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호

간첩죄 기소된 한국계 美 북핵 전문가 스티븐 김

“10여 년간 미 정부 위해 모든 걸 바쳤다. 부당하다”

  • 천영식│문화일보 워싱턴 특파원 youngsikchun@gmail.com│

    입력2010-12-02 16: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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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계 미국 북핵(北核) 전문가 스티븐 김(43·한국명 김진우)은 ‘독특한’ 인물이다. 그와 함께 근무했던 미 국무부, 국방부, 리버모어 연구소 동료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영변을 손바닥에 올려놓을 정도로 미 정부 내 최고의 북핵 정보 전문가인 그는 러시아와의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및 중국의 핵무기 운용, 이란, 시리아, 파키스탄 등의 핵무기 개발상황까지 포함한 국제 핵문제에 정통하다. 미(美) 최대 국립 핵연구소인 로렌스 리버모어 연구소 소속으로 국무부, 국방부뿐 아니라 부통령,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과 만나 미국의 국제적 핵정책을 조언할 만큼 활동 폭이 넓었다. 미 국가정보국(DNI) 산하 16개 정보기관에 소속돼 있지 않으면서도 더 많은 정보를 갖고 분석할 줄 아는 진정한 정보 분석가였다.

    한국 태생으로 한국어와 영어에 모두 능한 그는 자신의 직업적 목적을 위해 북한 방언까지 공부했다. 조지타운대에서 유럽 외교사를 전공하고 하버드대 석사, 예일대 박사를 거쳐 미 정부에서 두각을 드러낸 에너지 넘치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것도 미 정부 내 일반 공무원이 아니라, 정보 분석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몇 안 되는 한국계 중 한 사람이다. 그의 활동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고, 공개되지도 않았다. 북한 정보 유출혐의로 간첩죄에 따라 미 법무부로부터 기소되기 전까지는 .

    “폭스뉴스에 유출된 정보는 상식 수준”

    스티븐 김이 간첩죄로 기소된 이유는 2009년 6월11일 폭스뉴스 기사 때문이다. 제임스 로젠 기자가 쓴 이 기사는 북한이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 이후 추가 핵실험 등으로 대응할 것이란 내용을 담고 있다. 폭스뉴스는 미 중앙정보국(CIA)이 취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기사가 작성됐다고 밝혔다. 북한은 이미 5월25일 2차 핵실험을 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6월12일 대북 제재안을 통과시킬 예정이었고, 기사는 전날 게재된 것이다. 내용은 전혀 새로울 게 없었다.



    그러나 정보유출에 민감한 오바마 행정부는 당장 수사에 착수했다. 북한 핵실험과 유엔 제재 등을 둘러싸고 예민한 상황에서 나온 북한 관련 기사는 오바마 행정부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던 것이다. 또 오바마 행정부와 대립하고 있는 폭스뉴스에 특종성 뉴스가 게재된 것도 수사 촉발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이미 4월 국가안보국(NSA) 고위간부 출신인 토머스 드레이크를 기밀 정보 누출 혐의로 기소하는 등 정보유출에 날을 바짝 세우고 있었다.

    이날 폭스뉴스에 게재된 내용은 사실 북한이 이전부터 공개적으로 주장해왔던 내용이다. 북한은 4월29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공화국 최고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부득불 추가적인 자위적 조치들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며 “여기에는 핵시험과 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시험들이 포함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미 추가 핵실험을 예고하고 나선 것이다.

    북한은 2차 핵실험이 벌어지고 난 다음인 5월29일에도 외무성 성명을 통해 “국가의 최고이익이 침해당하는 경우 핵시험이나 미사일발사를 얼마든지 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정당방위조치는 국제법에도 저촉되는 것이 아니다”며 “유엔안보리가 도발을 해오는 경우 그에 대처한 더 이상의 자위적 조치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더 이상의 자위조치’란 3차 핵실험에 대한 경고로 읽혔다.

    6월13일 외무성 성명 또한 “추출되는 플루토늄 전량을 무기화하고, 우라니움(우라늄) 농축작업에 착수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추가 핵실험 여부를 넘어선 핵무기 대량생산에 나서겠다는 선언이었다.

