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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 특별연재 /책으로 본 한국 현대인물사⑩

박현채

성장신화에 길항한 ‘민족경제론’의 우렁찬 목소리

  • 윤무한│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박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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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채

1965년 5월 인민혁명당 사건의 항소심인 고등법원에서 피고인들이 기립해 있다.

“한국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시작은 국민경제와 민주주의의 정치경제학으로서의 적극적인, 역사적 유산에 빚짐이 없이는 어렵다.”

아울러 그는 거대체제 속의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서의 민족개념’ 대신 국민경제의 내발적, 내포적 통합과 균형발전을 지향하면서 민족경제의 재구축, ‘시민사회론-시민정치론’과 동행할 수 있도록 재구성되는 민중적 민족경제론과 열린 민족주의론, 그리고 현대세계의 새로운 역사적 현실 및 사상 흐름과 호흡을 같이할 수 있는 새 정치경제학과 제도경제학에서 힘을 얻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파도를 헤쳐나가는 길을 모색하는 대안을 제시했다.

민족경제론은 한국경제의 외형적 지표가 크게 신장되고 신자유주의가 경제의 모든 논리를 집어삼켜버리는 시대에 과연 퇴색하고 말 것인가. ‘동향과 전망’ 2001년 봄호는 민족경제론에 대해 그 이론적 성패를 떠나서 박정희식 발전모델이라 할 수 있는 성장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적 전망을 내놓은 최초의 체계적 이론으로 평가했다.

박순성, 김균은 “민족경제론이 남한의 조국근대화론과 북한의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노선을 균형 있게 비판했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또 “민주적 시장과 계획의 조화, 시장과 공공영역의 공존, 그리고 민주적 통제 등의 경제이념을 내세움으로써 한국의 비판적 경제학자들에게 커다란 유산을 남겼다”고 말했다. 박영호는 민족경제론이 우리에게 남긴 일차적 과제는 남북으로 분단된 민족의 통일이고, 민족문제의 해결 없이는 세계화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박현채는 1960년대는 물론 70,80년대를 통해 경제학계 전체에 걸쳐 광범하게 영향을 준 우렁찬 목소리였음에 틀림없다.

민족문학 속에 자리잡은 민족경제



백낙청은 민족문학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에 힘입은 바 컸다고 했다. 한걸음 나아가 민족문학 자체의 일부로 그의 업적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며, 민족문학에 끼친 박현채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거론하고 나선 바 있다. 백낙청은 박현채의 글을 민족문학의 한 성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생각이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문학’의 범주를 옛사람들처럼 넓게 잡는다면, ‘민족경제’ 개념을 중심으로 수행되어온 박현채의 문필활동은 이 시대의 문학적 성과 속에 충분히 포함시킬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박현채란 ‘문패’를 달고 글을 발표하기가 어려웠던 게 시대적 분위기였다. 박현채는 그런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지식인의 실천적 삶을 계속했고, 여기에 대해 그를 아껴주는 무언의 동지적 감싸줌이 있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 박현채가 어떤 문예지에 기고한 글을 계기로 문단의 몇몇 친우와 후배들이 박현채를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으로 가입시켰고, 박현채 또한 그리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한다.

백낙청은 박현채의 글이 바로 우리 자신의 일로 느껴진 것이 명목상의 동료였다거나 누구나 정치경제학에 대한 학습을 해야 했던 당시의 풍조 때문은 아니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자립적 민족경제의 확립’을 논한 그의 글들이 폭넓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 가장 큰 이유는, 사회분석의 고전적 전통이 바야흐로 멸종위기에 처하고 부당한 체제에 대한 침묵과 굴종만이 강요되던 시기에, 온몸의 저항을 지속하면서 그때그때 필요하고 가능한 발성법을 찾아낸 것이 그의 문장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 선생이 자신의 첫 논문집이라 할 ‘민족경제론’을 어째서 ‘체계 없는 평론집’으로 세상에 내놓는가를 밝힌 머리말은 지금 읽어도 감동적인 명문이다.”(‘박현채선생회갑기념논문집’에서)

1979년 10·26사태 후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쳐 1987년 6월 민주화대투쟁이 일어날 때까지 한국사회에는 격랑의 파랑주의보가 발령됐다. 그 무렵부터 민주화운동은 한 단계 고양된 사회변혁운동의 와중에 있었다. 이에 앞서 1985년 ‘창작과비평’에 박현채는 ‘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이 평론은 당시 경제학계의 중심테마 중 하나였던 주변부 자본주의론과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비판하면서, 한국의 사회구성체가 기본적으로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규정했다.

이른바 ‘사회구성체(흔히 ‘社構體’로 명명) 논쟁’으로 명명된 이 논쟁의 불길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박현채 자신이 의도했든 않았든, 이론적 실천이 현실의 사회운동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지점과 맞부딪친 것이다. 그때 박현채는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 결코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고 논쟁을 격화시키는 기묘한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박현채는 모든 사회과학자에게 논쟁을 가능케 하는 화두와 공통적 쟁점을 던져 문제를 격화시키는 모호한 전선이자 점령해야 할 ‘성지’ 비슷한 위치였다.

“야, 나도 의료보험증 가졌다”

한길사는 1986년 창사 10주년을 맞아 ‘단재상’을 제정했다. 단재 신채호가 1936년 여순감옥에서 옥사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1987년 제2회 수상자로 박현채가 뽑혔다. ‘단재상’은 평생을 재야에서 ‘평론가’로만 살아온 그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빛나는 감사패였다. 시상식에서 그는 힘차게 수상소감을 밝혔다.

“민족경제론은 민주적 생존권의 확보와 발전이라는 민족주의적 요구 위에 서서 국민경제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민족경제의 주체적 발전과 그것에 따른 외국자본, 그리고 매판자본가와 상호관계를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박현채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강한 개성에 대해 자주 얘기한다. 1970년대에 박 선생을 처음 만난 내게 박 선생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박 선생이 평소 정장차림을 한 모습을 나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박 선생은 언제나 코르덴 옷이나 점퍼차림이었다. 생전의 박 선생은 상아 파이프를 삐뚜름하게 비껴 문 모습으로 내게 남아 있다. 각진 얼굴에 역사와 민족과 진보에 대해 바윗돌 같은 결의를 담은, 거칠 것 없는 야인이 박 선생의 원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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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무한│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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