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호

최초 북파공작대 ‘호림부대’의 비극적 운명

  • 오세영│역사작가, ‘베니스의 개성상인’ 저자│

    입력2010-04-29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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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북파공작대 ‘호림부대’의 비극적 운명

    북파 20여 년 만에 호림부대 생존자들이 국방부로부터 정식으로 동료들의 전사통지서를 받았다고 전한 ‘동아일보’ 1970년 7월25일자.

    1949년 6월29일.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산자락을 한 무리의 무장군인들이 소리를 죽이고 전진하고 있었다. 250여 명에 달하는 적지 않은 인원이다. 이슬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 꽤나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북한 인민군 복장에 일본군이 남기고 간 99식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어둠 속을 조심스레 전진하는 사이에 먼동이 텄고 비도 그치면서 산봉우리의 윤곽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산봉이군.”

    일행 중 누군가 중얼거렸다. 고산봉은 38선 너머 300m 지점에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미 38선을 넘었다는 말이 된다. 무장군인들의 얼굴에 일제히 긴장의 빛이 서렸다.

    “정지! 잠시 휴식한다!”

    지휘관이 지시를 내리자 38선 이북으로 침투한 무장군인들은 되는대로 주저앉으며 휴식에 들어갔다.



    북파공작원들을 소재로 한 영화가 상영되면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었던 북파공작원들의 실상이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공작원이라면 흔히 북쪽에서 파견한 간첩이나 무장공비가 연상되지만, 오는 사람이 있으면 가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어서 남쪽에서 북파했던 공작원도 상당수 있었다.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진 실미도 북파 특공대는 청와대 기습을 노리고 남파됐던 북한의 124부대에 대항해 조직된 부대였다.

    북파공작대의 뿌리는 의외로 깊다. 6·25전쟁 중에는 미군 정보기관이 주도한 켈로부대(KLO)와 북한의 반공인사들이 주축이 된 구월산유격대 등이 북한에 침투해 후방을 교란했고, 휴전 후에는 육군첩보부대에서 관할하는 HID가 대북공작을 주도했다. 그렇지만 최초의 북파공작대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9년 6월29일 38선을 넘은 호림부대(虎林部隊)다. 격전 끝에 대원 대다수를 잃은 채 세인의 기억에서 잊혀간 호림부대. 그들은 무엇 때문에 위험한 임무를 띠고 38선을 넘었을까.

    ‘너희가 내려오면 우린 올라간다’

    6·25전쟁의 공식적인 시작은 1950년이지만, 전쟁은 사실상 1949년에 이미 시작됐다. 광복은 분단을 낳았고 남과 북은 끝내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1948년에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완전히 갈라서고 말았다. 이후 남과 북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38선에서는 크고 작은 충돌이 자주 벌어졌다.

    남한은 북한이 1949년 1월부터 10월까지 563회에 걸쳐서 모두 7만명의 병력을 남파시켰다고 발표했다. 그중 4214명을 사살했고 국군은 320명이 전사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북한도 선전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같은 기간에 남한이 432회에 걸쳐 4만9000명을 북파하는 도발을 자행했고, 남한 비행기가 71회나 북한 영공을 침입했으며, 남한의 해군 함정도 42차례에 걸쳐 북한 영해를 침범했다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양쪽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남과 북은 매일 평균 1.5회가량 교전을 벌였고 날마다 3.7명이 전사한 셈이다. 가히 전시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는 상황이었다.

    남과 북은 그렇게 극렬하게 대립했지만 내부 문제에서는 차이를 보였다. 북한은 일사천리로 노동당의 일당독재 체제를 구축해갔지만 대한민국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남로당은 여전히 활개를 쳤고, 군대도 반란에 동조하는 형편이었다. 과연 신생 대한민국은 안팎의 위기를 무사히 극복할 수 있을지,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여수·순천10·19사건이 진압되면서 사태는 조금씩 수습되기 시작했다. 남로당은 와해됐고 지리산과 태백산 일대에서 준동하던 빨치산도 대부분 토벌됐다. 여기에 유엔이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하면서 국제사회에서의 지위도 탄탄해졌다. 신생 대한민국은 한 고비를 넘긴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반대로 주변 정세는 북한에도 고무적이었다. 국민당이 대만으로 밀려나고 중국대륙이 공산화되면서 배후가 든든해진 것이다.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핵무기는 이제 더 이상 미국만의 것이 아니었다. 칼을 뽑으면 휘두르고 싶고, 말을 타면 경마를 잡히고 싶은 법이다. 최악의 상황을 극복한 남과 주변 여건이 유리해진 북은 서로 상대방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자연히 38선에서 충돌이 잦아졌고 규모도 커졌다. 본격적인 충돌은 1948년 11월4일 180여 명의 북한 인민유격대가 오대산으로 침투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패주 중인 여순반란사건 패잔병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서둘러 남파된 이들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장비도 부실했기 때문에 출동한 군경에 의해 쉽게 토벌됐다.

    그러나 1949년에 접어들자 상황이 달라졌다. 북한은 6월1일 400여 명의 대규모 인민유격대를 백두대간을 통해 남파시켰다. 국군 8사단이 급히 출동해서 토벌에 나섰지만 100여 명은 끝내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갔다. 남파 목적은 지역 공비들과 합류해 산간 오지의 주민들을 모아 해방구를 설치하고 장기투쟁을 꾀할 목적이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이 소지한 위조지폐는 도시로도 침투해 지하당을 조직하고 남한 경제를 교란할 목적도 지니고 있었음을 시사했다. 이전의 우발적인 충돌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남파였다.

    남한 당국을 더욱 긴장시킨 것은 무장유격대의 남파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사실이었다. 북한은 평양 인근의 강동정치학원에서 월북자들을 대상으로 남파유격대원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너희가 내려오면 우리도 올라간다.’ 남측 군 당국은 북측의 인민유격대에 상응하는 무장유격대를 조직하기로 했다. 최초의 북파공작대인 호림부대는 그렇게 해서 탄생한다.

    속속들이 공개된 창설 소식

    최초 북파공작대 ‘호림부대’의 비극적 운명

    1949년 8월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호림부대 생포대원들에 대한 재판 장면. 북한이 촬영한 필름을 6·25전쟁 당시 미군이 노획한 것이다.

