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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비화

냉전 붕괴 막후의 ‘레이건 밀사’ 수전 매시

KGB채널 통해 미소 정상회담 중재한 이류 역사학자의 숨은 활약

  • 최원기 │국제문제 저술가 brent1@naver.com

냉전 붕괴 막후의 ‘레이건 밀사’ 수전 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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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임박했다”

냉전 붕괴 막후의 ‘레이건 밀사’ 수전 매시

냉전 말기 수전 매시의 역할을 보여주는 사진들. 1 레이건 대통령과의 집무실 대화 2 레이건 대통령 부부와의 식사 3 고르바초프 서기장과의 만남.

10년 만에 소련행 비자를 손에 넣었지만 매시의 모스크바 방문은 순탄치 않았다. 그가 소련행 비행기에 오르기 며칠 전 발생한 대한항공 KAL 007기 격추사건 때문이었다. 미국인 61명을 포함해 승객 269명이 사망하자 레이건은 소련을 강력히 비난했다. 안드로포프도 이 사건이 ‘CIA의 교묘한 자작극’이라며 맞받아쳤다. 게다가 국제항공노조가 소련에 대한 운항을 거부해 매시는 파리로 날아가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다.

1983년 9월 모스크바에 도착한 매시가 만난 사람은 ‘미국-캐나다연구소’의 라도미르 보다노프 부소장이었다. 부소장은 위장직함일 뿐 보다노프는 실제로는 KGB의 핵심간부였다. 당시 모스크바에서 미국-캐나다연구소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원래 미소 관계를 담당하는 소련 측 라인은 외무성과 워싱턴 주재 소련대사관 라인이었다. 당시 소련 대사는 아나톨리 도브리닌이었지만, 1981년 레이건 취임을 계기로 외무성-도브리닌 라인은 급격히 힘을 잃었다. 새 정부의 등장과 함께 도브리닌의 백악관 접근이 어렵게 된 때문이었다. 그러자 KGB 출신으로 서기장 자리에 오른 안드로포프는 KGB와 미국-캐나다연구소에 힘을 실어준다.

이날 미국-캐나다연구소에서 미국에서 온 이류 러시아 전문가인 매시를 만난 보다노프의 첫마디는 “전쟁이 임박했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실제로 ‘전쟁이 임박했다’고 믿고 있었다.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묘사했다. 또 소련과의 협상 채널을 닫고 군비증강을 시도했다. 레이건 집권 1기에는 단 한 번도 소련과 전략무기 협상이 이뤄지지 않았다. 또 미국은 유럽에 신형 퍼싱미사일을 배치했는데, 이는 소련을 7분 안에 공격할 수 있는 무기체계였다.

여기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배치된 소련의 스파이도 미국의 ‘임박한 공격’에 대한 정보보고를 연신 모스크바에 보내고 있었다. 뒤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시 NATO에 파견된 KGB 지부장 올레그 고디프스키는 이미 영국 정보기관인 MI6에 포섭된 이중간첩이었다. 이 무렵 레이건 행정부는 핵무기 통제와 관련한 NATO 가입국들의 지휘체계를 점검하는 ‘아벨아처83(Abel Archer 83)’이라는 군사훈련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디프스키는 이와 관련해 ‘핵무기 지휘점검은 곧 핵 선제공격 준비’로 해석한 보고서를 모스크바에 날렸다. 훈련과정에서 NATO가 가상의 군사력을 이동시키고, 통신암호를 바꾸고, 비상수준을 격상시키자 고디프스키는 본국에 ‘미국의 핵 선제공격이 임박했다’는 정보보고를 올리기에 이른다.



사실 소련이 ‘전쟁이 임박했다’고 믿고 있다는 매시의 전언은 레이건에게는 새로운 내용이 아니었다. CIA는 이미 모스크바의 그 같은 동향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CIA 내부에는 그 정보의 해석을 놓고 두 갈래의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소련이 대미 평화공세를 위해 그 같은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스크바가 진짜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이었다.

매시로부터 소련 수뇌부의 ‘전쟁 공포’에 대해 전해 들은 레이건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레이건의 상식으로는 소련이 미국의 선제공격을 겁내고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레이건은 자신의 안보보좌관인 로버트 맥팔레인을 불러 “소련이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매시의 전언은 효과가 있었다. 레이건은 그해 12월 자신의 별장인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에서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면서 조지 슐츠 국무장관을 조용히 불러 “소련 수뇌부와 새로운 대화채널을 열라”고 지시하게 된다.

21회의 면담

이 과정에서 백악관 NSC는 수전 매시를 레이건 대통령의 ‘비공식 밀사’로 쓰기로 결정했다. 맥팔레인 보좌관은 매시에게 “모스크바에 가서 문화교류를 타진하라”고 지시했다. 백악관이 매시를 활용하기로 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선 매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민간 러시아 전문가였다. 따라서 소련이 미국의 제안을 거부하더라도 백악관으로서는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게다가 매시는 백악관과 크렘린 사이의 직접 대화채널을 개설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당시의 대화채널은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과 도브리닌 대사가 독점하고 있는 상태였고, 따라서 이 채널을 이용하지 않을 경우 외교적 결례라는 소련 측 항의를 피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매시는 기존의 채널을 뛰어넘어 크렘린 수뇌부와 직접 선이 닿을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매시는 레이건의 ‘소련 가정교사’ 역할도 수행했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딱딱한 정치연설보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즐겼던 레이건은 안보 분야에서도 끊임없이 ‘이야기’를 찾았고, 매시가 바로 그 적격이었다. 예를 들어 레닌그라드 사람이 러시아를 언급할 때는 ‘우리’라고 하지만 소비에트와 공산당을 언급할 때는 ‘걔네들’이라고 하더라는 식이었다. 레이건이 소련과의 핵 협상에서 애용한 ‘믿어라 그러나 검증하라’는 러시아 속담 역시 매시가 그에게 귀띔해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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