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호

상처를 ‘아름다운 힘’으로 빚어낸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

돌 쪼고 나무 깎고 천 꿰매며 균형과 용서와 치유를 배우다

  •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입력2010-08-04 11: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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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를 ‘아름다운 힘’으로 빚어낸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
    지난 6월1일 외신들은 한 여성 예술가의 부음을 긴급 타전했다. 설치미술가로도 잘 알려진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그녀가 5월3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의 베스이스라엘 병원에서 숨졌다. 향년 99세. 심장마비 증상으로 입원한 지 이틀 만이다. 100세를 채우지 못하고 이승을 떠난 그녀에게 전세계 예술계가 주목한 이유는 죽는 순간까지 작품활동을 멈추지 않은 창작열에도 있지만, 삶의 나락으로 빠져버릴 수 있는 치명적 상처를 예술을 통해 스스로 치유하고 발산했다는 사실도 빠뜨릴 수 없는 요인이다.

    세상은 불완전하고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기에 상처는 모든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상처의 무게에 짓눌려 목숨까지 끊는 사람들이 있지만, 루이스 부르주아를 보면 반드시 돌파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처야말로 ‘힘’이다.

    더욱이 그녀는 늦깎이 대기만성의 전형이다. 여성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아웃사이더이자 비주류의 삶이던 시절, 나이 마흔에 예술의 세계에 입문했다. 그리고 수많은 작가가 박물관과 미술관 속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예술계에서 시시때때로 변하는 사조와 유행을 뚫고 아흔을 훌쩍 넘는 나이까지 홀로 살아남았다. 그녀는 인간 정신의 한계가 어디까지 오를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준 현대미술계의 ‘철녀’다.

    ‘2022년까지 기억될 작가’

    13년 전인 1997년 12월 미국의 미술전문월간지 ‘아트뉴스’는 창간 95주년을 맞아 미국의 비평가, 큐레이터, 미술관 디렉터 등 미술계 핵심 인사들을 상대로 ‘현재 활동하는 세계 미술가 중 25년 후인 2022년까지 기억될 작가를 꼽으라’는 설문조사를 했다. 선정된 41명의 예술가 중 1위는 다름 아닌 루이스 부르주아.



    모두들 ‘25년 후’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빠른 광속의 시대에 비디오나 컴퓨터 등 첨단 멀티미디어를 사용하는 작가가 추천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것이 빗나간 것이다. 게다가 선정 당시 부르주아는 86세 고령이었다.

    평론가들은 “그녀의 작품에선 폭력, 공포, 에로티시즘이 동시에 표출된다”며 “동시대의 어떤 남자 작가 중에도 그녀처럼 스스로에 대해 냉정하다 할 만큼 정직했던 사람은 거의 없다”고 평가했다. 예술이란 어떤 첨단기법이나 기술이 아니라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즉 메시지에 주목해야 함을 제대로 지적한 평가다.

    기자는 2005년 4월 그녀와 e메일 인터뷰를 했다. 당시 기자는 미술을 담당하고 있었고, 마침 그해 4월12일∼5월13일 루이스 부르주아 신작전이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녀 나이 아흔넷. 그때 쓴 기사는 짧은 분량이지만 작가의 작품세계와 예술가적 고집을 엿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보여 소개한다.

    뉴욕 첼시의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는 루이스 부르주아는 어시스턴트 2, 3명의 도움을 받아가며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다.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에 이어 이번에 신작전을 갖는 그는 “한국에 가본 적은 없지만, 내가 만난 몇몇 한국인은 굉장히 감성적이며 친절했다”면서 “이번 전시에 맞춰 한국에 가보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못 갈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 흔히들 당신을 페미니즘 작가라고 한다. 맞는가.

    “나는 내 작품을 어떤 ‘이즘’으로 묶는 것에 반대한다. 다만, 아는 것에 관해서만 얘기할 뿐이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 없고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성’들을 위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늘 ‘나 자신’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그동안 드로잉에서부터 천 조각에 석판화를 찍는 작업, 수건으로 만든 조각 작품, 손바느질한 천 조각 등 장르와 재료를 넘나드는 다양한 작업을 해왔지만, 일관된 주제는 오랫동안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했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어릴 적 상처다.