    호림부대는 서북청년단을 주축으로 국방부 산하 유격부대로 창설됐다. 서북청년단은 공산당의 학정을 피해 월남한 평안도 청년들이 구성한 단체인데, 흔히 평안도 사람들의 기질을 맹호출림(猛虎出林)이라고 하는 데서 부대의 명칭을 호림부대로 정했다고 한다.

    호림부대는 1947년 7월에 서북청년단 영동지구본부가 중심이 되어 창설한 계림공작대(鷄林工作隊)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부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방부 제4국 소속 동해특별대(東海特別隊)로 개편됐다. 사설 군사단체에서 국방부의 후원을 받는 준군사단체로 승격한 셈이다. 이범석 국방부 장관은 동해공작대에 큰 기대를 걸고 대원 150여 명을 선발해 3개월간 특수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할 방침으로 창설됐던 동해공작대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남과 북의 충돌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한 미 군사고문단의 압력으로 국방부 제4국이 해체되면서 동해특별대도 함께 해체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인민유격대 남파가 이어지는 마당에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군 당국은 동해공작대의 소속을 1949년 2월25일자로 국방부에서 육군으로 이관시키고 명칭도 호림부대로 바꿨다. 마침내 월남청년들의 사설 군사단체가 국방부 관련단체를 거쳐 대한민국 육군 소속 북파공작대로 탈바꿈한 것이다. 소속이 육군으로 이관됐다고 하지만 호림부대는 정식으로 육군에 편제된 부대는 아니었다. 호림부대원들은 대북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환하면 그때 정식 군인이 되는 조건부 신분이었다. 그 때문에 나중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생환한 호림부대원들은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억울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1949년 2월28일에 대구로 이동한 호림부대원들은 18연대에서 기본 군사훈련을 받았다. 지휘관은 정보국 특무과장 한왕룡 소령. 그곳에서 기본 훈련을 끝낸 호림부대원들은 수원의 육군수색학교로 이동해서 본격적인 유격교육을 받았다. 당시 교관 이희성 소위는 먼 훗날인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훈련을 마친 호림부대원들은 경상남도 거제도와 경상북도로 이동해 그곳 지방 게릴라 토벌에 투입됐다. 일종의 실전경험이었던 셈이다. 토벌전을 마친 호림부대는 5월25일 서울로 귀환해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의 사열을 받았다. 당시 신문들은 국방부 제2국 소속의 호림부대 대원 557명이 총리의 사열을 받았는데 이들의 지휘계통은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에서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을 거쳐 정보과 5과장 한왕룡 소령으로 이어진다고 보도했다. 선전효과를 위해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고 매스컴까지 동원한 것. 이는 기밀을 엄수해야 할 북파공작대에는 큰 패착이었고, 정부와 군 수뇌부의 안일한 판단은 나중에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최초의 북파공작대인 호림부대가 출발부터 잉태하고 있던 비극의 씨앗이다.

    그런데 신문에 보도된 지휘계통은 사실과 조금 다르다. 557명이라는 숫자도 정확하지 않았다. 북파된 호림부대원의 총인원은 동해특별대를 모체로 하는 5대대와 오대산유격대를 모체로 하는 6대대를 합쳐 252명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호림부대에는 이들 5대대와 6대대 외에 2대대와 3대대의 두 개 대대가 더 있었다. 2대대는 서부전선을 맡고 있었고 3대대는 5대대와 6대대를 지원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신문이 557명이라고 보도한 것은 2,3대대원까지 전부 포함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북한은 실제로 북파된 인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숙군작업을 통해 남로당원들이 대거 군에서 축출됐지만, 그래도 여전히 암약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기에 정확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시작부터 비극의 씨앗을 안고 있던 호림부대 5대대와 6대대 대원들은 1949년 6월23일에 서울을 출발해 강원도 횡성을 거쳐 동부전선에 도착했다. 그리고 6월29일 마침내 비장한 각오로 38선을 넘는다. 사흘 전인 26일에 백범 김구 선생이 포병장교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한 채.

    “비상! 비상!”

    1949년 7월3일, 설악산 봉정암.

    해가 한참 긴 때지만 산중의 어둠은 일찍 찾아왔다. 5대대와 6대대 대원들은 비장한 얼굴로 서로의 손을 힘껏 잡았다. 짧게는 몇 달 동안, 길게는 수년째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전우들이 이제 헤어질 때가 된 것이다. 여기서 헤어지면 다시 못 볼지 모른다. 대원들은 서로 무운을 빌며 힘껏 부둥켜안았다.

    38선을 무사히 넘은 부대원들은 점봉산을 넘고 오색촌을 지나 대청봉에 올랐고, 그곳에 자신들의 머리카락과 손발톱을 묻으며 생무덤을 만들어 결사의 의지를 다진다. 이제부터 5대대는 동해안을 타고 북상해 함경남도로, 6대대는 내륙으로 침투해 평안남도로 이동해야 한다. 호림부대의 목표는 원산과 평양을 잇는 평원선을 차단해 군수물자 수송을 저지하는 것. 원산을 통해 대거 유입되는 소련 군수물자로 인해 북의 군사력은 남을 크게 압도하고 있었다. 빨리 저지하지 못하면 그 차이는 더 벌어질 것이고, 북측은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호림부대는 전쟁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북파된 셈이었다.

    험한 산지를 통과하는 평원선에는 터널이 여러 곳 있다. 5대대는 함경남도 고원으로, 6대대는 평안남도 양덕으로 진출해 터널을 폭파하고 철로를 파괴해서 군사물자 수송을 저지할 계획이었다. 군 수뇌부는 평원선을 교란하면 북한의 남침 의도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현지의 반공인사들을 포섭해 장기 주둔할 예정이었으므로 호림부대는 남으로 귀환하는 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지 않고 있었다.

    “출발!”

