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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 특별연재/책으로 본 한국 현대인물사-마지막회

김수환 추기경

우리 시대 ‘어른’의 성(聖)과 속(俗) 순례길

  • 윤무한│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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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당시 모습.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사회정의를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노동력 착취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범하기 쉬운 자본의 횡포다. 따라서 주교단은 강화본당 신부와 노동자들의 정당한 활동을 지지한다.”

이 성명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세상에 대해 한 거의 최초의 발언으로, 이후 가톨릭교회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생존권보장 요구에 적극 앞장섰다.

1968년 4월 그에게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주교가 된 지 2년밖에 안됐을 뿐만 아니라 주교단에서도 막내인 그를 교황청에서 대주교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서울대교구장에 앉혔다. ‘시골뜨기 주교’가 서울대교구장으로 발표되자, 교회를 비롯한 사회는 ‘상상하지도 못할 파격인사’라며 놀라워했다.

명동성당에서 열린 교구장 착좌식에서 원로사제들이 46세의 젊은 교구장에게 순명을 서약하는 모습은 일반인의 눈에 낯선 광경이었다. 김 교구장은 이들 원로사제들에게 더욱 몸을 낮추었다. 취임식의 미사 강론에서 그는 세상 속의 교회에 대한 자신의 뜻을 밝혔다.

“우리는 ‘너희들이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를 생활로써 증거해달라’고 하는 우리 사회의 요구를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교회는 모든 것을 바쳐서 사회에 봉사하는 ‘세상 속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서울대교구장 자리는 무겁고 힘든 짐으로 그를 압박했다. ‘어떻게 하면 이 자리를 하루라도 빨리 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의 뇌리를 한시도 떠난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바람과 달리 1969년 3월 교황 바오로 6세는 김수환 대주교를 전세계에서 가장 어린 추기경이자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했다. 추기경은 가톨릭교회에서 교황 다음의 고위 성직자다. 한국 교회에서 추기경이 탄생한 것은 한국 교회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가톨릭교회로서는 일대 경사였다. 그러나 김 추기경 개인에게는 ‘이제 정말 도망갈 길이 막힌 것’이었다.

과연 그 후의 세월을 통해 김 추기경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영광만이 아니었다. 아니 영광은 잠시였고, 고난의 길이 멀고 험난했다. 김 추기경은 1970~80년대로 이어지는 한국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상과 교회를 아울러 보살피고 지켜야 했다. 1970년대의 명동성당은 유신독재정권과 대결한 민주화운동의 완강하고 튼튼한 진지였다. 그러나 정권은 물론 교회 안팎에서도 교회가 정치문제에 지나치게 개입한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일었다.

“교회의 현실 참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부와 빚은 마찰의 원인이 마치 나에게 있는 것처럼 여기고 교황청에 투서성 고발편지를 보냈다. 정부당국에서도 여러 차례 교황청에 사람을 보내 나를 문책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교황청은 이런 정보사항을 수시로 나에게 귀띔해주었다.”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획책하던 1971년 성탄 자정미사에서 김 추기경은 박 정권에 대해 공개적으로 강경하게 비판했다. 이듬해인 1972년 8월 광복절을 기해서는 주교회의 의장 자격으로 시국성명을 발표, 정권을 공격했다.

“우리는 7·4남북공동성명이 전쟁수단을 영구히 포기하고 대화로써 조국통일을 달성하는 디딤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이것을 평화위장의 전쟁준비수단이나 권력정치의 기만전술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민족과 더불어 엄숙히 경고한다.”

여공 감싸 안은 어미닭

성명에서 우려한 것은 그해 10월17일 현실로 드러났다. 박 정권은 이날 이른바 10월 유신을 자행, 이후 민주주의를 압살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긴급조치가 발동되고 비상군법회의가 설치되는 등 초법적 헌정유린 속에서 인권과 민주주의는 조종(弔鐘)을 울렸다.

급기야 교회와 국가권력이 맞부딪치는 막다른 사태가 벌어졌다.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가톨릭 전국 각 교구에서는 시국기도회를 열고 유신정권을 규탄했다. 사제들이 십자가를 앞세우고 촛불행진을 하는 광경은 그 시절 국민에게 장엄하고 정의로운 저항권의 행사로 비쳤다. 이 사제들이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했다. 이들 사제단의 활동은 칼날 위를 걸어가는 아슬아슬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집단적인 기도요 고행이며, 십자가의 아픔이요, 하늘을 향한 성스러운 행진처럼 보였다. 추기경은 이들 사제단의 배후인물이라는 의혹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가톨릭교회는 이 시절 비록 내부적으로 갈등을 겪었지만, 교회 바깥으로부터는 동조와 공감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정의와 자유와 인권을 위해 박해받는 이들을 김 추기경은 가톨릭의 날개로 감싸 안았다. 그의 그늘, 그의 날개는 어미닭의 품과 같았다. 따뜻하고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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