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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시대의 클래식 캐릭터 19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사가 된 여인들

뮬란 vs 박씨부인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사가 된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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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뮬란을 ‘중국의 전통’과 거리가 먼 인물, 나아가 중국의 전통과 결별하는 파격적 인물, 좀 더 미국화하고 서구화한 현대여성의 롤 모델로 그려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그린 파뮬란이 중매쟁이를 만나러 가기 전에 입던 복장과 화장은 중국적이라기보다는 일본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고, 흉노족의 피부를 지나치게 어둡게 처리하고 흉노족 적장의 모습을 괴물처럼 묘사한 것은 인종주의적인 혐의를 벗기 어렵다. 이렇듯 파뮬란은 디즈니를 통해 재해석됨으로써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을 벗어나지 못한 미국 사회의 가치관을 보여주기도 한다. 파뮬란은 ‘개인보다 국가가 중요한 현대 중국’에서도, ‘동양의 전통보다는 서구의 합리주의가 중요한 미국’에서도 여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캐릭터가 아니었을까.

박씨부인의 삶에도 간난신고를 통한 궁극적 승리만이 도드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단 남편 이시백은 그녀가 추녀였을 때는 부인으로서 대접을 전혀 해주지 않았고, 그녀가 미녀로 변신하자 그제야 환호작약하며 그녀에게 ‘넘치는 애정’을 보여주었기에, 그는 참으로 ‘인간적’이기는 하지만 부인의 배포에 어울릴 만한 위대한 인물이라고는 볼 수 없다.

박씨부인의 이야기에서 주목할 만한 공간은 ‘피화당’이다. ‘남한산성’의 처절한 패배와 굴욕의 외교사를 환상적으로 전복하는 공간이 바로 박씨부인의 은신처이자 베이스캠프, 피화당이기 때문이다. 박씨부인과 그녀의 시종 계화는 병자호란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용골대의 동생 용휼대를 처치하고, 전란으로 겁을 잔뜩 먹고 몸을 사리고 있는 조정대신들에게 낭보를 전한다. 박씨부인의 시종 계화가 청나라 장수를 처치하는 장면에서는 ‘패배한 역사’를 ‘환상의 서사’로 전복하려는 의지가 읽힌다. 청나라 장수 용휼대는 박씨부인 시종 계화의 손에 죽기 전에 장탄식을 내뱉는다.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만리타국에 큰 공을 바라고 왔다가 오늘 조그마한 계집 손에 죽을 줄 어찌 알았으리오.”

계화는 웃으며 대꾸한다.



“불쌍하고 가련하다. 세상에 장부라 이름하고 나 같은 여자를 당치 못하니, 네 왕 놈이 하늘의 뜻을 모르고 예의지국을 침범코자 하여 너 같은 어린애를 보냈거니와 오늘은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으니 바삐 목을 늘이어 내 칼을 받으라.”

남한산성에서 조선의 왕은 청나라 장수에게 머리를 조아려 치욕적인 항복을 했지만, ‘박씨부인전’에서는 ‘피화당’이라는 여인의 은신처에서 적장의 머리가 싹둑 잘리는 ‘상상의 쾌거’가 이루어진다.

아버지 때문만은 아니야. (내가 남장을 하고 참전한) 진짜 이유는 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볼 때면, 뭔가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 애니메이션 ‘뮬란’ 중에서

3 평범함으로 귀환하는 현대적 영웅의 탄생

싸울 때 입던 옷을 벗어놓고 옛 치마를 입는다. 창 앞에서 곱게 머리를 빗고 거울을 보면서 화장을 한다. 문을 나서 전우들을 보니 전우들은 하나같이 크게 놀란다. 십이 년을 함께 다녔건만 목란이 여자인 줄은 몰랐도다.

- ‘목란사’ 중에서

현대인의 눈에 비친 파뮬란과 박씨부인은 페미니즘을 수호하는 열혈 여전사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녀들이 싸워야 했던 진짜 적은 바로 ‘가족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그녀들은 ‘여성의 권리를 찾는다’는 거창한 대의명분이 아니라 눈앞에 닥친 가족들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의 여성성을 스스로 버렸다. 연로한 아버지를 대신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가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남편의 핍박을 받았으면서도 전쟁에서 세운 자신의 승리를 남편에게 돌리는 박씨부인. 그녀들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러나 그녀들이 진짜 싸우고 싶은 대상은 그녀들의 파란만장한 운명 자체가 아니었을까. 못생겼다고 해서, 여자라고 해서,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대접받지 못하는 자신의 쓸쓸한 삶과 투쟁을 벌인 것이 아닐까.

쌀 한 톨이 저울을 기울게 할 수 있듯, 용사 한 사람의 힘에 의해 승패를 가르게 될지도 모를 일이오.

-애니메이션 ‘뮬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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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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