    변호사 “공안정국 조성”

    FBI도 이 한 건을 갖고 스티븐 김을 기소하는 것은 무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 기소 후에도 시간을 계속 끌면서 새로운 혐의를 찾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올해 10월13일 첫 재판에서 검찰 측은 “기밀 정보를 담은 스티븐 김의 하드 드라이브에 대한 조사를 아직 끝내지 못했다”면서 추가 수사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미 수사착수 1년 이상이 지났고, 기소 후 2개월가량 지난 시점에 나온 발언이었다. 이는 기소 자체가 무리했다는 주장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자 스티븐 김이 억울한 희생양이란 동정여론이 높아졌다. 미 NBC 방송의 마이클 이시코프 기자는 10월18일 기사에서 “오바마 행정부는 ‘워싱턴포스트’(WP) 밥 우드워드 기자가 펴낸 책 ‘오바마의 전쟁’에서 정부 고위층이 기밀을 누설한 것은 문제 삼지 않고 스티븐 김과 같은 실무관리의 기밀누설에는 강경대응하고 있다”며 이중잣대에 따른 과잉대응을 문제 삼고 나섰다.

    앞서 NSA의 드레이크는 10건의 기밀 유출 혐의를 받았지만, 스티븐 김은 1건에 불과한데도 간첩죄를 적용한 데 대해 부당하다는 반론이 이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소수민족 출신이기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당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됐다. 스티븐 김이 기밀 서류를 건네줬다는 어떠한 물증도 없다. 변호사 애비 로웰은 “증거 없이 무리하게 기소한 것은 공안정국을 조성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했다.

    첫 재판 당시 만난 스티븐 김은 “억울한 점은 많지만, 현재로선 말을 하기 곤란하다”면서 “10여 년간 미 정부를 위해 모든 걸 바쳤고, 한 번도 정보유출 의혹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부당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변호인들은 재판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 스티븐 김의 언론접촉을 차단했다. 대신 로웰 변호사는 “재판이 본격화되면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북한 관련 기밀 정보들이 추가로 노출될 수 있다”고 예고했다.

    미국 내 북한 정보를 둘러싼 최대 사건으로 분류되는 이번 사건은 새삼 스티븐 김의 역할과 미국이 갖고 있는 북한 정보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고 있다. 스티븐 김은 미 정부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힐의 주장 받아들일 수 없다”

    2008년 12월10일 6자회담이 벌어지고 있던 중국 베이징으로부터 긴급 전문이 날아들었다. 크리스토퍼 힐 전 미(美)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사이의 마지막 의견조율에 관한 내용이었다. 힐은 “6자회담이 완전히 깨질 상황에 이르렀다”면서 “북한이 시료채취(sampling)를 빼지 않으면 최종 협정에 참여할 수 없다고 최후통첩을 해왔다”고 밝혔다. 힐은 그러면서 “현 단계에서 그동안 협상을 수포로 돌리지 않으려면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마지막 북핵 폐기 협정문을 둘러싸고 미국 측의 양보를 건의하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6자회담은 사실상 힐의 독무대였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찰떡궁합이 된 힐은 국무부 부장관이나 차관, 여타 부서와의 조율 없이 대부분의 사안을 장관의 양해 아래 직접 결정했다는 게 당시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감히 힐에게 ‘안 된다’고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이게 최종 협정이기 때문에 국무부 관련 부서의 동의가 필요했다. 특히 협정 검증과 이행을 담당하는 국무부 검증준수이행국(약칭 검증국·Bureau of Verification, Com-pliance and Implementation, 현재는 군축 Arms Control까지 포함한 부서로 확대 개편됨)으로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시료채취는 이미 국무부 내부에서 한바탕 격론을 벌인 뒤 채택된 미 정부의 공식 입장이었다.

    힐은 막판에 북한의 마지막 요구라는 점을 내세워 이를 삭제하려 했다. 국무부 관련 부서들은 그동안의 관행대로 힐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태여서 “어쩔 수 없다”며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대로 시료채취 없이 6자회담 협정이 끝날 상황이었다.

    이때 “그건 안 된다”고 유일하게 반기를 들고 나선 게 검증국이었다. 검증국은 “시료채취 없이는 현재 북한 핵개발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향후 북한이 핵개발 시도를 다시 할 때, 그것이 과거의 연장인지 아닌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과학적 근거를 가질 수 없다”면서 협정 무용론을 제기했다. 그동안 침묵을 지켜오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가 검증국의 주장에 가세했다. 6자회담이 열린 뒤 처음으로 힐의 제안이 미 정부 내에서 거절된 것이다. 힐은 자신이 그토록 염원했던 최종 협정을 이루지 못한 채 다음날인 11일 6자회담을 종결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힐의 6자회담 잔치가 빈손으로 막을 내린 순간이다.

