을 굶겨 죽일 것만 같은 두려움에 서울 미아보호소에 맡겼다. 그의 일기를 통해 당시 삶을 엿보자.

    “그 전에 덕수궁에서 구두를 닦고, 저녁에는 신문을 팔고, 밤 1~2시에는 야경꾼을 피해 다니며 조선호텔 앞에서부터 미도파백화점 앞과 국립극장 앞, 명동 뒷골목을 쓸며 담배꽁초를 주워 모아 생계를 유지하고, 잠은 덕수궁 대한문, 지금의 수위실에서 가마니를 덮고 잘 때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건만….”(1967년 2월20일자)

    1964년 봄 무렵 전태일은 평화시장에 첫발을 들여놓는다. 그의 나이 17세 때. ‘시다’(명색은 견습공이었으나 온갖 잡일을 다했다-필자 주)로 첫출발을 했다. 그 시절 평화시장은 어떤 곳이었던가? 1961년 서울의 청계천 6가에서 동대문 운동장 쪽으로 3층짜리 연쇄건물이 들어섰다. 연건평 7400여 평(2만4400여㎡). 여기에 피복 제조업자와 의류상들이 모여들었다. 1968년에는 통일상가가, 이어서 1969년에는 동화시장이 들어섰다. 전국 규모의 기성복시장이 들어선 것이다.

    “평화시장 일대는 통틀어 여공이 약 80~90%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시다는 대부분 가정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12~15살의 소녀들이 기술을 배워 집안을 도와 보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간다.”(조영래, ‘전태일 평전’, 돌베개, 1983)

    여덟 평 남짓 연옥

    전태일이 본격적으로 평화시장 노동자로 일하게 된 것은 1965년 가을 무렵부터다. 삼일사라는 학생복 맞춤집에 시다로 들어갔다. 월급은 1500원. 하루에 간신히 먹고 자는 데 120원이 들 때다. 모자라는 돈은 구두를 닦거나 껌과 휴지를 팔아서 때웠다. 재봉 기술은 집에서 어느 정도 익힌 터라, 전태일은 남보다 일찌감치 ‘미싱 보조’가 됐다.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이 함께 모여 살게 된 것이 이 무렵이었다. 1966년 가을에는 평화시장 뒷골목 통일사에 미싱사로 들어갔다. 전태일의 가슴은 꿈과 희망으로 부풀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현실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평화시장은 한마디로 연옥이었다. 작업장은 8평(26㎡) 남짓. 비좁은 실내 가득 재봉대와 작업대가 들어차 있었고, 핏기 없이 누렇게 뜬 얼굴의 종업원 32명이 죄수처럼 끼어 앉아 온종일 일벌레처럼 지냈다. 높이 3m 정도의 벽 중간에 수평으로 칸막이를 대고 2층을 만들었으니, 천장 높이는 1.5m 정도. 닭장 같은 다락방이었다. 여기에서 겨우 열서너 살짜리 소녀들이 오전 8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일했다. 하루 종일 햇빛 한번 보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화장실을 가는데도 눈치를 봐야 했다.

    작업장에는 환기장치도 없었다. 통풍과 채광도 안 됐다. 작업 도중 날리는 옷감 먼지와 실밥을 뒤집어쓴 채 온종일 앉은뱅이처럼 일했다. 머리 바로 위에 백열등을 켜놓아 시력이 성할 리 없었다. 화장실은 남녀 공용. 2000명 이상이 겨우 3개의 화장실을 나눠 쓰고 있었다. 상수도 시설은 400여 작업장에 단 3곳뿐이었다. 그나마 제한급수이고, 목욕시설이나 세면장을 제대로 갖춘 작업장은 없었다. 한겨울에도 난방이 안 돼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는 극도로 나빴다. 1970년에 조사한 내용을 보자. 재단사 100% 전원이 신경성 소화불량, 만성 위장병, 신경통 등을 앓았다. 미싱사의 90%는 신경통, 위장병, 신경성 소화불량, 폐병 2기까지 질병을 안고 있었다. 평화시장 업주가 종업원의 정기검진을 실시한 적은 거의 없었다. 병 치료에 신경을 써준 적은 더더구나 없었다.

    평화시장에서 5년 이상 일하고도 건강하다는 종업원은 있을 수 없었다. 있었다면 신통한(?) 일이라고 자조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다. 그들은 아파도 아픈 줄을 모르고 지냈다. 설령 무슨 병에 걸렸대도 방법이 없었다. 속수무책이었다. 무슨 돈으로 치료를 할 것이며 병원 갈 시간은 또 어떻게 낼 것인가? 병이 깊어진 뒤 그들이 가야 할 길은 딱 하나였다. 직장을 그만두거나 해고당하는 길.

