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대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해인사 풍경
절집 숲은 누구에게나 개방돼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경쟁을 유발하지 않는다. 내가 풍광의 아름다움을 즐긴다고 해서 남에게 돌아갈 즐거움이 줄어들지 않는다. 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과 달리 내가 만족한다고 해서 이웃과 친구가 배 아플 일도 없다. 이런 점이 바로 생태 소비, 자연 소비의 특성이다. 따라서 덜 소비하고, 덜 훼손하며, 덜 폐기해야 하는 생태환경의 시대에 절집 숲은 인간과 자연의 상생을 훈련하는 멋진 실습장이 될 수 있다.
법보사찰이 끌어안은 국보급 숲
해인사는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화상이 서기 802년에 창건한 가람이다. 해인사 창건기는 신라 애장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 자리에 최초의 절집이 세워졌다고 밝히고 있다. 해인사는 한국의 3대 사찰로 일컬어지는데, 부처의 불법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법보사찰이기 때문에 얻은 명예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삼보사찰은 법보사찰 해인사와 함께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불보사찰)와 수많은 국사를 배출하여 승맥을 잇고 있는 송광사(승보사찰)를 일컫는 별칭이다. 해인사의 위상은 팔만대장경판과 그 판각을 보관한 장경판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도 한국 불교의 성지라는 위상에 걸맞게, 해인사는 국보와 보물 등 70여 점의 귀중한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귀중한 국보·보물급 문화재와 함께 해인사가 소유한 산림면적(3253ha)도 상상 이상으로 넓다. 해인사가 이처럼 넓은 산림을 보유하게 된 사연은 희랑대사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신라 말기에 희랑대사가 왕건의 목숨을 구해준 공덕을 보답하고자, 고려를 건국한 후 태조가 가야산 일대의 모든 산림을 해인사에 귀속시켰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렇게 넓은 절집 숲에서 과연 어느 곳을 먼저 둘러보는 것이 좋을까? 시간이 허락하면 매표소에서 홍류동계곡을 따라 소나무가 가득한 4km의 길을 걷거나, 동서쪽에 자리 잡은 산내 여러 암자를 탐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물론 건각이라면 가야산을 오르며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시간을 낼 수 없다면 먼저 경내를 둘러보고, 동편의 지족암과 희랑대와 백련암의 숲길을 걸은 후, 농산정의 솔밭을 찾는 순서를 권하고 싶다. 그럴 만한 시간도 없다면, 일주문에서 봉황문에 이르는 숲길을 걸은 후, 장경판전 뒤편의 솔숲을 찾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1. 경내 숲
1) 일주문에서 봉황문에 이르는 진입로 숲
일명 불이문(不二門)이라고 하는 일주문에 이르면, 우리 앞에 새로운 경험이 기다리고 있다. 고개를 뒤로 젖히지 않고는 한눈에 넣을 수 없는 장대한 나무들로 가득한 숲이 우리를 맞이한다. 일주문에서 봉황문에 이르는 길 주변의 숲은 1000년 수도 도량의 역사를 그 자태로 뽐내려는 듯 당당하다. 양 길가에 선 아름드리 전나무와 회화나무, 느티나무는 평소 하찮게 보아오던 나무들이 아니다. 오히려 신성함을 갖춘 장엄한 모습이다.
자연이 연출하는 장대함은 우리 각자의 행동거지를 조심스럽게 만들고 긴장감을 갖게 한다. 또한 인간이 얼마나 왜소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확인시킨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종교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숲이 내뿜는 세월의 무게와 신성한 기운을 직접 체험하면 흐트러진 몸가짐을 바로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힐 수밖에 없다. 별로 길지 않은 이 숲길에서 우리는 어느덧 수도자로 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이 숲이 바로 선종(禪宗)의 정원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더불어 봉황문의 현판에 걸린 ‘해인총림’의 의미를 가슴 깊이 되새길 여유도 누린다. 이처럼 숲은 위대한 종교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 됨됨이를 바꾸는 스승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