    5대대장 백의곤이 선두에서 대대원들을 이끌었다. 그는 동해특별대를 이끌던 사람이다. 5대대원 120여 명은 군장을 챙겨들고 행군에 나섰다. 대대라고 하지만 실제 병력은 중대 수준에 불과했다.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유격대는 병력을 실제보다 부풀려 보일 목적으로 정규군과 편제를 달리하는 경우가 많다. 다음 집결지는 양양군 강현면 상복리. 흔히 핏골이라 불리는 곳으로 지금의 설악동 C지구에 해당하는 곳이다. 지금 설악동 C지구에는 각종 숙박시설과 위락시설이 즐비하지만 당시는 호랑이가 나올 것 같은 산중이었다.

    5대대가 산기슭으로 자취를 감추는 것을 확인한 6대대장 김현주는 대대원들에게 출발을 명했다. 오대산유격대를 이끌며 태백준령을 넘나들던 김현주 대대장은 설악산을 제 손금 보듯 하는 사람이다. 6대대원들은 다음 집결지인 백담사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산중이긴 해도 이미 이북 땅에 들어선 마당이다. 나무꾼, 심마니들과 언제 어디서 마주칠지 모른다. 100명이 넘는 인원이 이동하는 걸 보면 그들은 즉시 내무서에 연락할 터. 6대대원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같은 시각, 인제군 인민위원회.

    38경비여단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책임비서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무성으로부터 1949년 6월14일자로 인제군 인민위원회에 훈령이 내려와 있는 상황이었다. 춘천에 주둔하는 남조선 괴뢰국방군 192부대에서 특별공작대 130명을 북으로 침투시키려 하니 예상지역을 철저히 수색하라는 내용이었다. 38경비여단의 전화는 이 수색에 인민들을 동원하라는 통보였다.

    “비상을 걸고 인민들을 전부 집합시키시오!”

    비상소집이 떨어지자 인제 군민들은 총동원되어 500m 간격으로 늘어서서 산을 뒤지기 시작했다. 38경비여단은 이미 24시간 출동대기에 들어갔다.

    호림부대가 경상북도에서 공비 토벌전을 마치고 서울로 귀환해 이범석 총리의 사열을 받은 것이 5월25일이고 횡성으로 이동해 대대편성을 마친 게 6월20일이다. 그런데 북한 내무성은 이미 6월14일에 인제군에 경계강화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호림부대는 출범하면서부터 줄곧 감시를 받고 있었던 셈이다. 더구나 북한 내무성 훈령은 신문에 보도된 557명이 아니고 130명임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물론 소속이 정확하지 못하고 사복 차림이라는 훈령 내용은 사실과 다르지만, 남쪽 깊숙이 잠입한 다음에야 침투 사실이 알려졌던 남파 인민유격대와는 판이한 상황이었다.

    호림부대원들이 특수훈련을 받았고 인제군이 첩첩산중이라고는 해도 사전에 정보가 새면 몸을 숨기기 힘들다. 호림부대원들은 그들 앞에 이미 포위망이 쳐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한발 한발 북진을 감행했다.

    제2차 기사문리 전투

    1949년 7월4일, 막 자정을 넘긴 시각. 강릉 8사단 10연대 상황실.

    상황실 창틈을 뚫고 환한 빛이 새나오고 있었다. 연대장 송요찬 중령을 중심으로 대대장 고백규 소령과 중대장 원선경 중위, 연대 참모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대형 상황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맞은편에는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달려온 한왕룡 소령이 몹시 초조해 하며 시계와 상황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래도 사단장 각하께 보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대장 고백규 소령이 연대장 송요찬 중령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내가 책임진다고 했잖아!”

    송 중령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훗날 6·25전쟁을 통해 미군들로부터 ‘타이거 송’이라는 별명을 얻은 맹장 송요찬에게는 ‘석두장군’이라는 또 다른 별명이 있다. 특유의 못 말리는 고집을 빗댄 별명이었다. 국군은 1949년 5월12일을 기해 여단을 일제히 사단으로 승격시키는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강릉에 주둔하는 8사단 사단장은 대한민국 국군 군번 1번으로 잘 알려진 이형근 준장. 그 8사단 예하의 10연대장인 송요찬 중령은 지금 사단장에게 알리지 않고 모종의 작전을 추진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호림부대는 어디까지 진출했소?”

    고백규 소령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왕룡 소령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단장에게 보고하지 않고 병력을 동원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연대장의 고집을 꺾을 자신이 없었다.

    “5대대는 상복리에, 6대대는 백담사에 도달했을 겁니다.”

    한왕룡 소령이 상황판을 들여다보며 답했다. 호림부대의 침투를 돕기 위해 양동작전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10연대에 38선에서 가벼운 총격전을 벌여줄 것을 요청한 것인데, 연대장 송요찬 중령은 이참에 아예 38선을 넘어 진격하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사단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좋아. 고산봉까지 치고 올라간다!”

    송요찬 중령을 더는 만류할 자신이 없는 고백규 소령은 난감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제2차 기사문리 전투는 그렇게 시작됐다.

    38선에 인접한 양양군 기사문리는 지금은 하조대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당시는 기사문리에 기지를 둔 북한 해군과 강릉에 주둔한 대한민국 육군 10연대가 날카롭게 대치하던 장소다. 당연히 충돌이 잦았다. 1949년 2월에는 인민군 2개 중대가 38선을 넘어 천교리까지 내려와서 주민을 학살하고 돌아갔다. 당시 10연대장 백남권 중령은 즉각 보복공격을 명령했고, 105㎜ 곡사포 5발을 기사문리의 북한 해군기지를 향해 발사했다. 포격은 총격과는 또 다르다. 자칫 전면전으로 치달을 위험이 크다. 미 군사고문단은 기겁했고 재발방지를 이유로 대포 조준경을 회수해 가버렸다. 이때의 충돌을 두고 남과 북은 각각 고산봉 전투와 제1차 기사문리 전투라고 불러왔는데, 그 기사문리에 지금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는 것이다.

    연대장 송요찬 중령이 무리해서 북진도 불사하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서부전선은 옹진반도와 개성지구에서 개가를 올리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반면 동부전선은 악재가 거듭돼 지휘관과 병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거듭되는 인민유격대 남파에 이어 춘천 주둔 6여단 8연대 소속 2개 대대가 통째로 월북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북측은 대대적으로 선전에 나섰고 미국은 한국군을 제2의 장제스 군대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 그 미묘한 시점에 호림부대가 38선을 넘은 것이다. ‘석두장군’ 송요찬이 사단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북진 명령을 내리게 된 배경이었다.

