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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유학생의 영국 일기 ⑥

영국정치의 저력 보여준 6일간의 총선

  • 전원경│작가 winniejeon@hotmail.com│

영국정치의 저력 보여준 6일간의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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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과 마이크의 악연

거기에 더해 선거가 열흘도 남지 않은 4월28일, 노동당에 치명적인 사건이 터졌다. 이날 고든 브라운 총리는 맨체스터에서 선거운동을 하다 질리안 더피라는 예순이 넘은 여성 유권자와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물론 사전에 선거운동팀이 주선한 ‘유권자와의 대화’였고 취재진도 따라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뚱한 표정의 할머니는 브라운 총리를 만나자마자 대뜸 “요즘 이 동네에 폴란드 사람이 너무 많다”며 “왜 영국 사람들도 못 받는 혜택을 동유럽 이민자들이 받아야 하냐”며 따지듯 물었다. 브라운은 적당히 할머니를 달래고 웃으며 대화를 마쳤으나, 할머니의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상당히 ‘열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는 차에 올라타 비서에게 말했다. “이건 완전 재앙이야. 누가 저 여자 섭외했어? 다시는 이런 거 하지 마. 고집쟁이 여편네(Bigo-ted woman) 같으니.”

문제는 차 안에서 이 대화를 나눌 때 브라운이 옷깃에 꽂고 있던 TV 인터뷰용 마이크를 깜박 잊고 끄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고집쟁이 여편네’라는 브라운의 푸념이 그대로 BBC로 흘러갔고, BBC는 이 사실을 그대로 보도했을 뿐만 아니라 질리안 할머니에게 “브라운 총리가 당신을 고집쟁이라고 평가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묻기까지 했다. 브라운 총리가 뒤늦게 질리안 할머니를 찾아가 40분이나 사과하는 걸로 해프닝이 일단락되었지만,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받고 있는 노동당으로서는 ‘총리가 노동자 계급 유권자를 무시했다’는 사실이 뼈아픈 실책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경제 불황으로 허덕이는 영국의 현 상황에서 동유럽 이민자와 불법이민자 문제는 중요한 선거 이슈 중 하나다. 현재 영국에는 불법이민자를 제외하고도 일자리를 찾아 이민 온 유럽연합 국가의 국민이 적지 않다. 영국은 유럽연합의 일원이기 때문에 이들의 이민을 제한할 방법이 없다. 특히 폴란드 사람들은 유창한 영어실력과 성실한 태도로 영국에서 정착률이 높은 동유럽 국민으로 손꼽힌다. 희원이의 유치원 친구 중에도 한나라는 폴란드 친구가 있다. 한나의 아버지 마치는 전기기술자인데 스코틀랜드에 이민 온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서 영국 사람과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완벽한 영어를 구사한다. 그러니 영국 실업자들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어가는 폴란드 사람들이 달가울 리 없다. 보수당은 불법과 합법을 막론하고 이민자들에 대해 강경 정책을 고수하는 반면, 노동당과 자유당은 상대적으로 유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질리안 할머니처럼 “동유럽 사람들 다 쫓아내야 돼, 그 사람들이 우리 아들, 손자 일자리 뺏어가잖아” 하고 불만을 갖는 노인들은 노동당 정부에 불만이 많다. 이런 분위기에서 참으로 미묘한 사건이 터진 셈이다.

이 사건에 대해 ‘더 타임스’를 비롯한 신문들은 “과연 총리의 푸념이 그토록 크게 보도할 만한 사건이었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내 연구실 동료인 앤디는 “이건 어느 당을 지지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선거에 대한 언론의 보도가 지나치게 선정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증거”라고 한탄했다. 영화과 박사과정 친구인 에이미 역시 “아니, 그 할머니는 진짜 고집쟁이 맞더라. 이민자들이 영국인들이 받을 혜택을 뺏어간다는 말이 대체 대꾸할 가치나 있는 거야? 폴란드 사람들이 영국에서 잘사는 건 폴란드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라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흥분했다(에이미는 아일랜드 사람이다. 아무래도 외국인인 만큼, 이런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아무튼 블레어 전 총리도 그 옛날 부시 전 미 대통령과의 사적인 대화가 그대로 마이크로 흘러나가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는데, 노동당과 TV 마이크는 뿌리 깊은 악연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선거 직전에 세 번째로 열린 BBC의 후보 토론 직후, 자유민주당 닉 클렉 당수의 지지도는 28%까지 올라가 보수당 캐머런(33%)의 뒤를 바짝 쫓았다. 브라운의 선호도는 27%에 불과했다. 언론은 17세기 후반 이래 300년 이상 이어져온 양당제가 이번 선거에서 무너질 것인가 하는 우려 반 기대 반의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자, 과연 영국 정치에 신선한 바람이 불어올 것인가? 대학의 영국 친구들은 대부분 노동당이나 자유민주당에 투표하겠다고 말했다. 이쯤 되니 사실 선거 결과와 큰 상관이 없는 나 역시 슬슬 궁금증이 일었다.

300년 이어온 양당제

그러나 막상 선거가 치러지자 또 한 번의 반전이 일어났다. ‘황색 돌풍(자유민주당의 색깔은 노란색, 보수당은 파란색, 노동당은 빨간색이다)’을 예상한 언론 보도와 달리, 자유민주당의 의석은 겨우 57석에 그쳤다. 지난 2005년 총선 때보다 오히려 5석이나 잃은 결과였다. 보수당은 307석, 노동당은 258석으로 아무 당도 하원의 과반 이상을 차지하지 못했다. 하원의석 수는 650석이기 때문에 326석 이상을 차지한 당이 내각을 구성할 권리가 있는데 어떤 당도 이 과반수를 넘기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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