    여공들의 따뜻한 오빠

    “한 공장의 30여 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주식회사(평화시장 업체들의 연합기구로, 오로지 그들만의 이익단체-필자 주)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적으로 검진합니다. 필름도 없이 X-레이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1970년 전태일의 조사에서)

    1966년 전태일은 한미사의 재단보조가 됐고, 이듬해에는 재단사가 됐다. 작업장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 자리는 봉제업체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였다. 업주의 돈벌이가 잘되고 못되는 것은 재단사의 능력, 그리고 재단사가 업주에게 얼마나 협조를 잘하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었다. 대부분의 재단사는 업주와 철저하게 유착돼 있었다. 전태일은 달랐다. 그는 불쌍한 노동자를 위해 일하기로 작정하고 그 자리에 올랐다.

    전태일은 어린 여공들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오빠’였다. 정에 목마르고 혹심한 노동에 시달리던 여공들은 그에게 온갖 하소연을 했다. 전태일은 점심을 굶는 여공들에게 버스 값을 털어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청계천 6가에서 집까지 걸어갔다. 두세 시간이 걸렸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엔 자정을 넘겨 통금에 걸렸다. 그런 날엔 미아리 파출소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새벽에 집에 잠깐 들렀다가 다시 출근했다. 이런 생활은 그가 죽을 때까지 되풀이된 일과였다. 몸이 고된 것은 물론, 시다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된 뒤로는 가슴을 칼로 저미는 고통을 느꼈다.

    그 무렵 전태일의 가족은 도봉동을 거쳐 쌍문동으로 쫓겨갔다. 쌍문동 208번지는 그때 공동묘지였다. 무덤 옆에 천막을 치고 잠을 잤다. 난민들은 겨울철 추위를 피하기 위해 시멘트 블록으로 무허가 건물을 지었다. 철거반이 들이닥쳐 집을 부수고 가면 다시 시멘트 블록을 쌓아 벽을 올렸다. 지붕은 슬레이트나 루핑으로 덮었다.(‘이소선 여든의 기억’에서)

    명색이 재단사가 되었지만 굶주리고 쪼들리는 생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여기에 평화시장 종업원들의 괴로움이 무거운 납덩이처럼 그의 가슴을 내리눌렀다. 전태일에게는 자신을 포함한 평화시장 전체 종업원들의 생활이 인간이 아닌 ‘기계’, 그것으로 생각됐다.

    “실제로 나는 일의 방관자나 다름없다. 내 육신이 일을 하고,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때까지의 육감과 이 소란스런 분위기가 몇 인치 몇 푼을 가리키는 것이다.”(1967년 3월의 기록에서)

    근로기준법과 ‘바보회’

    어느 날 한 미싱사 처녀가 일을 하던 중 재봉틀 위에 붉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전태일은 황급히 처녀를 병원으로 옮겼다. 폐병 3기였다. 미싱사 처녀는 치료를 받기는커녕 곧바로 직장에서 해고됐다. 전태일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분노에 떨었다. 그 처녀가 치료 한 번 못 받고 절망적인 삶을 살다가 죽어갈 것이 눈에 선했다.

    근로기준법, 전태일은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 입에서 근로기준법 소리를 듣고 귀가 번쩍 띄었다.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혼자서는 안 되며, 단결된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동조합의 결성이 필요했다. 엄연히 법적으로 인정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 무렵 전태일은 해고됐다. 피곤에 지친 어린 여공들을 일찍 집에 보내고 그가 밤늦도록 그 일을 대신해주는 것이 업주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인정(人情)은 업주의 눈에 ‘불편’한 것이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와 같이 그 동네는 별것이 다 껄끄럽게 여겨지는 이상한 세계였다. 힘없고 나약하고 어린 종업원을 돌보는 것이 해고의 사유라니!

    1969년 6월 말경, 덕수궁 근처 낡은 중국음식점. 평화시장 노동자 10여 명이 모였다. 이름은 ‘바보회’. 왜 하필 바보회인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찍소리 한 번 못해서 바보이고, 자기주장을 하려고 나서는 이는 평화시장에서는 정말 바보이기에 그렇게 이름 붙여졌는지 모른다. 전태일 자신은 ‘좋다. 나는 바보다’를 속으로 외쳤을 것이다. 어둡고 쓸쓸한 출발이었다. 그러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란 수고와 피땀 없이 찾아오지 않는다. 전태일은 이를 악물었다.

    창립총회에서 몇 가지 활동지침이 마련됐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근로기준법 준수 투쟁, 노동자들의 조직결성과 강화, 노동자들의 실태조사, 다분히 공상적이나마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모범적인 회사 모델 제시 등이었다. 회합 장소로는 주로 전태일의 집이 사용됐다. 전태일은 이때부터 비록 작은 조직이었지만 책임감에 사로잡혔다. 돈도 여건도 어려웠다.