    힐과 검증국은 불편한 천적

    검증국은 당시 폴라 드서터 차관보(Assistant Secretary)가 이끌고 있었고, 대북 정책에서는 전적으로 스티븐 김의 입장이 반영됐다. 스티븐 김은 검증국의 정보총괄 선임 보좌관이었다. 검증국은 국제적 조약과 협약, 협상 등이 제대로 맺어졌는지, 잘 이행되고 있는지 등을 지속적으로 평가하는 기관이다. 현재 미국이 러시아와 체결한 전략무기감축협정도 검증국 차관보가 협상 책임자일 만큼 막강한 자리다. 국무부의 한 관계자는 “한국 출신이라는 스티븐의 독특한 배경으로 북핵 협상 당시 검증국의 위상이 아주 강화됐다”면서 “스티븐이 고안한, 북한의 북핵프로그램 폐기 선언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기 위한 검증플랜이 차관보에게 전해졌다”고 말했다.

    힐과 검증국 사이의 갈등은 오랫동안 계속된 것으로 전해졌다. 2008년 초 북한은 미국의 집요한 시료채취 요구에 영변에서 나온 것이라며 알루미늄 튜브를 하나 건넸다. 자신들의 핵물질 개발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여기서 고농축우라늄(HEU)의 흔적이 발견됐다. 미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북한은 그동안 영변 핵시설이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이라고 밝혔고, HEU 개발을 인정하지 않았다. 북한이 건네준 튜브에서 HEU 흔적이 발견됐다면 당연히 큰 문제였다. 북한이 그동안의 태도와 달리 HEU를 개발해왔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영변 핵시설이 플루토늄 재처리시설이라고 주장한 전제도 무너진다. 영변에서 HEU까지 만들어내고 있거나, 아니면 영변 이외의 또 다른 핵시설이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힐에 대한 불신이 싹튼 이유 중 하나다.

    검증국을 중심으로 미 정부 내에선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고 조사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힐은 “위험하지 않은 저농축우라늄”이라 일축했다. 북한이 저농축우라늄이라고 해명했기 때문에 힐은 이를 빌미로 협상을 깨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후 북한이 성 김 대북정책특사에게 건넨 2만여 장의 관련 서류 속에서도 HEU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으나, 이 역시 협상의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려는 힐의 주장으로 흐지부지됐다. 물론 힐의 주장대로 저농축우라늄일 수 있다. 미 과학자들도 북한이 20개 정도의 원심분리기를 소유, HEU를 뽑아내고 있으나 핵무기를 만들 정도는 아닌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이 건네준 물건에 잇따라 HEU 흔적이 발견된 것은, 북한이 미국과 협상을 벌이면서도 핵개발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북한은 핵협상 중에 이미 냉각탑폭파 등으로 핵개발을 중단한 상태라고 변명해왔다. 스티븐 김 등 검증국 인사들은 냉각탑이 파괴됐어도 영변 옆으로 흐르는 강물을 통해 충분히 영변 핵시설을 가동할 수 있다고 경고해왔다. 협상의 약점을 지적한 것이다.

    미 검증국은 미 국무부 내에서도 가장 고급 정보에 접근이 가능한 부서다. 미국의 각종 국제적 핵조약 및 무기감축조약의 타당성과 적법성 등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부시 정부 시절 검증국의 역할과 위상은 계속 커져왔다. 검증국에서 정보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던 스티븐 김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스티븐 김의 동료에 따르면 그는 영변 핵시설의 장단점과 현황까지 소상히 파악할 정도의 치밀함으로 북핵 국면에서 검증국의 위상과 역할을 강화시켜왔다.

