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11월29일 미국 해병 1사단 7연대와 5연대 소속 군인들이 중국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북한 개마고원 장진호 인근의 유담리에서 철수하는 모습. 미 해병대 사진사가 철수 도중 눈이 수북이 쌓인 산길에서 휴식하는 병사들을 찍었다.
불행하게도 스미스 장군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중국군이 갑자기 참전하면서 미 해병대는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다. 중국은 북한의 패망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 1950년 9월30일,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중국이 좌시하지 않겠다고 경고했지만 맥아더 원수는 무시하고 북진을 결정했다. 10월1일 38선을 돌파한 국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 10월20일 평양을 탈환했다. 낙동강으로 밀릴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진격해서 11월24일에는 미 육군 7사단 선발대가 압록강까지 도달했다. 그렇게 되면서 미국은 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대치하게 되었다.
항미원조(抗美援朝). 조선을 도와서 미국과 싸운다. 중국은 참전을 결정했고 보병 30개 사단에 포병 1개 사단, 그리고 철도병 1개 사단으로 구성된 30만명의 대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었다. 총사령은 펑더화이(彭德懷). 서부전선 사령은 린뱌오(林彪). 그리고 동부전선 사령은 쑹스룬(宋時輪). 모두 실전 경험이 풍부한 백전노장이다.
기습은 서부전선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중국군이 10월25일에 온정과 운산에 출현했다. 하얀 눈 속에서 유령군대가 돌진해 오면서 전선은 대혼란에 빠졌다. 꽹과리를 요란하게 울려대며 한도 끝도 없이 밀려드는 중국군을 보며 미군은 패닉 상태에 빠졌고 전선이 급격히 붕괴되면서 8군은 퇴각에 들어갔다. 전세가 다시 뒤집힌 것이다.
중국군의 포위
맥아더 사령부는 미 해병 1사단에 후퇴하는 8군의 엄호를 맡겼다. 그렇지 않아도 경무장의 해병대가 내륙 깊숙이 진격할 것을 염려하고 있던 스미스 사단장에게 고민이 더해졌다. 낭림산맥을 넘어 진격해야 하는데 작전지역이 너무 넓어진다. 그렇지만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다. 해병 1사단은 산악지대로 진출할 채비를 서둘렀다. 다행히 중국군이 아직 동부전선까지는 진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위안 삼으며.
그러나 그것은 미군 수뇌부의 착각이었다. 이미 은밀히 이동을 마친 중국군은 멀지 않은 곳에서 해병대가 더 깊숙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중국군이 미 해병 1사단과 장진호 동쪽에 주둔하고 있는 미 육군 7사단 31연대를 겹겹이 포위한 다음이었다. 그렇게 되어 미 해병대는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다. 빨리 빠져나가지 못하면 전멸이다. 철수작전은 진격보다 더 어렵다. 지원받기 힘든 산악지대는 특히 더하다.
거기에 해병대를 압박하는 적이 하나 더 있었다. 무시무시한 동장군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퇴로가 끊긴 채 추위에 떨고 있는 해병 1사단을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과연 미 해병대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무사히 철수할 수 있을 것인가. 세계의 이목이 얼어붙은 장진호에 집중되었다.
▼1950년 11월26일 덕동고개
하갈우리와 유담리를 연결하는 해발 1400m의 덕동고개는 유담리까지 진출한 해병 5연대와 7연대의 보급로를 통제하는 이른바 감제고지다. 덕동고개를 빼앗기면 2개 연대는 고립될 위험에 놓인다. 미 해병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1개 중대를 덕동고개에 배치해 놓고서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 소대 지령관 양근사가 손을 들자 정찰조는 일제히 눈밭에 엎드렸다. 발각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미 해병들이 경기관총이 어는 것을 막기 위해 허공에 대고 사격을 하는 모양이었다. 덕동고개의 미 해병대 진지를 정찰 중인 양근사는 정찰조에게 계속 전진할 것을 명령했다. 방한복은 안쪽이 흰색이어서 뒤집어 입으면 웬만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