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티븐 호킹은 자신의 간호사이던 일레인과 재혼했으나 결국 이혼했다.
뛰어난 과학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며 낙천적인 경우가 많다. 그 역시 그러했다. 아프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다행 아닌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는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몸이 성할 때 연구에 매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 시절 조정 선수로 활약한 쾌활한 청년이었다. ‘시한부 생명’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 타고난 낙천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호킹이 선택한 분야는 이론물리학 중 우주론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이 분야는 실험이 아니라 이론으로 연구하는 분야여서 몸이 조금 부자유스러워도 큰 문제가 없었다. 만약 그가 택한 분야가 천문학이나 실험물리학이었다면 그는 대학원을 중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루게릭병을 진단받았다고 해서 그의 몸이 금방 마비된 것은 아니다. 1962년부터 10년 가까이 그는 지팡이를 짚기는 했지만 자신의 발로 실험실과 기숙사를 오갔으며 말도 비교적 자유롭게 했다. 거기다 새로운 연인도 있었다. 발병 직후 파티에서 만난 제인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런던의 대학에 다니고 있던 제인은 주말마다 그를 만나러 케임브리지에 왔다. 그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었지만, 호킹은 특유의 낙천성으로, 제인은 굳은 신앙심으로 역경을 이겨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호킹은 3년 만에 순조롭게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케임브리지 대학 칼리지 중 하나인 곤빌 앤 키즈 칼리지의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스물 셋의 호킹과 스물한 살의 대학생 제인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호킹에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판단에 결혼을 서둘렀던 것이다.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홀에서 열린 결혼식은 신랑이 지팡이를 짚고 있다는 것만 빼면 여느 행복한 결혼식과 다르지 않았다.
대학원 친구들 중 가장 먼저 결혼한 호킹의 집은 주말이면 늘 친구들로 떠들썩했다. 1967년 두 사람의 첫아이인 로버트가 태어났다. 호킹은 스물다섯에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고, 새삼스레 삶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병의 진행은 기적적으로 더뎌지긴 했지만 아예 멈춘 것은 아니었다. 이즈음 호킹은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목발을 짚어야만 했다. 집의 1층 거실에서 벽에 몸을 기댄 채 2층 침실로 올라가는 데만 15분이 걸렸다. 그럼에도 그는 병의 진행에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의 정신은 온통 물리학 연구, 그중에서도 블랙홀에 쏠려 있었다.
사람들은 호킹이 그처럼 뛰어난 과학자라면 왜 여태 노벨상을 받지 못했는지 의아해한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노벨물리학상과 노벨화학상은 실험을 통해 연구 결과를 증명할 수 있는 업적에 주어진다.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조차 상대성이론이 아닌, 광전효과에 대한 연구로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런데 호킹이 연구한 분야는 우주물리학 중에서 우주의 기원인 빅뱅과 별의 최종적 상태인 블랙홀이다. 이 두 가지 모두 관측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호킹이 노벨상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케임브리지에 대한 애착
호킹을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로 끌어올린 연구는 케임브리지 대학 박사과정에 있을 때 시작됐다. 그가 대학원생이던 1960년대 중반 즈음 블랙홀, 즉 안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별의 마지막 상태에 대한 이론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블랙홀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는 과학자는 거의 없었으며 블랙홀은 과학이론이라기보다 공상과학소설에나 등장하는 개념으로 치부된 정도였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 방정식에 의하면, 우주는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고 항상 수축하거나 팽창한다. 호킹은 그동안 물리학자들이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일반상대성이론과 우주를 연관시키는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일반상대성이론에 의거해 블랙홀에 대한 방정식을 계산했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그의 연구 결과대로라면 블랙홀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만 하는 ‘검은 구멍’이 아니라 복사에너지를 방출하며 때로 폭발하기도 한다. ‘호킹 복사’라고 불리는 이 발견은 20세기 후반의 물리학 연구 중 가장 탁월한 것으로 손꼽힌다.
이어 그는 블랙홀과 우주의 태초 폭발, 즉 빅뱅을 연관짓는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최초의 우주는 큰 폭발과 함께 풍선처럼 팽창해가고 있는 상태다. 블랙홀의 폭발은 또 하나의 미니 우주의 시작, 즉 작은 빅뱅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호킹의 연구는 우주의 시작인 빅뱅과 별의 종말인 블랙홀이 같은 현상임을 밝혀낸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호킹은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을 하나로 묶어 우주의 시작에 대한 물리적 계산을 해내는, 그때까지 어떤 물리학자도 불가능하다고 본 시도를 성공적으로 완성했다. 호킹이라는 이름이 유명세를 탄 것은 이처럼 우주의 기원을 밝히는 거대하고도 철학적인 연구를 휠체어에 갇힌 그가 해냈다는 아이러니 때문이기도 하다. 호킹을 ‘아인슈타인의 후예’라고 부르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그는 일반상대성이론의 방정식에 의거해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그는 이 같은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32세에 영국 왕립협회 최연소 회원이 되었으며, 37세에는 탁월한 수학자에게 주어지는 케임브리지 ‘루카시안 석좌교수’에 임명되었다. 병의 진행이 점점 더 빨라져 이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게 됐지만, 병과 상관없이 그의 논문은 세계 과학자들의 탄성과 지지를 이끌어냈다. 세계 각지의 학회나 세미나, 대학들이 앞 다퉈 그를 초청했다. 혀와 입술이 많이 마비된 호킹은 학회에서 발표할 때마다 그의 이야기에 익숙한 조교를 대동해 통역을 부탁했다. 이즈음 호킹의 언어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영어가 아니라 ‘그저 웅얼거리는 리듬’ 정도로 들렸다.
30대 중반에 호킹은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의 반열에 올라 있어 미국의 어느 대학이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연구를 시작한 케임브리지 대학의 응용수학 및 이론물리학과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호킹은 현재까지 46년째 케임브리지에 살고 있다). 문제는 호킹이 대학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두 자녀 로버트와 루시의 학비와 자신을 위한 전담간호사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 연봉은 미국 유수 대학에 비하면 몇 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당시 제인은 언어학 박사학위를 끝내고 케임브리지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킹 곁에서 간호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만약 호킹의 병이 악화돼 더 이상 연구를 할 수 없게 된다면?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제인이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만약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이 희대의 천재는 요양원에 들어가 속절없이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터였다. 호킹도 제인도 그런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