    대대장 고백규 소령의 명령을 받은 중대장 원선경 중위는 즉시 중대원을 인솔하고 38선을 넘었다. 정규군 중대병력이 38선을 넘는 일이 처음으로 발생한 것이다. 중대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38선이라고 해봐야 표지판 하나 썰렁하게 서 있을 뿐 철책선 같은 게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근 주민들은 눈치를 보며 가끔 오가기도 했다. 하정광리와 상정광리를 차례로 지나고 기사문리에 이를 때까지 북한군은 눈에 띄지 않았고, 일찍 잠이 깬 어부들만이 놀란 눈으로 국군을 쳐다보았다.

    마침내 북측 해군기지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국군이 38선을 넘어 쳐들어오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기지에는 보초도 제대로 서 있지 않았다. 10연대 장병들은 기습을 단행했고 놀란 북한군들이 도망가면서 해군기지는 싱겁게 점령됐다.

    원선경 중위는 당혹스러웠다. 소란을 피우는 게 목적인데 소란 대신 기지를 점령해버린 것이다. 기대 이상의 전과에 기뻐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북진해 소란을 피우자니 그것도 쉽지 않았다. 더 깊이 들어가다가는 나중에 빠져나오지 못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원선경 중위는 일단 두 소대장 최석천 소위와 김경배 소위를 불러 북한군의 반격에 대비해서 중대원들을 전투 배치할 것을 명령하고, 무전기를 통해 고백규 대대장에게 하회를 요청했다. 그렇지만 고백규 소령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이 예상 밖의 방향으로 풀려버린 것이다.

    “상부에서 철수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지키고 있는 수밖에. 혹시 놈들이 반격해 올지 모르니까 방어태세를 철저히 갖추도록.”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원선경 중위는 중대원들에게 서둘러 신형 60㎜ 박격포를 거치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북한군의 반격은 없었고, 철수 명령도 떨어지지 않았다. 호림부대의 움직임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던 북한군도 10연대가 기사문리를 기습점령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후가 되자 비로소 북한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고작 중대 병력으로 적지 한복판에서 오래 버틸 수는 없는 일이다. 중대장 원선경 중위는 미련 없이 철수를 명령했다. 임무는 충실히 완수한 셈이었다. 제2차 기사문리 충돌이라고도 불리고 양양 돌입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한국군 정규 병력이 처음으로 38선을 넘는 시작과는 달리 그렇게 조금은 맥없이 끝이 났다. 그러나 그렇듯 소동이 벌어지는 사이, 호림부대는 한발 한발 목표 지점을 향해 북상을 거듭하고 있었다.

    미 군사고문단은 길길이 날뛰며 무단으로 월경 작전을 벌인 10연대 지휘관들을 엄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처벌은 경미했고 오래지 않아 이들은 모두 원대복귀하게 된다. 한국군 수뇌부에서 그들을 감싸고돌았던 것이다. 정작 중벌을 받은 사람들은 급한 철수과정에서 개인화기와 박격포를 놓고 온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모조리 춘천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개전 이후에야 원대복귀하게 된다.

    남파를 준비하는 사람들

    최초 북파공작대 ‘호림부대’의 비극적 운명

    평양 재판정에 선 호림부대 전월성 대원.

    1949년 7월4일 오후 7시, 속초항.

    선적을 앞둔 보급품이 항구에 쌓여 있었다. 일일이 확인을 마친 김달삼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발길을 돌렸다. 해가 한참 긴 때라서 보급품을 꼼꼼히 살필 수 있을 만큼 주위가 환했다.

    “선적하시오.”

    인민유격대장 김달삼이 부관 강철에게 보급품을 배에 실을 것을 지시했다. 제3병단으로 호칭되는 김달삼의 인민유격대는 백두대간 줄기를 타고 남하해 경상북도 일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장기투쟁을 벌일 예정이었다. 신속한 이동을 위해서 보급품은 배편으로 내려 보내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1948년 말부터 1950년 초에 걸쳐 10차례 이어지는 인민유격대의 남파 가운데 가장 주력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제3차 남파에 해당하는 1949년 7월의 제3병단이었다. 앞선 두 차례의 남파는 정찰 성격이 강했고 그 후 여섯 차례의 남파는 김달삼의 제3병단을 지원하는 성격이었다. 제3병단장 김달삼은 제주도 4·3사태를 주도했던 유명인물로,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려고 제주도를 빠져나갈 때 탈출을 돕기 위해 소련 잠수함이 제주도 앞바다에 출동했다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의 거물이었다.

    월북한 그 김달삼이 무장유격대를 이끌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최신병기로 무장하고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제3병단의 목표는 경주 보현산과 대구 팔공산 일대에 해방구를 세우고 그곳을 거점으로 경찰서와 관공서, 군부대를 습격하는 이른바 아성공격(牙城攻擊)을 감행하면서 국토완정(國土完整)의 그날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또한 여수와 순천 일대의 패주병들을 이끌고 호남에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이현상과 제2병단을 돕는 것도 임무에 포함돼 있었다. 이후로는 이호제와 김상호가 이끄는 제1병단이 3병단의 뒤를 이어 남파될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최초의 북파공작대인 호림부대가 원산 침투를 목표로 속초에 이르렀을 무렵, 최정예 남파공작대인 제3병단은 경주를 목표로 속초에 집결해 최종점검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기사문리 해군기지를 탈환했다고 합니다.”

    작전참모 임창원이 새벽에 발생했던 기사문리 사건이 마무리됐음을 보고했다.

    “아무래도 북파공작대를 위한 양동작전인 것 같습니다.”

    임창원은 육사 4기 출신으로 좌익에 포섭돼 월북한 인물이다. 당연히 남측의 작전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김달삼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육군유년사관학교 출신으로 제주도 게릴라를 이끌었던 그 역시 군사전문가다.