    상처를 ‘아름다운 힘’으로 빚어낸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

    당대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과 함께 한 루이스 부르주아.

    ▼ 예술은 당신에게 무엇인가.

    “카타르시스(정화)다. 내가 경험한 상처, 증오, 연민을 표현하고자 한다.”

    ▼ 초반에 주목받은 작품들이 남자에 대한 미움과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이 강했다면, 최근에는 ‘용서’나 ‘화해’ 같은 주제를 담은 작품이 많은 것 같다.

    “잊어버리기 위해서는 화해하고 용서해야 한다. 요즘에는 빨간색을 주로 쓴다. 아마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감정의 한가운데서도 이해받고 사랑받기 원하는 내면의식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에게 예술은 두려움을 넘어서기 위한 작업이다.”

    ▼ 당신은 일흔의 나이에 뉴욕 MoMA 개인전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지금은 아흔이 넘은 나이인데도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나이에 대해 갖는 생각은.

    “살아갈수록 나는 ‘우리가 얼마나 힘든 세상을 살고 있는지’에 관해 생각한다. 나는 하루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나는 항상 내가 장거리 주자이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말해왔다. 요즘 젊은 작가들은 너무 야망이 크고 모든 게 빨리 이뤄지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런 성향은 파괴적이 될 수 있어 위험하다.”

    루이스 부르주아는 1911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태피스트리(tapestry·다채로운 선 염색실로 짜서 만드는 실내 장식물) 사업을 해온 집안에서 자라난 덕분에 일찍부터 예술적 감수성에 눈떴다.

    그러나 어린 그녀의 의식세계를 집요하게 괴롭히던 치명적 상처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어머니의 침묵과 묵인하에 일어난 아버지의 불륜 행각이었다. 어린 시절에 병약했던 부르주아는 어머니 대신 입주영어 가정교사 새디를 친자매처럼 의지하며 자랐다. 그러나 언니처럼 따르던 가정교사가 아버지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불륜관계였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행복하던 소녀시절은 지옥으로 변한다. 아버지는 한때 가족을 버리고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결국 그녀의 무의식에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예술의 지속적인 원동력이 됐다. 그녀는 훗날 인터뷰에서 “내가 어릴 때 아버지가 전쟁(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떠나자 어머니가 몹시 불안해했다”면서 “어머니의 불안은 우리에게 전염됐고, 우리도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돌아다녔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선할 태피스트리를 모으기 위해 여행을 자주 떠났고 나는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을까봐 두려웠다”고 회고했다.

    증오와 연민, 함께 똬리를 틀다

    이와 함께 또 한 가지 그녀를 괴롭히던 것은 남자로 태어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었다. 아버지는 부르주아가 태어날 무렵 반드시 남자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름조차 자신의 이름과 똑같게 정해놓고 있었다. 하지만 딸이 태어나자 실망이 컸다. 이런 아버지의 실망을 어릴 적부터 잘 알고 있었던 그녀는 여자로 태어난 것이 마치 죄라도 되는 양 주눅이 들어 자랐다. 이것은 다시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그녀의 대학시절 전공은 미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수학과 기하학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정서적 불안감을 느끼던 부르주아는 비정상으로 가득한 현실에 대해 회의했다. 그리하여 예측 불가능한 현실보다는 수학과 기하학의 세계가 주는 예측가능하고 안정된 체계에 끌린다. 그녀는 명문 소르본 대학에 입학한다. 부르주아는 “기하학은 사람 관계와 달리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하다. 깨지지 않는 법칙들이 있다. 기하학은 내게 구조에 대해 가르쳐줬고 나는 이를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상처를 ‘아름다운 힘’으로 빚어낸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