    천재만 뽑는다는 마셜팀 일원

    스티븐 김은 국방부 ‘마셜팀’ 일원으로 합류하면서 그 진가가 높아졌다. 마셜팀은 미 정부의 대표적인 비밀조직으로 미 국방장관 직속의 총괄평가국(Office of Net Assessment)을 의미한다. 이 조직의 책임자는 앤드루 마셜(88)인데, 1973년 이 조직을 만들어 37년간 같은 곳에서, 같은 직책으로, 같은 일을 하고 있다. 미 정부 내에서도 앤드루 마셜의 전설적인 이름은 알려져 있지만, 그가 무엇을 하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미 군사전략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마셜은 제임스 슐레진저 전 국방장관의 친구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 시절 슐레진저가 국방장관에 취임하면서 마셜에게 장관 직속으로 총괄평가국을 만들어주었다.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말고 군사전략을 입안하라는 것이었다. 마셜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있던 헨리 키신저가 그를 활용하고 지원했다.

    미 국방부 및 국무부에서 전략가라면 모두가 마셜 밑으로 들어가고 싶어했다. 마셜팀이 작성하는 보고서는 국방장관과 백악관만이 볼 수 있다. 마셜팀은 6명 정도로 운영되고 있다. 당연히 마셜팀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만큼 힘들다. 이 때문에 마셜은 천재만을 뽑는다는 소문이 나왔다. 마셜은 팀원을 잘 훈련시켰고, 마셜팀을 거쳐간 인사들은 정부와 의회 내 요직을 차지, 마셜의 파워는 더욱 커져갔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이 취임 후 마셜을 해고하려 했다가 의회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일화도 있다.

    스티븐 김은 2007년 6월부터 2008년 6월까지 1년간 마셜팀 일원으로 일했다. 미 정부 관계자는 “마셜의 파워가 얼마나 강력한지는 아는 사람만 안다”면서 “모든 사람이 마셜과 일하고 싶어하지만, 그는 아무나 뽑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셜은 미 정부 안팎의 군사 및 정보 전략가 가운데서 팀원을 발탁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스티븐 김이 마셜팀에서 연구한 것은 중국핵 운용의 지휘체계에 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딕 체니와 헨리 키신저가 직접 찾아

    워싱턴에서 스티븐 김의 명성은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입소문을 통해 확산됐다. 미 국방장관 직속기관인 국방정책자문위원회(Defense Policy Board Advisory Committee)가 2005년 스티븐 김에게 북한체제의 안정성에 대한 브리핑을 부탁했다. 12명인 당시 자문위원에는 키신저 전 장관과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 슐레진저 전 국방장관 등 유명한 사람이 즐비했다. 비중 있는 모임인 만큼 통상 차관급 이상의 정부 인사들이 연사로 초청되는데, 당시 스티븐 김의 발표를 눈여겨봐둔 크리스 윌리엄스 자문위원장이 특별히 그를 초청한 것.

    2시간여의 브리핑이 끝나자 키신저는 “내가 지금까지 들은 브리핑 중 최고였다”고 찬사를 보냈고, 깅그리치는 “35년간 외교에 관심을 두었지만 이런 발표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한 달 뒤 키신저가 스티븐 김에게 전화를 걸었다. 키신저는 “내 친구 조지 슐츠(전 국무장관)의 병문안을 위해 스탠퍼드에 있는 그의 자택으로 간다”면서 “조지 앞에서 브리핑을 한번 해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다. 키신저는 당시 스티븐 해들리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존 니그로폰테 국가정보원장(DNI)에게 전화를 걸어 스티븐 김의 참석을 허용해줄 것을 요청했다. 리버모어 연구소가 국립 연구소이기 때문에 정부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스티븐 김은 북한체제를 중심으로 당시 45분간 브리핑을 하고 4시간동안 대화를 이어갔다. 키신저와 슐츠는 스티븐 김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았던 것이다. 당시 브리핑에 동석했던 한 관계자는 “키신저와 슐츠가 스티븐의 통찰력에 얼마나 감명받았는지를 직접 목격했다”면서 “두 사람은 정부 고위관계자들이 스티븐의 브리핑을 들어야 한다고 확신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키신저가 슐츠에게 “딕(체니)이 이걸 들어야 해”라고 말했고, 슐츠는 “그래, 대통령도 마찬가지야”라고 말했다고 그 참석자가 덧붙였다.

    그 얼마 뒤 딕 체니 부통령실에서 전화가 왔고, 바로 다음날 해들리 백악관 안보보좌관실에서도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당시 한창 실세였던 체니는 스티븐 김에게 “키신저가 워낙 칭찬을 해서 듣고 싶었다”고 말했고, 20분 예정이던 브리핑이 45분까지 연장됐다. 해들리 보좌관도 “네가 나라면 어떻게 대통령에게 권유하겠느냐”고 묻고, 스티븐 김의 얘기를 일일이 볼펜으로 메모했다.