    감시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지만, 호림부대가 설악산에 들어서면서 추적이 그만 끊기고 만 터였다. 38경비여단은 물론 인제군과 속초군 인민들까지 총동원해 산을 뒤지고 있지만 호림부대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저들의 북파 목적은 무엇일까. 그리고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제3병단 지휘부는 신경이 쓰였다. 그들이 월북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데 비해 호림부대원들은 월남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우리도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대장 하준수가 날카로운 눈매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부대장 하준수는 제3병단의 후발대를 지휘해 추후 남파될 예정이었다. 공수도의 달인이며 장대한 체격에 미남형인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야산대를 조직해 일본 경찰에 대항했던 오리지널 빨치산이다. 남쪽으로 내려가 부산까지 이르겠다는 의미의 남도부(南到釜)라는 가명으로 더 잘 알려진 바로 그 사람이다. 남도부는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재차 남파될 때부터 쓰기 시작했던 이름이고, 당시에는 그냥 하준수라는 본명을 쓰고 있었다. 김달삼도 본명은 이승진. 김달삼은 일제강점기 제주도에서 좌익 활동을 했던 그의 장인이 쓰던 가명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럼 하 동지가 그 일을 맡아주시오.”

    김달삼이 즉각 수락했다. 남파공작도 좋지만 북파공작대를 저지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곧 상세한 정보가 올라올 겁니다.”

    임창원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게릴라는 현지민들의 도움이 없으면 활동할 수 없다. 그들로부터 식량도 지원받고 정보도 수집해야 한다. 남한에 좌익인사가 있다면 북한에도 반공인사가 있게 마련이다. 북파공작대는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테지만 그들 중에는 변절자가 끼어 있다. 임창원은 머지않아 반공인사들 틈에 섞여 있는 첩자로부터 연락이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저들의 소재가 파악되는 대로 출동하겠습니다.”

    하준수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럼 하 동지를 믿고 우린 먼저 출발하겠소.”

    김달삼이 하준수의 손을 힘껏 잡았다.

    북파된 호림부대와 같은 시기에 가까운 장소로부터 남파된 인민유격대. 그렇게 시작된 둘의 인연은 훗날 국사봉까지 진출했던 호림부대 5대대가 원산의 인민군 제3사단과 인민유격대의 협공으로 전멸하고 한때 경상북도 일대를 장악하고 기세를 떨쳤던 인민유격대가 호림부대에 토벌되는 악연으로 이어진다. 그러면서 시대의 비극이 낳은 악연의 두 부대 모두 세월이 흐르면서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간다.

    당연히 지휘관들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호림부대의 백의곤과 김현주 두 대대장은 장렬하게 전사했고 김달삼은 1950년 봄 강원도 정선에서 부관 강철과 함께 토벌대에 사살된다. 대부분의 빨치산 지도자들이 휴전 직후에 최후를 맞은 것에 비해서 김달삼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남도부는 살아남은 빨치산들을 이끌고 경상도 일대에서 끝까지 투쟁하다 휴전 직후에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가장 특이한 경우는 제3병단 작전참모 임창원. 국군 장교로 있다가 월북했던 그는 다시 전향해 제3병단 토벌에 적극 협력한다.

    대대적인 추격전

    최초 북파공작대 ‘호림부대’의 비극적 운명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총책임자로 활약하다 붙잡힌 남도부의 공판. 1954년 10월11일 촬영된 사진이다.

    인민유격대가 남파를 준비하고 있던 그 시기, 호림부대 6대대는 처음부터 무리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조심스레 북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38선 이북 200㎞에 위치한 평원선까지 북진해 외부의 지원 없이 작전을 수행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민유격대가 이남에 해방구를 만들면 우리도 이북에 자유지역을 만들겠다는 정도의 막연한 생각에서 비롯된 무리한 임무였다. 그것은 남파 인민유격대도 마찬가지였다. 해방구의 설치와 아성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기대했던 인민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고작해야 경찰서를 기습하고 우익인사를 살해하는 정도였다. 그것이 인민유격대의 현실적 한계라면 호림부대의 용대리 기습도 그 한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백담사에 다다른 6대대는 인제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체포해 자세한 정보를 수집하고 7월4일 용대리 내무소를 기습해 내무서원 3명을 사살한 뒤 소비조합에서 식량을 노획했다. 보복과 보급투쟁을 단행한 셈인데 그로 인해 위치가 파악되고 말았다. 곧 38경비여단과 인근 부대로 편성된 토벌대가 추격에 나섰다. 무리한 행보를 벌인 6대대는 38선을 넘자마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초전에 위치가 탄로 난 6대대가 과연 평원선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먹구름이 6대대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용대리 뒷산으로 철수했던 6대대는 토벌대의 규모가 연대 병력에 이르는 것을 확인한 뒤 교전을 포기하고 서둘러 서화리로 이동했다. 이제 은밀한 침투는 포기해야 할 참이었다.

    6대대에 비하면 5대대는 상대적으로 운이 좋은 편이었다. 6대대가 용대리에서 쫓기고 있을 무렵 5대대는 여전히 종적을 감춘 채 북행을 계속했고, 7월5일 예정대로 화채봉에 도착해 현지 정보원과 무사히 접선했다. 이미 일대에 경계령이 펼쳐진 터였다. 한 2,3일 쉬면서 식량을 보충하는 동안 북한군의 수색을 피할 곳을 마련해야 했다. 대대장 백의곤은 고심 끝에 다음 목표지를 상복리 핏골로 정했다. 그곳은 심마니나 화전민들도 쉽게 찾지 않는 오지였다.

    “마침 그곳에 김종모 동지가 살고 있습니다.”

    현지 정보원이 동조했다. 대대장 백의곤은 아직 피곤이 풀리지 않은 5대대원들에게 출발을 명했다.

    “여기를 빠져나간다!”

    1949년 7월7일, 인제군 서화리.

    소양강 맑은 지류가 흐르는 인제군 서화리는 지금은 각종 리조트 시설과 음식점이 풍치 수려한 곳마다 들어서 있는 명소지만, 당시에는 화전민들이나 사는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가마골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말 그대로 깡촌이었다.

