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중국은 어떨까. 천안함 사건 이후 진행상황에서 확인됐듯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은 반드시 미국의 개입을 불러오고 일본의 군비확장을 부추긴다. 더욱이 서방언론이 북한의 도발을 중국의 지나친 관용 탓으로 비난하는 분위기도 베이징의 정책결정자들에게는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 아직은 오로지 경제성장에만 몰입하기를 원하는 중국으로서는 이러한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 상황을 결코 바라지 않고, 위기의 발생 자체를 적극적으로 회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연평도 포격에 얽힌 북한의 대외전략 포커스는 바로 이 부분에 맞춰져 있다. 동북아에서 긴장과 위기를 불러일으킬 힘이 자신에게 있음을, 그래서 미국의 항공모함이 중국의 코앞까지 진출하는 상황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지렛대를 갖고 있음을 중국에 주지시킨 것이다. 베이징이 이러한 북한의 메시지를 간파했다면 후 주석은 북·중 간 당 고위층 인사의 상호방문을 통해 대외적으로 ‘6자 긴급협의 개최’를 제의하면서 김정일의 ‘청구서’를 진지하게 재검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푸에블로호의 선례
![[심층분석] 미·중 대립구도 이용해 베이징 압박하는 ‘전쟁 비즈니스’](https://dimg.donga.com/egc/CDB/SHINDONGA/Article/20/10/12/22/201012220500001_3.jpg)
평양의 근로자들이 1968년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이 나포한 미국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구경하고 있다.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집권한 후 북·소관계가 회복되자 1965년부터 1968년 사이 소련의 대북지원은 조금씩 증가하기 시작했다. 1966년 북한은 소련에 발전소, 금속가공공장, 알루미늄 공장, 암모늄 공장 건설을 지원해달라고 요구했다. 심지어는 원유저장시설도 없는 형편에 석유정제공장까지 요청했다. 모스크바 근처에 공산품 공장을 세워 대외선전용 제품을 만들어 소련에 팔 수 있도록 해달라는 제의도 있었다. 중·소 분쟁이 한창이던 상황이다 보니 소련의 정책결정자들은 북한을 중국으로부터 떨어뜨려놓기 위해 일정 수준의 경제적 지원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지만,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1968년 1월23일 미국의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 함정에 의해 나포되는 사건이 터진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미국은 엔터프라이즈호 등 3척의 항공모함을 출동시켰고 오키나와에 있던 공군기들도 남한으로 전진 배치됐다. 한반도에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았다. 미국은 북한의 행동 뒤에 소련의 방조가 있다고 여겼지만, 그러나 정작 북한의 모험적인 도발에 격노한 측은 극동지역에서조차 미국과 대립하기를 원치 않았던 브레즈네프 서기장 측이었다.
브레즈네프는 즉각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소련은 이번 사태와 전혀 무관하며 평화적 해결을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마침 자국 내 반전 열풍 속에서 베트남 구정공세(Tet)의 충격에 휩싸여 있던 존슨 행정부는 브레즈네프의 중재를 받아들였고, 엔터프라이즈 항모가 동해상에서 철수하자 판문점에서는 곧 북·미 협상 테이블이 마련됐다.
이렇듯 김일성 당시 수상은 푸에블로호 나포를 통해 1961년 체결된 조·소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과 1965년의 조·소 군사협정을 시험대에 올렸다.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김 수상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였지만 그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대신 부수상 김창봉을 보냈다.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그와의 장시간 면담을 통해 북한의 긴장완화와 대미협상을 촉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핵무기를 제외한 최신 무기체계의 무상원조는 물론 경제지원에 대한 북한 측 요구를 전폭 수용하는 결정을 내린다. 비록 북한의 행동이 맘에 들지는 않지만, 사회주의 진영의 리더로서 국제주의적 책무를 다한다는 명분을 과시하는 동시에 북한을 달래기 위해 평양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