    부르주아에게 바늘과 천은 여성적 정체성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재료였다. ‘부부’라는 이 작품은 두 몸을 감싼 사슬처럼 운명적 사슬로 묶여 있으되 얼굴은 없는 부부라는 운명의 슬픈 그림자를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수학이나 기하학의 세계는 그녀의 구원처가 되지 못했다. 그녀는 대학시절 내내 자신이 진정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몰라 방황을 거듭한다. 그리고 방황 끝에 그림을 그리기로 한다. 어릴 적 태피스트리를 수선하면서 집안일을 돕느라 낡아 없어진 부분들의 그림을 드로잉하면서 경험하던 심적인 편안함이 자연스럽게 미술의 세계로 이끈 것이다. 그녀는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 Arts)와 에콜 드 루브르(Ecole du Louvre)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몽마르트 화가들의 스튜디오에서 훈련을 받았다.

    ‘색채는 언어보다 강하다. 그것은 인간의 잠재의식에서 소통한다. 파란색은 평화와 명상, 그리고 탈출을 의미한다. 빨간색은 어떤 반박이나 공격에 대한 긍정을 상징한다. 검은색은 비탄, 회한, 죄책감, 후퇴를 말한다. 하얀색은 처음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그것은 새로운 출발이다. 분홍은 여성적이다. 자신의 자아에 대해 호의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작가의 말 중에서)

    그녀에게 그림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치유책이었다. 초창기 그녀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성적 정체성의 문제는 그런 의식세계를 반영한다.

    당시 그녀가 그림에서 표현한 것은 여성으로서 느끼던 억압이었다. 여인의 얼굴을 집으로 대체하고(여자는 집을 지키는 존재라는 것을 상징한다) 팔다리만 그려놓은 ‘집-여인’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여성의 누드와 집이 결합된 이 시리즈에서 신체의 주요부위인 머리 부분에 집을 배치함으로써 여성의 정체성이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제한됨을 암시한다. 그녀에게 가정은 보호와 동시에 억압을 상징한다. 그의 작품에 표현된 여성의 신체는 때로는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포즈로 어떤 한계상황에 굴종하는 모습이고, 또 때로는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며 가두려는 집이라는 공간으로부터 탈출하고자 사지를 뒤트는 저항의 몸짓으로 몸부림친다. 이런 성적 정체성에 대한 비판적 의식은 50이 넘은 나이에도 간간이 작품에서 발견된다.

    상체는 온데간데 없고 길고 가느다란 두 다리만 늘어져 있는 ‘다리’(1986)라는 작품이나 뱀이 임신부를 친친 휘감은 듯한 형상의 ‘나선형의 여인’(1984) 등을 통해 부르주아는 ‘여인인 나는 자아의 존재감을 상실한 채 단지 집을 지키는 존재이자, 두 다리를 갖고 있지만 그것마저 너무 길고 가늘어 나설 수도 없는 상태이며, 아이를 내 몸속에 길러야만 한다는 숙명은 마치 뱀이 몸통을 조여놓은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외치는 듯하다.

    조각으로 돌아선 이유

    1938년 부르주아는 미국인 미술사학자인 로버트 골드워터와 결혼해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그녀는 당시 골드워터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바람을 피울 것 같지 않아서’라고 말해 부정을 저지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그녀를 오랫동안 지배했음을 보여줬다).

    사실 그녀의 뉴욕행은 비정상적인 가족생활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했다. 그녀 어머니의 경우처럼 프랑스에서 기혼여성들이 남편의 정부(情婦)를 묵인하는 관행에 절망했던 그녀는 미국에서 진정한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회복하려 했다.

    기대와 희망으로 시작한 뉴욕의 거대한 빌딩 숲과 거리를 비롯해 모든 것이 그녀에게 새롭고 신비한 것으로 다가왔다. 뉴욕 거리에 내버려진 가구에서 아파트 전체가 버려진 듯한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그녀는 프랑스에서는 느끼지 못하던 자유를 만끽하면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그림에서 조각으로 이동시킨다.

