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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괴짜들 ⑥

대한민국 최고 술꾼 허시명

“달착지근하고 쌉싸래하고 시곰새곰한 술맛에 빠진 인생”

  • 송화선│동아일보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대한민국 최고 술꾼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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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돌아오다 아무래도 후회할 거 같아 차를 돌려 찾아갔어요. 딱 한 병만 팔라고 졸랐지만 끝내 거절당했죠. 파는 술이 아니라고 하기에 그럼 반 병만이라도 달라고 졸랐어요. 간신히 반 병을 받아들고 돌아오면서 소줏병이 작은 걸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 그렇게 좋은 술을 왜 팔지 않고 꼭꼭 숨겨두고 있는 거죠?

“길고 험악했던 밀주 단속의 역사가 영향을 미쳤겠죠. 사실 우리나라처럼 술 문화가 풍성했던 나라는 세계에 없을 겁니다. 몇 대만 거슬러가도 집집마다 제사와 집안 경조사에 쓸 술을 직접 빚었잖아요. 전국 곳곳에 수많은 명주(名酒)가 있었죠. 그런데 일제강점기의 밀주단속법, 박정희 정부 때의 양곡관리법(쌀로는 술을 빚을 수 없게 한 법)으로 이 술들이 고스란히 비주(秘酒)가 된 겁니다.”

한평생 술을 빚던 할머니, 어머니가 단속반에 고초당하는 걸 보며 후손들은 대부분 술 빚기를 포기하거나 초야로 숨어들었다. 전국 방방곡곡 이름난 술을 찾아다니다 그렇게 수십년 숨어 있던 술을 만나면 예사로 마실 수 없었다. 눈으로 마시고, 코로 마시고, 혀로 마시고, 목구멍으로 마시고, 종국에는 머리로 마셨다. 한 모금의 술이 이야기가 되어 흘러나올 때까지, 오감을 오직 술에만 집중했다. 그의 독특한 주도는 이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는 술을 마실 때마다 그 맛과 향에 꼭 맞는 표현을 떠올리려 애쓴다. 전남 태인 죽력고의 색은 “연하고 투명한 쑥빛이 황홀하다”고 한다. 이 술의 향에 대한 표현은 더욱 주옥같다. “강렬한 알코올 향 사이로 쇳내 같고 잿내 같은 기운이 스며 나오는데 그 향이 마치 폭풍에 휩쓸린 대숲 소리처럼 맹렬하다.”



그는 죽력고를 머금으며 대숲을 느낀다. 그 공간의 느낌이 술맛을 극대화한다.

리쉬부르, 백화주

그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한때 큰 인기를 모았던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이 떠올랐다. 프랑스 와인 ‘리쉬부르’를 찬미하는 대목이다. 주인공은 이 와인 향을 맡는 순간 풀꽃으로 가득 찬 드넓은 평원에 선 듯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글라스를 돌려 공기와 만나면 향긋하게 화려한 향이 비강을 간질인다. …호화로운 꽃다발을 건네받는 듯한 느낌. 마치 백가지 꽃향기를 모아놓은 듯한….”

책 속에 펼쳐진 평화로운 꽃밭 풍경을 보며 “나도 이 와인을 맛보고 싶다”고 진심으로 바란 기억이 난다. 한국에도 이런 술이 있다는 건 허씨를 통해 처음 알았다. 전북 김제시 김종회씨 댁에서 빚는 백화주(百花酒)다. 그는 “엷은 콜라빛 술을 따르는 순간 뭉쳐놓은 꽃처럼 진한 향이 배어나왔다”고 했다.

이 술 안에는 꼭 100종류의 꽃이 들어 있다. 모란 등꽃 절굿대꽃 패랭이꽃 때죽나무꽃 도장나무꽃 산딸나무꽃 백굴채 자운영 흰철쭉 댑싸리꽃 수국 인삼 층층나무꽃 갓꽃 후박꽃 아카시꽃 민들레 당귀 철쭉 병꽃나무꽃 고들빼기 찔레꽃 장미 토끼풀꽃 작약 꽃잔디 수영꽃…. 다 헤아리기도 힘든 이 꽃들은 모두 전북 김제의 산과 들에서 피어나는 것들이다. 김씨 가족은 매년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산천을 헤매며 꽃을 모은다. 수대째 해온 일이다. 이 술이 품고 있는 100종류 꽃향기를 맡으려면 김씨 가족처럼 정성을 다해 술잔을 들어야 한다. 허씨는 이 술도 석 잔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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