    그 가마골에 150명이 넘는 남자가 지친 몸을 이끌고 모여들었다. 용대리에서 북한군 2개 대대의 공격을 받은 6대대는 이틀 동안 필사의 도주를 단행한 끝에 서화리 가마골에 이른 것이다. 그 사이에 잡은 포로가 30명이나 돼서 일행은 오히려 150여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대대장 김현주는 망원경을 들고 일대를 살폈다. 멀리 진부령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차하면 그쪽으로 도주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양구와 철원, 평강을 거쳐 평안남도 양덕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은 수정해야할 것 같았다. 우선은 추격을 뿌리치는 게 급선무였다.

    “북한군이 쫓아왔습니다!”

    경계를 서고 있던 1소대장 이영수가 허둥대며 달려왔다. 그는 죽음의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생환한 몇 안 되는 6대대원 중 한 사람이다.

    벌써 여기까지 쫓아왔단 말인가. 대대장 김현주는 얼른 망원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새까맣게 밀려오는 북한군을 보고 절망에 빠져들었다. 연대 병력은 족히 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쫓아왔을까. 곳곳에 감시의 눈길이 번쩍이며 6대대의 일거수일투족을 북한군에 통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대장 김현주는 6대대의 최후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관총에 박격포까지 있습니다.”

    첨병의 보고대로 토벌대는 맥심 수랭식 중기관총에 소련제 61㎜ 박격포까지 지니고 있었다. 전면교전이 불가피한 마당인데 6대대원들의 무장은 일본군의 구형 99식 소총과 10㎏의 다이너마이트가 전부였다. 99식 소총은 발사할 때마다 손으로 노리쇠를 조작해야 하는 5발 장전의 볼트액션 방식. 북한군이 소련제 모신 장총만으로 무장했다면 그런대로 싸워볼 만하겠지만 61㎜ 박격포와 맥심 중기관총 무장이라면 대적하기 힘들 것이다.

    아무래도 임무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완전히 포위되기 전에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일단 포위망을 빠져나간 후에는 각자 알아서 남으로 귀환해야 할 것이다. 상황이 많이 불리하지만 대원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았고 산을 타는 데 모두 능숙했다. 그리고 38선이 그리 멀지 않다.

    “여기를 빠져나간다!” 대대장 김현주의 탈출 명령이 떨어진 바로 그 순간 기관총탄이 날아들었다. 곧이어 박격포탄도 떨어졌다. 6대대원들은 신속히 응사에 들어갔다. 포로로 잡힌 내무서원이 상당수 있는 데도 북한군은 전혀 개의치 않고 총을 발사했고 포를 쏴댔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렸고 6대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총탄이 날아들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응사하던 한형욱(가명)은 도주하는 일행을 따라 계곡 아래로 내달렸다. 동료들은 모두 허겁지겁 골짜기 아래로 내달리고 있었다. 이미 지휘계통은 무너졌다.

    콩 볶는 듯한 총성과 박격포탄 터지는 소리, 간간이 들리는 다이너마이트 터지는 소리는 적을 향해 던진 것이거나 자폭한 것일 게다. 다행히 아무것도 앞을 가로막는 것이 없었다. 한형욱은 정신없이 내달았다.

    차츰 총성이 멀어졌다. 포위망을 빠져나온 것일까. 골짜기를 따라 내달리던 한형욱은 허름한 집을 발견하고 그리고 뛰어들었다. 화전민이 살다가 떠난 듯한 집에는 동료 세 명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네 사람은 일단 이곳에 몸을 숨기고 정황을 엿보기로 했다. 워낙 외진 곳에 있는 오두막인지라 추격대도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포위망을 빠져나온 대원은 몇 명이나 될까. 출정할 때 이미 죽음을 각오한 마당이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직면하니 새삼 두려움이 밀려왔다. 무엇보다 임무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둠이 내린 밖은 이제 조용했다. 그 사이에 기운을 추스른 네 사람은 탈출을 결심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네 사람은 기겁해서 총을 겨누었다.

    “나다.”

    들어선 사람은 소대장이었다.

    “대대장님께서 장렬하게 전사하셨다.”

    소대장이 울먹였다. 한형욱은 가슴이 아팠다. 대대장 김현주는 오대산유격대 시절부터 모시던 상관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포위망을 빠져나온 것도 대대장이 죽기로 뒤를 막아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슴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꾸물거릴 수는 없었다. 추격대가 오기 전에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야 한다.

    “왔던 길로 돌아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원통 쪽으로 탈출하는 게 좋겠습니다.”

    누군가 의견을 제시했다.

    “마을마다 자경대원들이 쫙 깔렸을 거야.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는 게 안전해.”

    소대장의 생각은 달랐다.

    어느 쪽이 옳을까. 앞뒤를 헤아리고 있는데 갑자기 총탄이 날아들었다. 그러면서 문가에 서 있던 김병제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예상보다 빨리 추격대가 쫓아온 것이다.

    “내가 뒤를 맡을 테니 빨리 빠져나가라.”

    김병제가 고통을 참으며 수류탄을 뽑아들었다. 소대장과 세 대원은 눈물을 머금고 뒷문으로 나와 어둠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가전리 쪽으로 탈출한다. 부연동 골짜기에 가면 몸을 숨길 수 있을 거야.”

    소대장이 앞장서서 대원들을 인솔했다. 수류탄 두 발이 연속적으로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김병제가 북한군을 유인해 자폭한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슬퍼할 겨를도 없다. 네 사람은 어둠이 깔린 계곡을 부지런히 내달렸다. 그 순간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네 사람은 일제히 몸을 내던졌다.

    “헉!”

    맨 뒤에서 일행을 따르던 한형욱은 발을 헛디디고 골짜기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마지막 행로

    1949년 7월8일 새벽 4시, 설악산 상복리 핏골.

    5대대는 강행군 끝에 양양군 강현면 상복리 핏골에 이르렀다. 일찍 발각되어 궤멸된 6대대와는 달리 5대대는 아직 꼬리를 잡히지 않고 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상당히 먼 길이로군요. 고원이면 고성과 회양, 안변, 그리고 문천을 거쳐야 하는데….”

    김정배의 표정이 어두웠다. 속초애국동지회 소속의 반공인사로 호림부대를 돕기 위해 이리로 달려온 사람이다. 핏골에 당도한 5대대 간부들은 이곳에서 속초애국동지회 반공인사들과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숙의하고 있었다.

