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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시대의 클래식 캐릭터 19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사가 된 여인들

뮬란 vs 박씨부인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사가 된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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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사가 된 여인들

중국 고대 장편 서사시 ‘목란사’를 각색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여타 영웅들과 달리 파뮬란은 비범한 능력을 가진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백설공주처럼 태어날 때부터 공주인 것도 아니었고, 신데렐라처럼 왕자와 결혼하는 해피엔딩의 주인공도 아니다. 파뮬란은 중국 농촌은 물론 조선이나 일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소녀다. 박씨부인 또한 거창한 목표 때문에 힘겨운 싸움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박씨부인에게는 국가에 대한 올곧은 충성이나 역사에 길이길이 기억되고 싶은 욕망이 들끓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파뮬란과 박씨부인이 현대 사회의 여성들에게도 친숙한 캐릭터가 될 수 있는 까닭은 현대 사회가 ‘평범성’ 속에서 영웅성을 이끌어내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타고난 출신성분이나 비범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거는 용기는 모든 사람의 평범성 안에 숨겨진 비범함이니.

파뮬란과 박씨부인은 진정한 여성성이란 무엇인가를 되묻는 논쟁 속에서 언제든 호출될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녀들은 ‘여성적 행복’과는 거리가 먼 ‘전쟁 영웅’의 삶을 통해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 영웅으로 금의환향한 후 애니메이션 속 파뮬란은 낭만적 사랑을 선택했고, 영화 속 파뮬란은 베틀 앞으로 돌아와 ‘효녀’로서의 본래 역할로 귀환했으며, 옛이야기 속 파뮬란은 무사히 고향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하거나 또 다른 판본에서는 황제의 첩실이 될 것을 요구받고 자결하기까지 한다. 박씨부인은 어떤가. 그녀는 전쟁 영웅이 되었지만 그녀의 공로는 남편 이시백에게 돌아갔으며 그녀는 ‘충렬부인’에 봉해진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녀들은 여성의 사회활동이 보장되지 않았던 시대에 남성보다 더 남성적인 투사가 되어 몸으로 전란을 이겨낸다. 피화당은 박씨 부인의 승리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던 ‘여성들의 은신처’이기도 했다. 박씨부인은 전쟁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여성들’을 자신의 은신처 피화당에 숨겨준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러한 환상의 서사가 태어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장 큰 위험에 처하는 존재가 바로 여성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여성들은 목숨뿐 아니라 항시적으로 정절을 위협받았고, 청나라 군사의 ‘손길’만 닿아도 그것은 ‘몸을 더럽힌’ 증거가 되던 시대였다.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와도 ‘화냥년’ 소리를 들어가며 평생 고통 속에 살아가야 했던 조선의 여성들. 그녀들은 임금조차 벌벌 떨게 만들었던 청나라 장수도 물리치고, 모자란 남편도 기꺼이 받아주는 여장부 박씨 부인의 환상적 승리담 속에서 애틋한 위안을 받지 않았을까.

‘박씨부인전’에는 박씨를 향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조선 여인네들의 뼈아픈 삶의 흔적이 담겨 있다. 박씨부인은 남성을 제압하는 여전사가 아니라 자신처럼 아프고 자신처럼 슬픈 여성들의 삶을 어루만지는, 현실에 없는 구원자가 아니었을까. 파뮬란이 오늘날의 여성들에게 ‘내 운명을 만들어가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라는 용기를 심어주듯이.

오랑캐 장수들이 장안의 재물과 부인들을 잡아갈 새 잡혀가는 부인네들이 박씨를 향해 울며 슬프다, 우리는 이제 가면 생사를 모를지니, 언제 고국산천을 다시 볼까 하며 대성통곡했다.



- ‘박씨부인전’ 중에서

하지만 전 제 마음속의 진심을 온 세상에 알릴 거예요. 그리고 진실된 저 자체로서 사랑받을 거예요. 날 바라보는 저 소녀는 누굴까. 날 계속 바라보는 저 소녀. 왜 나의 모습은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어떤 사람의 모습일까. 내가 언제까지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해야 하나. 언제쯤 내 마음 속의 진실이 드러날 수 있을까. 나에겐 언젠가는 자유롭게 날아오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 애니메이션 ‘뮬란’ 주제가 ‘Reflection’중에서

신동아 201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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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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