    상처를 ‘아름다운 힘’으로 빚어낸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
    그녀에게 조각은 그림과 마찬가지로 치유의 도구였다. 그녀로서는 두려움으로부터 힘을 얻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다. 돌을 쪼고 나무를 깎고 천을 바늘로 이어붙이면서 감정의 균형을 찾았고 용서와 관용에 도달했다.

    ‘나는 내 조각작품에서 지난날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말하고 싶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는) 두려움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두려움은 가장 나쁜 것이다. 우리를 마비시킨다. 나는 조각을 통해 두려움을 다시 체험하고 그것에 물리적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그것(두려움)을 잘라내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조각은 내가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측면에서 과거를 보게 한다.’

    부르주아는 프랑스 입체파 작가 페르낭 레제(1881~1955)에게 배우면서 조각에 눈을 떴다. 그는 그림에서 조각으로 작품세계를 옮긴 이유에 대해 “조각은 창조자와 관람자의 경험이 동반돼야 한다. 당신은 조각작품 주위를 걸어 다닐 수 있고 작품을 옮길 수도 있다. 조각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만질 수도 있다. 조각의 이런 점은 그림의 환상이 가질 수 없는 리얼리티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리석에서 입방체를 만들어낸 뒤 다시 공(球)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조각에 쓰이는 재료는 그만의 고유한 생(life)이 있다”며 “나는 재료의 이런 저항과도 싸워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녀는 서른여덟이 되던 해인 1949년 뉴욕의 페리도 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그녀의 조각은 재료가 다양해지고 주제가 과감해진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쳐, 70년대에는 급속도로 부상한 페미니즘 열풍과 함께 더욱 강렬하고 파격적인 내용을 담게 된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이 정점에 다다른 ‘아버지의 파괴’나 ‘저녁식사’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남편이 사망한 이듬해에 제작된 이들 작품에서 부르주아는 라텍스와 석고를 이용해 짐승의 핏빛 내장과 엉덩이 허리 다리 형상들을 여기저기 버리듯 배치했다. ‘저녁식사’는 그 신체 부분들이 아버지의 사지이며 그것을 가족만찬에서 온 가족이 먹는, 즉 아버지를 잡아먹는 장면임을 암시한다.

    1970년대 말부터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루이스 부르주아는 1982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여성 회고전을 계기로 국제적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후 미국과 유럽, 남미와 일본 등지에서 여러 차례 회고전을 가졌으며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그녀의 작품은 현재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주요 컬렉션들에 소장돼 있다. 학계(예일대학과 매사추세츠 미술대학)로부터는 명예 학위를, 미국과 프랑스 정부로부터는 문화훈장을, 일본문화협회로부터는 세계문화상을 수상하는 등 작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으며, 고령에 이르러서도 작업에 대한 끊임없는 의욕을 드러냈다.

    ‘바늘’과 ‘거미’의 모성

    그녀의 예술세계가 오랜 기간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노년에 접어들면서 던진 용서와 화해, 그리고 여자로 산다는 것에 대한 애정과 감사 때문이었다. 그때껏 억압으로만 여겨오던 여성의 삶을 남자와 비교해 열등하거나 주눅 든 존재가 아니라고 깨달으면서 그녀의 작품에는 새로운 재료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게 ‘바늘’이다.

    ‘내가 어렸을 적 우리 가족 중 여자들은 모두 바늘을 사용했다. 나는 항상 바늘의 매력과 마술적 힘에 끌려 있었다. 바늘은 손상을 치유하는 데 쓰인다. 그것은 관대하다. 결코 호전적이지 않다. 그것은 핀이 아니다.’(작가의 말 중에서)

    ‘슈와지 I’이란 제목이 붙은 그녀의 작품엔 커다란 단두대에 목을 자르는 칼이 아니라 대형 바늘이 매달려 있다. 슈와지는 그녀가 어릴 때 살던 곳의 지명이다.

    상처를 ‘아름다운 힘’으로 빚어낸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

    부르주아에게 그림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상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치유책이었다. 초창기 그녀는 그림들에서 여인의 얼굴을 집으로 대체하고(여자는 집을 지키는 존재임을 상징한다) 팔다리만 그려놓은 ‘집-여인’시리즈를 통해 여성의 정체성이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제한됨을 암시했다.