    적진 깊숙이 침투해서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유격대에 현지인들의 도움은 필수다. 특히 속초는 반공 열기가 뜨거운 곳이다. 최종목적지인 함경남도 고원은 위도가 북위 39도50분에 해당해 직선거리로도 무려 200㎞를 북진해야 한다. 그러니 현지인들의 도움 없이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무서를 기습해 식량을 탈취할 생각이오.”

    대대장 백의곤이 입을 열었다. 김정배의 고심대로 심심산골에서 무려 120명에 달하는 대원의 식량을 조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곳 인민위원장이 아주 악랄한 자라고 들었소.”

    중대장 김종익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자 때문에 많은 동지가 목숨을 잃었지요.”

    집주인 김종모가 90인 사건 때 끌려갔던 동지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반공 열기가 뜨거운 속초에서 많은 반공인사가 체포되고 있었다. 내무서를 기습해 무기와 식량을 탈취하고 인민위원장도 처단하면 일석이조인 셈이다. 대대장 백의곤이 간부들을 둘러보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출발한다!”

    대대장 백의곤이 출발을 명하자 집밖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5대대원들이 얼른 무기를 챙겨 들었다. 길 안내는 속초애국동지회 청년이 자청하고 나섰다. 핏골은 첩첩산중이어서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북한군이 파악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토벌대가 조직되더라도 그 사이에 5대대는 내금강의 깊은 산중에 몸을 숨길 수 있다.

    피로를 회복한 5대대원들은 별 어려움 없이 핏골 내무서를 기습하는 데 성공했고 필요한 식량을 확보했다. 목표대로 인민위원장과 보안대원 6명도 처단한데다, 신형 무기를 노획한 것은 망외의 성과였다. 사기가 충천한 5대대원들은 다음 목표지로 이동했다. 도중에 소대 규모의 현지 보안대가 저항을 했지만 5대대의 상대가 아니었다. 이들을 간단히 제압한 5대대는 북상을 계속했다.

    무사히 평원선에 이를 수 있을까. 그러나 시차를 달리하며 5대대에도 불행이 찾아왔다. 하나는 속초애국동지회에 침투해 있던 공산당원으로 인해 5대대의 행보가 북한군에 예상보다 빨리 발각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속초에 출정 채비를 마친 제3병단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김정배의 처조카 이종구의 신고로 북한군에는 즉각 비상이 걸렸고 5대대는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렇지만 5대대는 쉽게 뒤를 잡히지 않았다. 치고 빠지며 북상을 계속해 7월9일에는 신선봉에, 12일에는 마산리에 당도했다. 마산리에서 처음으로 토벌대와 조우했지만 1개 소대 병력의 북한군은 정예 호림부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교전 끝에 북한군은 8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주했다.

    최초 북파공작대 ‘호림부대’의 비극적 운명

    1948년 10월 제주도 9연대를 방문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일행의 기념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송요찬 연대장, 그 다음이 채병덕 총장이다.

    예상보다 일찍 발각되었지만 대대장 백의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향로봉으로 우회하면 얼마든지 추격을 따돌릴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이다. 남한에서 빨치산을 토벌할 때도 마찬가지지만, 경찰이나 지역 주둔군은 관할지역 경비에만 신경 쓸 뿐 추격전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유격대가 관할지역을 벗어나면 미련 없이 추격을 포기했다. 5대대는 이미 38경비여단의 관할지역을 통과했다. 그리고 아직은 원산에 주둔하는 북한군 3사단의 관할지역이 아니다. 그 사이에 산재해 있는 내무서나 보안대 따위는 호림부대의 상대가 못됐다. 5대대는 향로봉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교량 2곳을 파괴하고 트럭을 기습해 탈취하는 전과를 올렸다. 금강산에 이르면 몸을 숨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5대대의 무운은 거기까지였다. 그들만큼이나 산악행군에 능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정예 유격대가 추격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삼치령으로 출동한다!”

    제3병단 후발대 지휘부는 속속 답지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5대대의 행로를 그렇게 추정했다. 그래서 향로봉 쪽으로 달려 금강산으로 침투할 것이라 예측하고 삼치령과 노루메기, 대방골로 통하는 선에서 이들을 저지하기로 한 것이다.

    이중삼중의 포위망

    1949년 7월15일, 삼치령.

    소양강의 발원지이기도 한 삼치령은 아침부터 짙은 안개에 젖어 있었다.

    “적이 쫓아오고 있습니다.”

    정찰병이 허겁지겁 달려오며 대대장 백의곤에게 보고했다. 백의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벌써 여기까지 쫓아왔단 말인가. 이미 전방에 원산에서 출동한 인민군 3사단이 매복해 있음을 확인한 터였다. 대대장 백의곤은 그동안 상대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는 후회에 휩싸였다. 빨리 사지를 탈출해야 했다.

    “측면이 약한 것 같습니다.”

    중대장이 선제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어차피 은밀히 빠져나가기는 틀린 마당이다. 대대장 백의곤이 손을 들자 5대대원들은 자세를 낮추고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짙게 낀 안개 속을 조용히 전진했다. 그리고 포위망 30m 앞에 이르렀을 무렵 5대대원들은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요란한 총성이 이어졌고 수류탄이 터지면서 고요하던 삼치령이 일시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 5대대원들은 용감히 싸웠지만, 불리한 상황에서의 교전이었던 터라 사상자가 속출했다.

    “엄호할 테니 빨리 탈출하십시오!”

    전월성이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PPsh41 기관단총, 속칭 따발총을 난사하며 후미를 엄호했다. 삽시간에 71발들이 드럼탄창이 동이 났다. 그 사이에 5대대원들이 속속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전월성이 탄창을 갈아 끼우는 찰나, 옆에서 엄호하던 임석순과 김정덕 대원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총탄에 맞은 것이다. 눈에 불꽃이 인 전월성은 그대로 몸을 벌떡 일으켜 전방을 향해 따발총을 갈겨댔다.

    안개 속에서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요란한 폭음과 함께 황급히 엎드린 전월성의 몸 위에 흙먼지가 쏟아졌다. 전월성은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어느새 차가운 총검이 가슴을 겨누고 있었다.

    1949년 7월16일, 설악산 한계령.