    미 해군연구소서 전쟁 전략 배워

    스티븐 김의 또 다른 특이한 이력은 미 해군전략연구소(Center for Naval Analyses) 근무다. 스티븐 김은 2000년 8월 예일대 박사과정을 마친 뒤 첫 직장으로 이곳을 택했다. 이 연구소는 군사전략을 연구하는 곳이다. 단순히 연구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 경험을 토대로 전쟁 전략을 입안하는 곳이다.

    당시 그가 맡은 프로젝트는 나토(NATO)군이 1999년 공습한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대한 평가작업이었다. 해군전략연구소는 나토군 공습 당시 지휘관들의 토론과 작전 상황 등을 넘겨받아 평가작업을 벌였다. 웨슬리 클라크 나토군 사령관과 마이클 쇼트 미 공군사령관 사이에 벌어졌던 생생한 논쟁 등을 비디오로 보면서 스티븐은 전쟁 전략을 몸으로 습득했다.

    스티븐 김에게 주어진 첫 과업은 왜 유고슬라비아 공습에 참가한 5개국 사이에 작전차이가 발생하는지에 대한 분석이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이 유고 공습에 동참했다. 이들은 작전 철학이 달랐고, 무기 선택도 달랐다. 이 때문에 5개국 사이에서는 팽팽한 긴장이 조성됐다.

    스티븐 김은 당시 이들 국가들이 폭격한 장소와 무기 등을 토대로 ‘지배자-피지배자’ 가설을 만들어냈다. 이는 우선 지배자와 국민의 관계가 밀접하면, 지도자가 작전 수행에 여유를 갖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과 영국이 이에 해당됐다. 반면 나치즘과 파시즘, 잦은 혁명을 거친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는 달랐다. 스티븐은, 지도자와 국민 사이에 긴장관계가 조성돼 있고, 이런 국가의 지도자는 전쟁수행에서 소심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들 국가는 주변 민간 시설물에 대한 피해를 우려, 효과가 큰 목표물 공격을 주저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후유증이 없는 주변 산업시설물 공습을 선호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분석은 국방부에 보고돼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스티븐 김의 이력은 이처럼 군사전략 습득에서 시작됐다.

    군사전략과 관련해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스티븐 김이 국무부에 근무하던 2009년 5월 미 해군대학(Naval War College)에선 가상 전쟁게임이 벌어졌다. 미 해군대학은 전쟁기술을 개발하는 대학으로, 여러 가지 가상 전쟁 게임을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세계 각국의 군 관계자들이 이를 보기 위해 모여들 정도.

    당시 전쟁게임은 미 전략사령부(Stra-tegic Command)와 공동 주최한 것으로 미국과 중국 간의 대결이었다. 물론 중국이라는 이름을 붙이진 않았다. 레드팀과 블루팀의 대결이었다. 레드팀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국가이고, 블루팀은 미국이었다. 각 부처 관료 및 정보기관 관계자, 일부 민간기관 파견자 등 200여 명이 참여했다.

    간첩죄 기소된 한국계 美 북핵 전문가 스티븐 김

    스티븐 김이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2009년 6월11일자 폭스뉴스 기사.

    레드팀과 블루팀은 매 순간, 상대의 반격에 맞서 최선의 대응책을 짜내기 위해 작전회의를 벌였다. 그리고 국민, 언론, 해외반응 등 실제 고려해야 할 모든 상황을 적용해 판단을 내렸다. 이런 판단을 내릴 때 피해가 얼마나 될지, 이게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군 사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등이 계산됐다. 특히 레드팀 리더는 중국이 운용가능한 핵 시설, 미국의 약점 등을 파악해 적절한 핵전략을 구사하는 데서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는 정보전이자 군사전략 대결이었다. 티격태격,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양국 핵전쟁은 사흘 만에 레드팀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가상 전쟁이 끝나자 참가자들은 승리한 레드팀 리더를 향해 기립박수를 보냈다. 스티븐 김에 대한 찬사였다.