    작가는 바늘이야말로 쓸모없는 물건을 유용한 것으로 변모시키고 파괴된 것을 다시 이어 새롭게 만들어주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어릴 적 태피스트리를 수선하면서 늘 가까이하던 물건인 ‘바늘’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기점으로 분노, 증오와 같은 과거의 심리상태를 극복하고 용서와 포용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작품을 단지 남이 보기 좋아하는 형태로 만든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과 대화하며 그것을 마치 이야기처럼 남에게 풀어내는 인문학적 방식을 취했다. 이는 워낙 난해해서 우리의 일상과는 전혀 관계없다고 여겨지던 현대미술이 ‘삶과 분리되지 않은 것’임을 보여줬다.

    그녀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마망(Maman·거미)’(1996)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서울의 신세계백화점과 한남동 리움미술관에도 설치된 이 작품은 높이 3.7m에 달하는 대형 브론즈다. 거미의 형상이 기괴하면서도 압도적이지만 알을 품은 암컷의 모성(母性)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앞서 언급한 ‘아버지의 파괴’가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면 ‘거미’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담은 작품이다. 부르주아에게 아버지는 상처와 억압을 주는 존재였으나, 어머니는 참을성 있는 이성적인 사람으로 정신적인 친구였다. 이러한 어머니를 자신의 몸에서 실을 직접 자아내 보호구역을 만들어가는 거미에 비유해낸 것이다.

    실제로 작가는 ‘마망’에 대해 “태피스트리를 수선하던 나의 어머니를 그린 것”이라면서 “어머니는 거미처럼 태피스트리를 실로 짜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병이 든 뒤 내가 어머니를 돌봐야 했다”면서 “마망은 (어머니의) 연약함과 강인함을 같이 보여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사실 ‘마망’은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을 걱정하는 작가 자신, 나아가 모든 어머니의 자화상을 표현한 것이다.

    한편 오랫동안 폐기종을 앓던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사용한 의학기구를 이용한 작품 ‘부항’이나 많은 유방으로 자식에게 자애로운 어머니를 상징한 ‘유방’ 같은 작품에선 그녀가 억압으로 생각하던 여성적 정체성을 모성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내면서 성적 콤플렉스를 이겨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또 1990년 중반부터 천을 꿰매는 작업도 했다. 꿰매는 작업 역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의미에서 작가에게 매우 긍정적인 작업 방식이었다.

    여성 속 남성, 남성 속 여성

    말년의 부르주아가 꽃 그림에 치중한 것 역시 따뜻한 마음에 충만한 에너지를 그대로 표현한다. 그녀는 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꽃은 보내지 못한 편지와도 같다. 아버지의 부정, 어머니의 무심을 용서해준다. 꽃은 내게 사과의 편지이자 부활과 보상의 이야기이다.”

    그녀가 그린 붉은색 꽃을 들여다보면 5개의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가족을 표현한 것이다. 뿌리는 하나지만 거리를 두고 각자 존재하는 모습을 통해 핏줄의 애잔함과 관계에서 빚어지는 잔인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또 ‘나는 아직도 성장하고 있어!!! ’라는 작품에서 보이는 칡덩굴 같은 거친 가지를 통해 생명의 강인함과 무한함을 나타냈다.

    그녀의 작품세계는 남자에 대한 증오에서 시작됐지만, 훗날 그것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두 연민의 존재라는 자각으로 발전한다. 여성은 연약하며 상처를 받기 쉬우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변할 수 있으며, 반대로 강한 남성도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을 보는 작가의 눈은 나아가 여성은 남성성을, 남성은 여성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 ‘남녀는 적이 아니라 상생의 관계’임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경지에 이른다. 남녀의 생식기가 적나라하게 병치된 ‘개화(開花)하는 야누스(Janus fleuri)’ 같은 작품은 페니스와 질이 절묘하게 결합된 조각이다.

