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7㎝에 71㎏이라니 루저라면 루저다. 작은 사람들은 키에 예민하다. 기자가 “166㎝요?”라고 확인하듯 되묻자 그가 큰일 날 소리한다는 듯 “166.7㎝입니다”라고 힘줘 말했다.
그는 태어날 때 2.8㎏의 미숙아였다.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그의 건강을 유별나게 챙기긴 했지만 작은 체격과 약한 체력은 어쩔 수 없었다. 운동을 아주 안 한 건 아니지만, 격투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릴 때 어머니의 권유로 탁구와 레슬링을 조금 하고 대학 다닐 때 여자사범이 예쁘다는 이유로 국술을 몇 개월간 배운 게 다다.
그는 울산에서 태어났지만 9세 때 부산으로 이사 가서 대학교까지 거기서 다녔다. 학교 다닐 때 불량 학생들에게 맞기도 하고 돈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는 “그때는 운동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전혀 안 할 정도로 나약했다. 그때 나를 때렸던 애들이 지금은 피한다”며 웃었다.
의대에 진학한 것은 생물과 화학을 좋아해서였다. 군의관으로 입대한 그는 제대 후 울산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았다. 개업은 2005년에 했다.
2004년 그가 입문할 때만 해도 주짓수는 한국에서 그다지 알려진 무술이 아니었다. 그는 울산 주짓수 동호회에 가입했다. 이들은 초등학교 체육실이나 태권도장을 빌려 운동을 했다. 학생과 직장인이 많아 주로 밤 시간을 이용했다. 회원들은 도장에서 무도를 연마하는 한편 1주일에 15㎞씩 구보를 하고 근력을 강화하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현재 동호회원 수는 50명 안팎. 최고령이지만 그의 체력은 젊은이 못지않다. 턱걸이를 한 번에 100개씩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매트에서 ‘막장 싸움’을 벌인다.
도장에서 훈련하다보면 자잘한 부상을 입게 마련이다. 눈 주변이 찢어지고 팔다리 관절을 다치곤 했다. 귀 모양도 흉하게 변했다. 아내가 극력 반대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간호사와 환자들은 의사가 특이한 운동을 한다고 그저 신기해했지만. 그는 큰 시합에 나갈 때는 아내에게 비밀로 했다. 부상을 당하면 자동차 운전하다가 다쳤다고 둘러댔다. 120㎏의 거구 파트너와 훈련하다 갈비뼈가 나간 적도 있다. 요즘은 아내의 격려가 큰 힘이 되고 있다. 부부는 시간 날 때마다 태화강변을 걷는다. 7~8㎞ 걸으면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오줌똥 싸는 기분이었다”

주짓수 동호회 울산파이트짐 동료들과 함께. 오른쪽 끝에서 두 번째가 김정훈씨.
“주짓수는 단지 보여주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증명하는 무술입니다. 그래서 시합에 참가했습니다.”
대전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열린 X-FIGHTER 대회가 그의 데뷔무대였다. 경기시간은 밤 10시 반. 병원 근무를 빼먹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울산시티병원에서 퇴근하자마자 대전으로 차를 몰았다. 이 경기에서 그는 상대의 길로틴 초크(guillotine choke)에 걸려 2분45초 만에 패하고 말았다. 길로틴 초크는 상대의 머리를 겨드랑이 사이에 끼운 상태에서 위팔로 상대의 목을 감아 조르는 공격이다. 상대는 그보다 15세 어린 20대 초반의 힘 좋은 젊은이였다. 그는 경기운영 미숙과 겁먹은 것, 두 가지를 패인으로 꼽았다.
2006년과 2007년엔 한국브라질리언주짓수대회에 출전해 동메달을 따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출전선수도 적었고 한 번 이기고 동메달을 땄던 것”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2008년 1월 제1회 슈토아마이종격투기대회에서 그는 출혈에 따른 TKO패를 당했다. 이때 앞니 하나가 부러졌다. 이 대회 제5회 때도 나갔다가 판정패했다.
2009년 10월에는 제10회 슈토아마이종격투기대회에 나가 스페셜 매치를 치렀다. 스페셜 매치로 진행된 것은 대회 최고령 선수와 최연소 선수의 대결이었기 때문. 최고령은 그였고 최연소는 고등학생이었다. 그는 어느 대회에서든 늘 최고령 선수였다. 5분 2라운드로 치러진 이 경기에서 그는 무승부를 기록했다.
대회 성적만 놓고 보면 자질이 그다지 특출해 보이진 않는다. 이런 지적에 대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길로틴 초크 패-TKO패-판정패-무승부로 경기 내용이 점차 좋아지고 있다”며 “요즘 타격(기)을 보완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좋아질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