    스티븐 김은 9세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했다. 서울대 상대를 나온 아버지는 자식교육에 대한 집념으로 이민을 강행했다. 스티븐 김은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스티븐 김의 아버지는 11세 된 아들에게 “오늘 뉴욕타임스의 사설 내용이 뭐냐”며 “그걸 모르면 밥을 먹을 자격이 없다”고 식탁교육을 시켰다. 이민 초창기 언어장벽과 소수민족출신이라는 장애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스티븐 김에게 긴장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일대 졸업 후 대학교수 포기하고 연구소로

    부모는 그가 법학을 공부하기 원했지만 그는 외교사를 공부했다. 가톨릭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명문 사립고교인 포드햄 프렙 스쿨을 졸업한 그는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라”는 예수회 교육철학을 대학 선택과정에서 실천에 옮긴 것이라고 말했다. 한 살 연상인 그의 누나는 컬럼비아대를 나와 조지타운대 로스쿨을 거쳐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영국의 시인 T.S.엘리엇과 윌리엄 예이츠에 흠뻑 취한 스티븐 김은 역사를 좋아했다. 특히 그는 빈회의(나폴레옹과 벌인 전쟁에서 이긴 뒤 1815년 전후체제를 논의)의 주도멤버인 메테르니히와 탈레랑, 캐슬레이 3인을 좋아했다. 이들 3인방은 냉철한 현실 분석으로 외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들로, 스티븐 김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다. 스티븐 김의 누나는 “스티븐이 어릴 때 미국 아이들에게 차별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들과 경쟁해서 이기길 간절히 원했다”면서 “학부에서 한국관련 전공을 선택하지 않고, 미국 주류 학생들이 많이 택하는 유럽 역사를 공부한 것도 자존심이 강해서였다”고 말했다.

    하버드대에서 정치학으로 석사과정을 마친 그는 예일대 박사과정에 진학, 유럽 외교군사 역사를 전공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지도교수들이 “한국말을 잘하니 독보적인 학문 업적을 남기려면 그것을 활용하는 게 좋다”는 권유를 받고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당시 그에게 조언을 해준 교수들은 ‘강대국의 흥망’을 쓴 폴 케네디, ‘냉전의 역사’를 쓴 존 루이스 개디스 등이다.

    스티븐 김은 이승만 전 대통령과 한미동맹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티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국내정치에서는 실패했지만, 외교에서는 뛰어나 미 정부인사들에게도 헌법정신을 들먹이며 강하게 압박하는 ‘전략적 외교가’였다고 평했다. 그는 또 이승만이 미국을 잘 알고 활용한 것이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뿌리내릴 수 있었던 한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스티븐의 누나에 따르면 스티븐 김은 박사학위 취득 후 뉴욕주립대에서 종신(테뉴어) 교수직을 제의받았지만 역사에 안주하기보다 역사를 만드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아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후 국가정보 및 군사전략 분야 연구소를 찾다가 미 해군전략연구소에 몸담게 됐다. 약 2년 후 그는 리버모어 연구소의 영입제의를 받아들여 직장을 옮겼다. 리버모어 연구소는 핵무기를 개발한 미 최대의 국립 핵 연구소다. 여기서 핵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습득한 스티븐 김은 북핵문제가 주요 이슈로 제기된 뒤 북핵 분석에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국방부와 국무부 등 10여 개 정부기관에서 파견형식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리버모어 연구소의 동료는 “스티븐은 어려움을 겪은 탈북자들을 만나면서 큰 자극을 받은 뒤 북한을 더욱 열심히 연구했다”면서 “북한체제의 문제점을 연구하던, 그런 사람이 간첩죄로 기소된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리버모어연구소는 기소되면 해고하는 전례를 뒤엎고, 11월 초 이례적으로 스티븐 김의 신분보장을 약속했다.

    국무부 동료 중에도 신분의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스티븐 김의 구명운동에 나서겠다는 사람이 많다. 국무부의 한 동료는 “의례적인 분석을 하던 기존 사람들과 달리 스티븐은 정책결정에 꼭 필요한 정보를 치밀하고 간결하게 정리하는 능력이 있었다”면서 “이것이 국무부에서 그의 정보 분석을 신뢰했던 이유”라고 말했다. 그는 “김정은으로 세습이 이뤄진 다음 ‘북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로이터통신 기사를 보면서 스티븐이 먼저 떠올랐다”면서 “미 정부의 아시아 관여(en-gagement)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스티븐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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