    그러나 제목인 ‘야누스’에서 암시하듯이 양면성 혹은 이중성은 부르주아의 예술세계에서 발견되는 주요한 특성이다. 즉 남성과 여성뿐 아니라, 인간과 동물, 폭력과 에로틱함, 가학대증과 피학대증, 그리고 내부와 외부라는 이원적 카테고리는 그녀의 조각에서 자주 결합된 양상으로 나타난다.

    상처를 ‘아름다운 힘’으로 빚어낸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

    자신의 대표작 ‘거미’앞에 서 있는 부르주아. 형상이 기괴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담은 작품이다. 부르주아에게 있어 아버지는 상처와 억압을 주는 존재였으나, 어머니는 참을성 있는 이성적인 사람으로 정신적인 친구였다. 이러한 어머니를 자신이 실을 직접 자아내면서 보호구역을 만들어가는 거미에 비유했다.

    “아직 말하고 싶은 게 많다”

    작가가 죽기 5개월 전인 지난 1월 ‘조선일보’ 손정미 기자는 그녀의 뉴욕 작업실을 찾았다. 겨울 해가 기울어 어둑해질 무렵, 좁은 복도를 지나 응접실로 들어가자 휠체어에 앉은 부르주아가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니 앙상하지만 어머니에게서 느껴지는 온기가 전해졌다고 한다. 작가는 기자의 손을 잡고 “오, (손이) 차다”며 테이블에 놓인 코냑을 가리키며 권했다고 한다(아래는 손 기자의 기사 인용).

    낡은 소파에는 부르주아가 막 끝낸 수채화가 물기를 머금고 올려져 있었다. 부르주아는 올해 한국 나이로 100세를 맞았지만 오전이면 거의 거르지 않고 2시간씩 작업을 하고 있다. 루이스 부르주아 스튜디오 디렉터인 제리 고로보이씨는 “루이즈는 아직도 건강한 편”이라면서 “불면증 때문에 매일 컨디션이 다르지만 오전에는 대부분 작업을 한다”고 말했다.

    부르주아가 불어와 영어를 섞어서 하는 말은 비교적 또렷하게 들렸다. 작업 테이블에는 물감이 묻어 있고 드로잉에 쓰는 지우개와 연필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벽에는 영국 작가인 데미언 허스트와 U2의 보노가 부르주아를 찾아와 함께 찍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건강 때문에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있는 부르주아는 “점심을 먹으면서 CNN을 본다”며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 위한 것이고, 이것들을 작품에 반영한다”고 말했다.

    부르주아의 응접실은 ‘살롱(salon)’으로 불리며 미술계를 비롯해 다양한 예술가들이 모이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조각가를 꿈꾸는 젊은 학생이 작품을 들고 와서 대가에게 보이기 위해 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그의 살롱을 찾은 사람으로는 젊은 예술가뿐 아니라 명성을 얻은 앤터니 곰리를 비롯해 사진가 낸 골딘, 전위미술가 리처드 롱, 세계적인 안무가 피나 바우시 등이 있다.

    부르주아는 “살롱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면서 “살롱에 모인 사람들을 통해서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예술가들은 고립돼 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서로 어려운 점을 나눠야 한다”고 말했다.

    (중략) 부르주아는 “예술가가 된 것은 축복이었다”면서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모든 기억이 내 작품 속에 녹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예술가가 표현하는 것은 진실해야 한다”면서 “자신이 원하고 느끼는 것을 표현할 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도 작품을 표현하는 방법이나 제작과정에서 사용하는 재료나 테크닉은 계속 변화할 것”이라면서 “그러나 결국 예술은 인간의 감정에 관한 것이고, 이 점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로 몇 개월 뒤 닥쳐올 죽음의 그림자를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일까. 당시 부르주아는 “아직도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고 말해야 할 것이 많다”면서 “작품은 나를 편하게 해주고 나 자신을 깨닫게 해준다”고 말했다고 기사는 전한다.



    ●‘기억의 공간’(삶과꿈)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작품세계 연구: 연작을 중심으로(2002·임현숙·홍익대학교 석사눈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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