    전태일은 그때 심태식 저 ‘축조 근로기준법 해설’ 한 권을 샀다. 고등공민학교 출신이 그 딱딱하고 낯선 법률 해설서, 그나마 법대생조차 잘 접하지 않던 노동관계 책을 어찌 이해할 수 있었으랴. 전태일은 그때부터 “대학생 친구가 한 명 있으면 원이 없겠다”고 입버릇처럼 뇌었다.

    생각 많은 젊은이

    바보회 창립 얼마 후 전태일은 옮겨간 직장에서도 해고됐다. 이제 평화시장 어디에도 발붙이기 어려웠다. 업주들 사이에 그는 어느덧 ‘위험분자’가 돼 있었다.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이다. 8월과 9월에 임시직으로 일하면서 생긴 돈으로 그는 설문지 300장을 만들어 실태조사에 나섰다. 업주들의 위협과 방해로 주눅이 든 어린 노동자들이 겁을 내어 겨우 30장 남짓 회수됐다.

    시장에서 난리가 난 것은 물론이다. 그는 더 이상 평화시장에서 발을 붙일 수 없게 됐다. 그를 더욱 절망감에 몰아넣은 것은 근로자를 옹호하고 보호해주어야 할 감독관청이 오히려 업주를 두둔하고, 심지어 업주들과 결탁해 사실상 노동자를 감시·통제하고 나선다는 사실이었다. 1969년 가을 그는 두 달가량 공사판에 나가 일했다. 고된 육체노동을 하는 동안에라도 번민을 잊으려 했는지 모른다.

    1969년 겨울, 청년 전태일은 고독했다. 굶주림과 인간 이하의 대우, 지독한 좌절감으로 몸부림친 세월을 되돌아봤다.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지만 세상은 차가웠다. 그는 이 세상에서의 하루하루가 귀양살이를 하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생각을 파고 또 팠다. ‘혹시 나 자신이 잘못된 것일까?’

    “과거가 불우했다고 지금 과거를 원망한다면, 그 불우했던 과거는 영원히 너의 영역의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1969년 12월31일자 일기)

    전태일은 생각이 많은 젊은이였다. 자신의 과거를 소설 형식으로 구상하면서 수기를 쓰기도 했다. 극작 구상도 했다. 내용은 대개 사회의 구조악이 얼마나 파괴적이며 인간을 황폐화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이다시피 한 그의 눈에 비친 기업주는 차라리 죄의 ‘덩어리’ 같았다. 근로감독 관청도, 정치가도, 언론인도, 종교인도, 지식인도, 사회의 어떤 기구도 노동자에 대해서는 너무나 냉정하고 무관심했다.

    1969년 11월 전태일은 대통령에게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실상을 낱낱이 열거하면서 “이것도 이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까?” 하고 항의하고 싶었다. 그리고 “인간 최소한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탄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끝내 발송되지 않았다. 포기했을 것이다. 대통령이 자신과 같은 최하층 노동자의 절절한 요구를 귀담아들어줄 리 만무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경제개발 만능의 시대가 아닌가.

    1970년 초의 어느 글에서 전태일은 이런 구절을 남겼다. “업주들은 한 끼 점심값에 200원을 쓰면서 어린 직공들은 하루 세끼 밥값이 50원, 이건 인간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선생님, 여기 본능을 모르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저 빨리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는 생명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미생물이 아닌, 짐승이 아닌, 인간이 있습니다. …사회라는 기구는 그들 연소자를 사회의 거름으로 쓰고 있습니다.”

    1969년 가을부터 전태일은 일기장 도처에 ‘죽음’에 관한 기록과 흔적을 남겼다. 그해 11월에 쓴 일기는 마치 유언 같다.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뇌성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꺾어버린다고 해도…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1969년 12월31일자 일기에는 “올해와 같은 내년을 남기지 않기 위해 나는 결단코 투쟁하련다. 역사가 증명한다”고 써놓았다. 그 사이 전태일의 집은 7번 헐렸고 8번 다시 지어졌다. 1970년 4월에는 삼각산 임마누엘 수도원 신축 공사장에 막노동꾼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8월9일, 전태일은 마지막 결단을 내린 것 같다. 이때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오니….”

    ‘삼동회’에 찾아든 기적

    그해 9월 전태일은 다시 평화시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왕성사의 재단사가 됐다. 뿔뿔이 흩어졌던 바보회 회원들과 새로 몇 명이 더해져, 12명의 재단사가 다시 모였다. 그들은 모임의 이름을 ‘삼동회(三棟會)’로 정했다. 평화·동화·통일시장 세 상가 노동자의 모임이라는 의미였다. 전태일이 회장으로 뽑혔다.

