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쏘나타 사회학

‘소나 타는 자동차’에서 ‘국민 중형차’로 우뚝 서다

  • 나성엽│동아일보 인터넷뉴스팀 기자 cpu@donga.com│

쏘나타 사회학

3/4
쏘나타 사회학

250만대째 쏘나타인 EF쏘나타 생산을 현대차 임직원들이 자축하고 있다.

쏘나타와 거품

대학생들도 한 달에 한두 번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과목당 20만~100만원씩을 챙기던 시절이었다. 특히 명문대생들 사이에서는 “졸업 안 하고 이대로 학교 다니면서 과외만 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나왔다. 필자가 알던 한 선배도 당시 월 500만원의 수입을 올리며 중형차를 끌고 다녔다. 유지비 걱정도 없었다. 휘발유가 L당 500원선이었으니.

취업도 참 쉬웠다. 웬만한 대학 4학년들은 직장을 찾아다니지 않았다. 직장이 그들을 찾아다녔다. 기업들은 ‘캠퍼스 리쿠르팅’이라는 이름으로 해당 대학 출신들을 학교로 보내 ‘스카우트 전쟁’을 벌였다. 4학년 1학기쯤 되면 3, 4개 기업의 합격증을 앞에 놓고 어느 직장을 택할지 고민했다.

일단 기업에 입사하면 연공서열에 따른 승진이 보장돼 있었고 입사자들에게 해외여행 특전을 제공하는 기업도 적지 않았다. 당시 신문에는 ‘실업률이 너무 낮아 기업들이 구인난을 겪고 있다’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실렸다.

하지만 풍요 속에서 쏘나타2와 쏘나타3를 몰고 다니던 사람들은 몰랐다. 그게 터지기 일보직전 풍선의 모습이었음을. 훅 불어내기 전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거품이었다는 사실을.



임창열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 1997년 12월3일 자정께 생방송된 기자회견에서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했다”고 발표 한 뒤 세상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쏘나타도 운명을 같이했다.

‘까칠한 시기에 태어난 에지 있는 디자인’

1998년 3월 4세대 쏘나타인 EF쏘나타가 탄생했다. “한국 기업 90%가 쓰러진다”는 소문으로 투자는 급속히 위축됐다. 1997년 11월 한때 400선 밑으로 무너진 코스피 지수는 좀처럼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같은 해 부도위기에 몰린 기아자동차는 현금 확보를 위해 크레도스, 세피아 등 신형 차량을 30% 할인판매하는 등 자동차시장도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EF쏘나타가 태어났다. EF쏘나타의 디자인은 돈이 있어도 돈 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 살벌한 사회 분위기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더욱 낮아진 차체와 넓어진 폭, 부드러움 속에 날카로움이 살아 있는 에지(edge) 디자인. 너무 튀었다.

한때 ‘국민 중형차’였던 쏘나타가 하루아침에 ‘돈 자랑’의 상징이 됐다. 쏘나타의 위축과 달리 같은 해 시판된 SM5는 빠르게 거리를 뒤덮었다. 삼성자동차의 SM5는 임직원 판매에 힘입어 하나둘 수요가 늘더니 어느새 쏘나타의 아성을 위협할 정도로 판매량이 증가했다.

디자인 측면에서 SM5는 EF쏘나타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미 구형이 된 닛산의 차체를 가져다 조립해 판매하는 수준이었던 SM5 초기모델은 그러나 길거리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보수적으로 조용히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지내길 원했던 중산층에게 어필했다.

SM5 열풍은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벤처 붐과 경기회복 분위기에 불씨가 살아나면서 쏘나타 수요도 되살아났다. 한풀이하듯, 돈이 생기자마자 사람들은 현대차 영업소로 달려가 그동안 눈으로만 보던 쏘나타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한때 ‘디자인이 너무 앞서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기도 했던 EF쏘나타의 디자인은 다시 업계 표준 자리로 되돌아왔다.

쏘나타의 ‘변종’

1998년 기아자동차를 인수 합병한 현대자동차는 두 회사의 차량을 같은 플랫폼으로 만들기로 하고 첫 번째 플랫폼 공유 차종으로 쏘나타를 찍었다. 쏘나타의 뼈대는 기아차로 넘겨져 외환위기 당시 할인 판매로 값어치가 떨어진 크레도스 후속모델 개발에 이용됐다.

2002년 기아자동차는 쏘나타 플랫폼의 크레도스 후속모델 ‘옵티마’를 내놓고 쏘나타보다 다소 싼값에 판매했다. 쏘나타의 페이스리프트 모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사실상 쏘나타와 같은 차량이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비싼 쏘나타를 선호했다.

똑같은 차량이지만 쏘나타는 되고 옵티마가 안된 이유로 전문가들은 메이커의 이미지를 꼽는다. 현대차에 합병돼 안정을 되찾았지만 소비자의 머릿속에 기아차는 기아차였다. 격동의 외환위기 시절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기아차의 이미지가 왠지 구입을 꺼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쏘나타가 태어나기 전 현대자동차의 모델명은 포니, 그라나다, 엑셀 등 같은 급이라도 생산하는 차량마다 이름이 달랐다. 수십 년간 이름을 지켜온 도요타의 캠리, 코롤라, 크라운, BMW 3시리즈 5시리즈와 같은 네이밍은 당시 한국 업체로서는 부담이었다.

품질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차명을 계승했다가는 소비자가 구형에 대한 ‘나쁜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가 포니, 그랜저 다음으로 이름을 계승한 차가 바로 ‘쏘나타’다. 현대자동차가 스스로 품질에 자신이 있었고, 매번 최고의 제품을 내놓고도 후속 모델 또한 최고의 제품이 나왔기 때문에 가능한 네이밍이다.

디자인을 위주로 해왔지만 사실 쏘나타의 진정한 가치는 파워트레인이다. 미쓰비시의 엔진을 사용해온 쏘나타3까지는 일본 기술이 품질을 보증했다. EF쏘나타에 와서 독자 개발한 델타엔진과 서스펜션은 일본 기술에 의존한다는 부담을 벗어던지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지금까지 정몽구 회장이 파워트레인 개발자들을 우대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EF쏘나타는 2001년 8월 뉴EF쏘나타로 페이스리프트하면서 쏘나타3와 유사한 헤드램프 디자인으로 인해 다시 한번 ‘남근 논쟁’에 휩싸였지만 변함없는 성능과 수준 높은 디자인으로 국내 중형차 1위 자리를 더욱 확고히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쏘나타의 위상은 어디까지나 국내용이었다.

3/4
나성엽│동아일보 인터넷뉴스팀 기자 cpu@donga.com│
목록 닫기

쏘나타 사회학

댓글 창 닫기

2023/04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