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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김수환 추기경 추모 특집

내가 겪은 ‘인간 김수환’

‘미사 예물’로 100만원 받고 조의금으로 100만원 내고

  • 구중서│문학평론가 kwangsanjsk@yahoo.co.kr│

내가 겪은 ‘인간 김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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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인간 김수환’

대학교 동창들과 함께한 김수환 추기경. 왼쪽 끝이 김수환 추기경, 오른쪽 끝이 지학순 주교.

어려운 시절, 추기경이 나서야 했던 사건은 셀 수 없이 많았다. 1974년 개헌청원 서명, 민청학련 사건과 지학순 주교의 투옥사건, 인혁당 공개재판 촉구, 1976년의 명동성당 3·1절 구국기도회 사건을 거쳐 1980년의 광주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문제의 해결과 민주화 추진 운동에서 김 추기경은 대열의 선두 또는 복판에 서 있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이러한 모든 일은 김수환 추기경이 정치활동에 취미가 있어서 간여한 것이 아니었다. 양심선언 사건으로 투옥된 지학순 주교 석방을 건의하느라고 박정희 대통령과 담판할 때 김 추기경은 말했다.

“사회정의 운동은 정치 쪽에서 잘해서 국민을 편하게 해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니까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간에 나는 가톨릭출판사 근무 외에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홍보이사도 맡으면서, 교회의 민주화운동 대열에 동참해 김 추기경과 연대하고 있었다.

신원 보증



그러던 중 시련이 또 찾아왔다. 1980년 여름에 나는 계엄포고령을 위반했다 하여 구속되고 서대문교도소 미결감에 투옥되었다. 계엄 포고령 위반이라니 마치 내가 꽤 과격한 행동이라도 저지른 것 같다. 그 혐의의 내용은 이러하다.

첫째로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경주집’이라는 추어탕 집에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간사회의가 열린 일이 있는데 거기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회의에서는 아무것도 결정한 일이 없었다.

둘째로 ‘지식인 선언’에 서명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 결혼식장에서 소설가 이호철씨가 내미는 백지에 내가 무심히 서명한 일이 있었다. 당시 육군소장 전두환이 본부장으로 있던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된 후 나는 그 ‘지식인 선언’의 내용을 처음 보았다. 최규하 내각 과도기 단축, 학원 자율화, 언론자유 등을 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뭐가 나쁘냐”고 내가 반문하자 수사관은 알겠다고 하더니 바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내가 구속영장 대기과정에서 종로서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김말룡 가톨릭 노동상담소장을 통해 내 영치금이라고 금일봉을 종로경찰서장에게 보냈다. 이날 신경림·조태일 시인과 내가 3층의 한 방으로 옮겨졌다. 나는 김 추기경으로부터 하사받은 돈을 가지고 이날 밤에 복도의 간수를 설득했다. 비밀리에 소주 두 병을 사다가 셋이서 파티를 열었다.

영장이 집행된 뒤에도 김 추기경은 나의 석방을 당국에 요구해 나와 신경림 시인이 함께 서대문교도소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 알게 된 일인데 당시에 김 추기경이 가톨릭교회 쪽의 오태순 ·장덕필 신부, 아피 여성 수도자 1인, 평신자 구중서, 가톨릭학생회원 7명이 부당하게 시국사범으로 구속되어 있으니 석방해줄 것을 당국에 요청했다고 한다. 이때 나는 뒤늦게 대학원 박사과정 시험에 합격해 있었는데, 일찍 8월 말경에 석방되지 못했으면 학위과정 입학이 취소될 뻔했다.

그 뒤 내가 대학의 전임 교수로 전직할 때에도 내 신원조회가 문제되자 김 추기경은 직접 신원 보증서를 쓰기도 했다.

“개인의 일에 어떻게 추기경님이 나서십니까. 저는 그렇게 못하겠습니다”하고 만류했지만 김수환 추기경은 “공자님도 밥은 먹어야 했다”고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가톨릭의대 신입생 선발에서 신체장애 학생 3명이 불합격되자 심사 교수들에게 간곡한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김 추기경은 “약자를 더 사랑한 그리스도의 정신을 생각해 재심을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했다. 그 장애 학생들은 결국 교수들의 재심을 통해 만장일치로 동의를 얻어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추기경의 손길을 기다리는 크고 작은 세상일들이 있었다. 피로할지라도 그는 그런 일들을 피하지 않았다.

긴 조문 행렬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1987년 6·10 민주항쟁을 마무리한 것이다. 반독재 시위 학생 300여 명이 명동성당 구내에서 엿새 동안 농성을 한 사건이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그들을 엄호하고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했다.

경찰의 진입을 막았고, 학생들에게는 돌과 화염병을 손에서 내려놓도록 했다. 그 결과 비폭력 항쟁의 명예로운 승리가 이루어졌고 이 대세가 6 ·29 선언을 통한 직선제 개헌으로 이어졌다.

여기까지가 역사상 김수환 추기경의 업적이다. 그 다음의 일들은 뒷세대의 사명이다.

인간은 아무리 위대한 이라도 늙어서 세상을 떠나야만 하는 유한한 존재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인의 역할이나 영향에 관계없이 당대의 중심 세대는 모든 일에서 책임을 지고 감당해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물며 지난 시대 20여 년에 걸쳐 엄혹한 군사독재의 벽을 무너뜨리는 어려운 일에 앞장을 서고 정신과 행동으로 큰 위상을 지녔던 이에 대해 소홀히 폄하하는 오류를 뒷세대가 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스스로 인간성의 결함을 드러내는 모습이며, 그러한 이들은 자기네의 당대에서 역사를 역으로 후퇴시키게 된다.

근래 이른바 노무현 정부 시대에 염증을 느낀 국민이 선거를 통해 집권정당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또 다른 혼란과 실망이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국민은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을 듣고 역사상 유례가 드문 긴 조문 행렬을 이루었다. 존경과 그리움이 대중의 가슴속에서 솟구쳐 오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역사의 정당한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자유와 책임의식에 바탕을 둔 도덕적인 힘에 의한 사회를 부지런히 형성해나아가야 할 것이다.

신동아 2009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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