    지금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지만 당시는 오색령이란 이름의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고개였다. 한형욱은 오색령 정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심한 하늘에는 하얀 구름만이 한가로이 떠돌고 있었다. 대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소대장은 무사히 탈출했을까. 김현주 대대장이 전사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속초 쪽으로 진출한 5대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왠지 그쪽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재롱밭까지 가면 몸을 숨길 곳이 있습니다.”

    길을 안내하는 화전민은 걱정이 되는지 자꾸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재롱밭 일대는 본래 중석 광산지대로 일제강점기에는 사람들로 붐빈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광복이 되면서 대성광산과 설악광산이 문을 닫고 일본인 기술자들도 철수해 지금은 화전민들도 잘 찾지 않은 오지로 변해버린 것이다.

    “갑시다.”

    한형욱은 지친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 돌아가 호림부대의 비화를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버티고 온 마당이었다.

    이북 깊숙한 곳까지 진출했던 호림부대원들이 탈출에 성공한 데는 현지 화전민들의 도움이 컸다. 그들 중에는 호림부대원을 따라 월남한 사람도 있고, 나중에 체포되어 처형된 사람도 있다. 호림부대는 비록 원래 목표였던 평원선 폭파에는 실패했지만 북한 당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고 반공인사들에게 용기를 주었다는 점에서 나름의 성과를 올린 셈이었다.

    1949년 7월16일, 국사봉.

    해발 1385m의 국사봉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삼치령을 탈출한 5대대원들은 밧무재로 빠져나와서 국사봉 삼각고지에 집결했다. 국사봉은 38선에서 70㎞나 북쪽에 위치한 내금강 초입. 상당히 멀리 올라온 셈이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기만 했다. 추격대에 꼬리를 잡히기 전에 빨리 녹음이 우거진 금강산 골짜기에 몸을 숨겨야 한다.

    그렇지만 한복판에서 위치가 발각된 유격대의 최후는 비참한 것이었다. 이미 이중삼중으로 포위망이 펼쳐졌고 퇴로마저 끊긴 채 한 명 두 명 쓰러져갔다. 어차피 처음부터 완수가 불가능한 임무였다. 여기까지 진출하는 동안에 적지 않은 전과를 올렸고 대원들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용감하게 싸워주었다. 대대장 백의곤은 최후의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각자 알아서 탈출한다! 남쪽으로 내려가라!”

    탈출명령이 떨어지자 DP 보병용 경기관총이 맹렬하게 불을 뿜었다. 삼치령에서 노획한 이 소련제 무기는 분당 500발을 발사하는 경기관총이었다. 순식간에 47발들이 탄창이 비워져나갔다. 5대대는 삼치령 전투에서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48명의 적을 사살하고 많은 소련제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곧 북한군의 응사가 시작되었다. 5대대원들은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며 대항했지만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사상자가 속출했고 서북청년단 단장으로 동해특별대를 이끌며 일찍부터 반공전선에서 활약했던 대대장 백의곤도 그곳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저쪽이다!”

    중대장 김종익이 남은 대원들을 인솔하고 삼각고지 아래로 내달았다. 그리고 사지를 무사히 탈출하고 그날의 처절했던 싸움을 생생하게 전하는 주역이 된다.

    8월 평양 모란봉극장

    1949년 6월29일 38선을 넘은 최초의 북파공작대 호림부대는 그렇게 7월16일 국사봉에서 북진을 멈췄다. 북한 당국이 7월29일에 호림부대 토벌이 공식적으로 끝났다고 공표한 것으로 봐서 국사봉 교전 이후에도 일부 대원이 산발적으로 저항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지휘계통이 와해된 다음이었다. 252명의 대원 가운데 38선을 넘어 무사히 귀환한 대원은 5대대 23명, 6대대 12명 등 도합 35명뿐이었다.

    북한은 호림부대원 106명을 사살하고 44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공표했다. 그리고 호림부대가 주민 11명을 납치하고 29명을 살해했으며 가옥 11채를 파괴하고 소 15마리를 죽였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 38선 인근 전답 1만1859평에서 농사가 방해받았고 4800평에서 제초를 하지 못했다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덧붙였다. 호림부대가 북한 당국에 안겨준 적지 않은 충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전월성, 조석풍, 이한기, 고찬석, 김인환 등 포로가 된 호림부대원들은 1949년 8월28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재판을 받았고 모두 사형이 선고됐다. 그리고 9월11일 형이 집행됐다.

    그렇게 역사의 저편에 묻혀버렸던 호림부대는 1990년 KBS에서 생포된 호림부대원들이 공개재판을 받는 장면을 방송하면서 다시 세인의 관심을 받았다. 6·25전쟁 당시 미군이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이 필름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재판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빛바랜 화면 속에서 머리를 박박 깎은 포로들은 굳은 표정으로 북한 검사의 신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호림부대원들이 자신들의 최후를 생생하게 증언한 그 필름은 2000년 6월에 MBC에서 다시 한 번 방송됐다.

    최초 북파공작대 ‘호림부대’의 비극적 운명
    오 세 영

    1954년 충남 홍성 출생

    경희대 사학과 졸업

    1993년 역사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으로 글쓰기 시작

    저서 : ‘만파식적’ ‘화랑서유기’ ‘창공의 투사’ ‘소설 자산어보’ ‘구텐베르크의 조선’ 외


    무사히 생환한 대원들도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대원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좌절과 실망뿐이었다. 정식 군인이 아닌 데다 부대의 창설도 6·25전쟁 이전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국가로부터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오랜 세월 동안 나라와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전적비를 세우는 일조차 순탄치 못했다. 북침의 증거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며 당국에서 만류하고 나섰던 것이다. 생존 호림부대원들이 중심이 되어 꾸준히 노력한 결과, 1986년 9월에 야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에 호림부대 전적비가 건립되었다. 호림부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었던 장소에 37년 만에 그들의 원혼을 달래줄 기념비가 세워진 것이다.

    ‘너희가 경상도에 해방구를 설치하면 우리는 함경도에 자유지역을 만든다’는 식의 즉흥적이고 감정적 대응의 산물이었던 호림부대는, 그렇게 시대의 희생물이 되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기는 남파된 인민유격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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