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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한국의 괴짜들

‘글씨 수사관’ 구본진 법무연수원 교수

“범죄자의 글씨는 따로 있다. 글씨 오른쪽을 올려 쓰기만 해도 인생이 바뀔 것”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글씨 수사관’ 구본진 법무연수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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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수사관’ 구본진 법무연수원 교수

구 검사가 좋은 글씨의 전형으로 꼽은 독립운동가 부재 이상설의 글씨. 유려하면서도 힘 있는 필체에서 글쓴이의 강직한 기품이 느껴진다.

“검사 생활을 하면서 그전에도 몇 번쯤 한 생각이지요. 수사를 하다보면 사건 관계자들의 글씨를 많이 보게 돼요. 언제부턴가 글씨만 봐도 대충 사람의 성품이 그려졌습니다. 진실한지 거짓말에 능한지, 고집이 센지 유연한지, 소심한지 대범한지 등에 대한 정보를 모두 글씨가 말해주는 것 같았지요. 글씨를 본 뒤 사람을 만나면 제 예상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가끔은 사건이 미궁에 빠지면 피조사자들한테 자필진술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제 앞에서 감추고 있는 진짜 모습이 글씨를 통해 드러날 테니까요.”

선생의 이력을 추적하고 편지 내용도 해석해보다가 그는 무릎을 쳤다. 독립운동가의 간찰이야말로 최고의 수집품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평소 글씨에 대해 품고 있던 호기심을 푸는 길도 될 것 같았다.

그때 우연 같은 운명이 한 번 더 찾아왔다. 독립운동가의 간찰을 수집하기로 작정하고 처음 방문한 고서점에서 기려자 송상도의 글씨를 구한 것. 기려자는 경술국치 이후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항일지사의 행적을 기록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기려수필’ 덕분에 이름 없이 죽어간 많은 이가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았다.

“선생의 글씨를 사들고 돌아오면서, 내게도 선생처럼 전국을 찾아다니며 항일지사의 글씨를 수집해야 하는 운명이 주어진 건 아닐까 생각했지요.”

‘글씨 수사관’ 구본진 법무연수원 교수

안중근 의사의 서예작품. 각이 두드러지고 장중하며 높은 기상이 느껴진다.

‘운명’이라는 느낌은 낯설었지만 선명했다. 2000년, 햇수로 꼭 10년 전의 일이다.



포스 컬렉터

그날 이후 그는 인생을 두 배로 살았다. 낮에는 검사, 퇴근 후엔 글씨수집가였다. 전국의 이름난 고서점을 훑고 광복회 소식지 등에 ‘항일지사 글씨를 구한다’는 광고를 냈다. ‘좋은 간찰이 나왔다’는 연락만 받으면 달려갔다. 지방 고택에서 옛 문서 무더기가 발견됐다는 얘기를 듣고 쫓아내려간 적도 있다. 애를 먹이는 작품을 만나거나 헛걸음을 칠 때면 송상도 선생의 모습을 떠올렸다.

▼ 수집에 빠지면 대들보가 뽑혀나가는지도 모른다면서요.

“간찰의 경우는 좀 달라요. 그림이나 도자기 같은 것에 비하면 무척 싸거든요. 바인더 한 권에 수백점씩 보관할 수 있으니 보관비용도 거의 안 들고요.”

▼ 종종 김구 선생이나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몇 억원대에 팔렸다는 보도가 나오던데요.

“그건 아주 드문 경우지요. 제가 수집을 시작할 때만 해도 10만원이면 간찰 서너 점씩을 사곤 했습니다. 이상용 유인석 같이 꽤 알려진 분의 글씨도 수십만원 선에 구했고요. 즐거웠지요. 하지만 가끔은 세상이 이분들의 가치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합디다.”

▼ 수집을 하다보면 명망가의 글씨에도 욕심이 생기지 않나요.

“몇 년 전에 본 이육사 선생의 글씨가 그랬지요. 주머니 사정 때문에 바로 눈앞에서 놓쳤는데, 그 순간이 잊히지 않아 한동안은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났어요. 김구 선생의 글씨를 꼭 사고 싶어서 무리한 적도 있습니다. 최대로 생각했던 금액을 넘겨 700만원에 구입했지요. 하지만 그런 건 아주 드문 경우예요. 수집을 계속하려면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간찰과 잘 맞아요. 어떤 분의 글씨를 소장하느냐 못지않게 얼마나 많은 분의 글씨를 모으는지도 중요하니까요. 덜 유명한 분, 이제껏 세상에 한 번도 글씨가 공개되지 않은 분의 간찰을 찾아내는 것도 저한테는 굉장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는 매년 연봉의 10% 정도를 글씨 사는 데 쓴다. 그와 아내가 ‘취미생활’로 용인할 수 있는 상한선이다. 대신 열정과 노력만큼은 아끼지 않는다. 수준 높은 컬렉션을 만들기 위해 간찰을 구입할 때는 글쓴이의 삶과 시대 상황, 편지에 담긴 내용을 꼼꼼히 분석한다. 진품 여부를 판정하려고 종이 재료와 먹의 종류, 함께 나온 자료까지 살핀다. 말 그대로 ‘글씨 수사관’이다.

“한번은 일주일을 꼬박 들여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나온 간찰 1000여 장을 본 적이 있어요. 퀴퀴한 옛 종이 냄새를 맡으며 꼼꼼히 뒤졌는데 항일지사의 글씨는 한 점도 못 찾았지요. 보통 그렇습니다. 늘 쫓기는 생활을 했을 독립운동가들이 편지를 많이 썼을 리 없고, 어렵게 틈을 내 안부를 전해도 가족들이 없애버렸을 가능성이 높잖아요. 그 시대 글씨는 이래저래 참 구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한 작품 한 작품을 볼 때마다 더 공을 들이게 되지요.”

▼ 수천 장의 옛 문서 사이에서 독립운동가의 간찰을 찾는 건 웬만한 배경 지식이 없으면 엄두도 못 낼 일 같은데요.

“공부를 계속 하지요. 유명한 수집가였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수집에서 얻은 지식이 학교에서 얻은 것보다 더 많다’고 했어요. 저도 그 말에 100% 동의합니다. 간찰을 해독하려고 전서, 초서, 한학, 고문에 서예까지 익혔어요. 잘 모르는 부분이 나오면 고미술전문가들에게 묻고, 한문 번역이 막히면 한학자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가끔은 사법시험 볼 때도 공부를 이렇게까지는 안 한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의 서가를 본다. ‘중국역대서론’ ‘영남선유묵적’ ‘서예이론과 실기’ 등 글씨 관련 서적과 필적학, 필적심리학 등을 다룬 원서, 시대별 종이·인장 등에 대해 설명해놓은 각종 전문서까지 빼곡히 꽂혀 있다. 다른 칸에는 ‘기려수필’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등 독립운동 통사와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일대의 항일운동을 기록한 ‘장기고을 장기사람 이야기’류의 향토사, ‘항일투쟁가 왕재일의 생애와 사상’처럼 거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평전도 있다. 이런 그를 보고 소설 ‘영원한 제국’을 쓴 친구 이인화씨는 ‘포스 컬렉터’(force collector)라는 별명을 붙여줬다고 한다. 제법 마음에 들었던지 구 검사는 이 단어를 e메일 ID로 쓰고 있다.

▼ 서가를 보니 정말 ‘포스’가 느껴집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요. 하지만 10년쯤 되니까 이젠 간찰을 보면 무슨 내용인지, 어떤 종이를 썼는지, 내용이나 종이에 비춰볼 때 진품인지 아닌지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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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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