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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 문명의 교차로에서 ②

도둑질 살육 강간 밥 먹듯 한 켈트 전사(戰士) 유럽통합 이데올로기 되다

  • 고일홍│서울대 HK연구교수·고고학 mahari95@snu.ac.kr

도둑질 살육 강간 밥 먹듯 한 켈트 전사(戰士) 유럽통합 이데올로기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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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질 살육 강간 밥 먹듯 한 켈트 전사(戰士) 유럽통합 이데올로기 되다

‘아스테릭스’의 주인공 아스테릭스는 켈트족이다.

한편 농업 생산성 향상은 사회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인구 증가를 가져왔으며, 이는 다시 농경지의 과도한 경작으로 이어졌다. 이 무렵 나타난 기후 변동으로 환경 조건마저 악화하면서 중·서부 유럽에서 자원에 대한 과도한 경쟁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철기 시대의 고고학 자료를 보면 군사적 갈등 증거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군사적 갈등이 자주 발생하는 상황에선 전장에서의 용맹을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태도는 전사의 삶을 추앙하는 이데올로기로 발전했을 수도 있다.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켈트족 남성에게 전사로서의 사회적 정체성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경제·사회·이데올로기 조건이 갖춰지면서 켈트족 사회를 이루는 독특한 요소가 자리 잡았다. 먼저 눈여겨볼 만한 것이 그들의 ‘전사 문화’다. 켈트족에 관한 로마 기록들을 보면 지역 간 편차는 있겠지만, 상당수 켈트족 남성이 전사 집단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전사로서 사회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장검이나 창, 그리고 방패를 들고 다녔다. 또한 켈트족 전사들의 무덤 발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전사의 모습을 갖춘 채 저승으로 갔다.

노예를 팔고, 술을 사다

켈트족 전사들은 줄곧 전투에 가담했다. 그런데 당시 전투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전투와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즉 켈트족의 전투는 상대방을 완전히 복속하고 전멸할 목적으로 이뤄지는 실제 전투라기보다는, 전사 집단의 전사적 정체성을 표출·재생산하고, 또한 전사 집단 간 힘과 우월함을 견주는 일종의 퍼포먼스인 경우가 많았다. 로마 기록에 이러한 켈트족 전투 모습이 잘 묘사돼 있다. 전투에 가담하는 양측에서는 각각 한 명의 전사가 대표로 나와 싸움을 펼쳤고, 그러는 동안 나머지 전사들은 물론 여성과 아이들까지 주변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자기편의 승리를 응원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전사로서의 정체성을 다양한 물질문화와 퍼포먼스를 통해 과시하고 확인하는 것이 켈트족 전사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켈트족 전사 문화의 이 같은 측면이 구현되는 또 다른 장은 만찬이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켈트족 전사들은 위계를 매우 중요시했다. 따라서 만찬 때 싸움 잘하는 순서로 자리에 앉았고, 고기를 먹을 때도 서열대로 먹었다. 만찬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옛 전투의 용맹스러운 기억을 회고했으며, 이웃 집단들과의 오래된 갈등을 다시금 상기했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복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즉흥적으로 나오기도 했는데, 만찬이 실제로 약탈로 이어지는 예도 빈번했다고 한다.

이러한 왁자지껄한 만찬 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술이었다. 켈트족이 일상적으로 마신 술은 벌꿀을 발효한 미드(mead)와 맥주로, 둘 다 알코올 도수가 낮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선호한 술은 와인이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접할 수 있었던 가장 독한 술이자 보관하기 쉬운 술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옛 켈트족 땅에서 와인을 생산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켈트족이 그렇게도 좋아하던 와인은 어디에서 왔을까? 바로 지중해 세계에서였다.

켈트족에게 와인을 처음으로 소개한 이들은 그리스인들이다. 그리스 지역에서는 앞서 언급한 미노아·미케네 문명이 멸망한 다음, 잠시 동안의 암흑기를 거쳐 아테네, 스파르타 등과 같은 도시국가가 등장했다. 그런데 기원전 8세기경, 인구가 증가하고 농경지가 부족해지자 도시국가들은 식민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식민지를 세웠고, 그곳에서 유럽 내륙의 켈트족 집단들과 교역을 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대표적 그리스 식민지가 오늘날의 마르세유인 마살리아(Massilia)다. 이 같은 식민지를 기점으로 그리스인들은 중·서부 유럽으로 와인을 공급했고 그 대신 모피, 햄, 주석, 노예 등을 가져갔다.

그리스인들에 이어 로마인들도 기원전 2세기경부터 켈트족 집단들에게 와인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인들이 남긴 기록들을 보면 켈트족이 얼마나 와인을 좋아했는지, 그리고 와인을 얻고자 얼마나 쉽게 노예를 팔았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로마 내에서는 노예 한 명당 대형 항아리 5~6개 분량의 와인을 받을 수 있었으나, 켈트족과의 교역에서는 노예와 와인 항아리를 일대일로 교환했다. 켈트족 집단들이 와인을 마시려면 노예를 지속적으로 확보해야만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웃 집단을 약탈하고 그 주민을 노예로 삼았던 켈트족 전사의 행위는 자신들의 전사적 정체성을 과시하는 수단이면서 생활필수품 격인 와인을 확보하는 방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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