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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취재

공교육 살리기 모델 화산중학교

“엄마가 보고 있다. 열공하리라”

  •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공교육 살리기 모델 화산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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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육 살리기 모델 화산중학교

심의두 교장의 꿈은 화산중학교를 한국의 이튼스쿨로 키우는 것이다.

심의두가 사는 화산엔 중학교가 없었다. 50리 떨어진 완주중학교에 진학한 그는 왕복 100리 길을 매일 걸어서 통학했다. 새벽 5시 집에서 출발하면 오전 9시 학교에 도착했다. 그 시절 그는 중학교 설립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내 후배들한테는 이런 고생을 안 시키겠다’고 다짐하면서.

‘아, 참으세요’

그의 집안은 가난했다. 고등학교에 갈 여건이 안 됐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자립을 결심했다. 서울에 가서 성공해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부친은 고생길이 훤한 어린 자식에게 쌀 한 가마니 값을 주면서 ‘돈 떨어지면 돌아오라’고 했다. 생전 울지 않던 분이 처음으로 자식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부친은 “사람관계에서 신의를 꼭 지켜라”라고 당부했다. 심의두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졸업장을 따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고향을 떠났다.

서울에 올라온 지 사흘 만에 그는 가진 돈을 다 종로깡패들한테 빼앗겼다. 죽을 정도로 두들겨 맞고 종로에서 왕십리 자취방까지 기어갔다. 일주일 동안 굶고 난 뒤 죽으려고 한강에 갔다. 얼마나 자살하는 사람이 많은지, 강변에 ‘아, 참으세요’라는 팻말이 있었다. 막상 죽으려니 아홉살 때 여읜 어머니의 무덤과 아버지와 한 약속이 생각났다.

이를 악물고 발길을 돌린 심의두는 행상을 시작했다. 그와 함께 한집에서 자취하던 여성이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5000원을 빌려줬다. 그는 또 같이 상경한 고향친구 세 명에게 2000원씩 모두 6000원을 빌렸다. 비누 칫솔 치약 실 바늘 성냥 초 따위를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팔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컴퍼스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성실함과 신의를 인정받아 동료들보다 월급을 2배 더 받기도 했으나 컴퍼스를 밖으로 빼돌리는 동료들의 부정행위에 낙담해 회사를 그만뒀다. 이후 가정교사를 해서 학비를 해결했다.

고교를 졸업한 지 2년 후인 1959년 심의두는 군에 입대했다. 군 복무 중 전북대 분교가 부대 인근으로 옮겨왔다. 사단장은 하사관 이하의 군인이 입시에 합격하면 대학을 다닐 수 있도록 했다. 그 덕분에 그는 대학생이 됐다. 군인 신분이라 수업료도 면제받았다.

1963년 4월, 그는 만기제대했다. 그가 교육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그해 10월. 대학 4학년 2학기 때였다. 화산면사무소 회의실을 빌려 중학교에 가지 못한 청소년 7명을 대상으로 성인교육을 실시했다. 이것이 화산중의 기원이다. 그의 나이 28세 때였다.

공교육 살리기 모델 화산중학교

화산중 학생들은 졸업 전까지 유도2단을 따야 한다.

말이 학교지 교실이라고는 면사무소 회의실과 천막교실이 모두였다. 교실을 마련하는 게 급선무였다. 심 교장은 부친이 떼준 1976㎡(590평)의 땅을 개간해 두 배로 불렸다. 고추농사로 돈을 벌어 학교 부지를 샀다. 2년째가 되면서 1학년 52명, 2학년 33명으로 학생이 늘었다. 교사라고는 심 교장밖에 없었다. 전 과목을 맡아 주당 72시간까지 가르쳤다. 이듬해 6개 교실을 짓고 화산고등공민학교를 세웠다. 학교 시설을 늘리는 데 필요한 비용은 오로지 심 교장의 몫이었다. 그는 사슴과 오소리를 키우고 결혼반지와 재봉틀까지 팔아 재원을 마련했다. 1969년 12월 마침내 화산중이 탄생했다.

하지만 사재만으로 시골 사립중학교를 운영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공립보다 급여를 더 줘야 교사를 유치할 수 있었으나 도저히 그럴 형편이 안 됐다. 살길은 의무교육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1969년부터 1985년까지 문교부와 청와대를 줄기차게 찾았다. 청와대 교육정책자문위원을 맡으면서 주변의 도움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면담까지 했다. 그 시절 그는 새마을운동 강사로도 활약했다.

“짐승처럼 스스로 강해져야”

1985년 그는 전두환 대통령을 면담해 중학교 의무교육 실시를 건의했다. 이를 받아들인 전 대통령의 지시로 그해부터 중학교 의무교육과 더불어 사립학교 시설비 지원정책이 실시됐다. 전국 최초로 화산중을 비롯한 3개 중학교가 의무교육 시범학교로 선정됐다. 이후 중학교 의무교육은 점차 확대되어 2002년에 이르러 전국의 모든 중학교가 의무교육을 하게 됐다.

“세상에 태어나 내가 할 게 뭔가. 농촌을 중흥시키는 일을 나의 소임으로 여겨왔다. 농촌은 뿌리고 도시는 꽃이다. 꽃을 피우려면 뿌리가 단단해야 한다. 농촌을 살리려면 교육을 살려야 했다. 교육 때문에 다들 떠나기 때문이다.”

1995년 전북 교육위원에 선출된 심 교장은 교육위원회 의장과 전주중앙여자고등학교 교장을 거쳐 1999년 9월 화산중 교장으로 복귀했다.

외환위기로 나라가 휘청거리던 2000년 화산중은 창립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관내 7개 초등학교 중 6개가 폐교되면서 전교생이 54명으로 줄어든 것. 그해 입학한 학생이 17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때는 전교생이 900명에 달했던 학교가 그 지경이 된 것은 심각한 이농(離農)현상과 그에 따른 농촌인구의 급감 탓이었다.

이때부터 심 교장은 제2의 개교를 위해 뛰었다. 사재를 털어 현대식 기숙사와 체육관을 짓고 영재교육 프로그램 등 교과과정을 새로 편성해 학교의 경쟁력을 높였다. 외지 학생과 학부모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05년 5월 교육당국은 화산중을 국내 최초의 자율중학교로 지정했다. 이때부터 전국 각지의 우수한 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2006년 입학경쟁률이 10대 1에 달했고 학생 수는 300명을 넘어섰다.

심 교장의 꿈은 영국 지도자의 산실이라는 이튼스쿨처럼 화산중에서 우리 사회를 이끌어나갈 지도층 인사를 많이 배출하는 것이다. 화산중이 내건 지도자 교육의 3대 요체는 계승, 개혁, 창조다. 매일 새벽 6시면 학교에 나와 밤 12시에 퇴근한다는 심 교장은 화산중 아이들에게 여생의 모든 것을 걸고 있다.

“짐승처럼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일찍부터 부모와 떨어져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 어릴 때 습관을 어떻게 들이느냐가 중요하다. 영어 단어 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생각의 힘을 키우는 것이다. 생각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 아이들은 사랑과 칭찬을 먹고 자라난다. 나는 학생들에게 훈화할 때 늘 ‘화산중학교 지도자 여러분,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한다.”

신동아 200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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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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