    첫 사업으로 실태조사에 들어갔다. 바로 전해에 미처 돌리다 만 설문지를 다시 돌렸다. 설문지는 성공적으로 회수됐다. 회원들은 설문지에 없는 세세한 내용까지 조사했다. 평화시장 일대에 흩어져 있는 수백 개 작업장의 위치와 건평, 직공수, 환기장치, 상수도시설,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자료를 수집했다.

    1970년 10월6일, 그들은 노동청장 앞으로 ‘평화시장 피복 제조업 종업원 근로조건 개선 진정서’를 보냈다. 당시의 신문보도를 보면 평화시장 노동자 126명(회수된 설문지 숫자) 중 120명이 하루 14~16시간 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 96명이 폐결핵 등 기관지 계통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고, 102명은 신경성 위장병을 앓고 있었다. 또 126명 전원은 밝은 곳에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고, 안질을 앓고 있었다.

    시내의 한 석간신문에 평화시장의 이 참상이 처음으로 보도됐다. 전태일 등에게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난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삼동회 회원에게 꿈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들은 가진 돈을 다 털어 신문 몇백 장을 사서 평화시장 종업원들에게 팔았다. 신문은 금방 다 팔렸다. 자신들도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니! 청계 고가다리와 그 위를 달리던 차량이 딴 세상처럼 여겨지던 그들이었다. 그날 평화시장은 작은 축제 분위기였다.

    반면 업주 측과 노동당국은 난리가 났다. 그들로서는 아닌 밤중에 철없는 것들(?)에게 기습을 당한 기분이었음직하다. 노동청에서 고위층이 다녀가고, 평화시장주식회사에서는 급한 불을 끄고 보자는 생각에 금방이라도 진정서 내용을 다 들어줄 것처럼 공수표를 남발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업주와 노동당국의 태도가 달라졌다. 오히려 경찰 및 정보계통 사람들의 발길이 평화시장 일대에 잦아졌다. 재단사들에 대한 개별적인 회유가 이어지는가 하면, 어린 노동자들에 대한 협박과 설득이 옥죄어왔다. 전태일은 노동당국에 따졌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몇몇 불온분자의 꼬임에 철부지 노동자들이 잠깐 흔들렸을 뿐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고 낙관(?)하고 있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그 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전태일은 진정이나 호소가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아득한 ‘벽’을 느꼈다.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이 다시 모였다. 그들은 마지막 방법으로 실력대결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투쟁방법으로는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는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택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주일에 한번만이라도 햇빛을! ” “하루 16시간 노동이 웬 말이냐! ”등을 구호로 내세우기로 했다. “이번만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단코 물러서지 말고 싸우자”고 전태일은 비장한 각오를 내비쳤다. 목숨을 내던질 엄청난 결심이 담긴 것임을 그때까지 아무도 몰랐다.

    11월12일 아침, 전태일은 집을 나섰다. 그날따라 유난히 차림새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근로기준법 책을 한참 동안이나 찾았다. 이소선은 아들이 그 책을 찾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으나, 어찌할 수는 없었다. 전태일은 집을 나오면서 어머니에게 다음날 오후 1시 ‘거사장소’ 청계천 6가 국민은행 앞으로 나와 달라고 당부했다.

    이소선은 아들의 태도가 수상쩍게 느껴졌지만, 그것이 죽음을 각오한 아들의 모습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아들은 바로 다음날 “엄마, 배가 고프다”는 말을 남긴 채 영영 떠나버렸다.

    전태일
    윤무한

    1943년 대구 출생

    고려대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수료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경향신문 정경문화부장·부국장, 민주일보 편집국장

    1993~98년 대통령비서실 통치사료비서관, 강원대 사학과 초빙교수

    저서 및 논문 : ‘인물대한민국사’ ‘한국사 정립을 위한 새로운 시론’


    전태일, 그의 모란공원 묘역에는 조영래도 묻혔다. 전태일의 추모비도 조영래가 썼다. “지나가는 길손이여, 이 말 없는 주검 앞에 눈물을 뿌리지 말라. …다만 기억하고 또 다짐하라. 불길 속에 휩싸이며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 하던 그 피맺힌 울부짖음을.”

    전태일, 그리고 그가 그렇게 바라던 ‘대학생 친구’ 조영래. 이 둘의 유택은 지척에 있다. 전태일, 조영래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 민주노총이 생겼고, 노동자를 대변하는 정당도 생겼다. 전태일이 자신을 불태운 그 자리에는 그를 기념하는 거리가 생겨 전태일 반신상이 들어섰고, 거리에는 동판도 깔렸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한구석은 허전하다. 그가 부재하는 자리, 그가 부재하는 시대는 지금 과연 제 갈 길을 가고 있는가. 30년 전의 노동자들과 지금의 노동자들은 과연 어떻게 달라져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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