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호

연극인 윤소정

“난 불륜 저지르게 생겼잖아…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내 얼굴이 예뻐 보이네”

  • 한상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reenfish@donga.com

    입력2011-02-23 11: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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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인  윤소정
    눈내리던 어느 날, 우유를 배달하는 김만석 할아버지와 파지를 주워 파는 송이뿐 할머니가 만난다. 그리고 사랑이 시작된다. 잊었던, 잃어버렸던, 아니 처음부터 없었던 사랑이.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두 쌍의 커플을 통해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들의 사랑을 다룬다.

    이 영화에서 송이뿐 역을 맡은 사람은 40년 넘게 무대를 지켜온 연극인 윤소정(66)이다. 김만석 역의 이순재와 아름답고 가슴 시린 사랑을 만들어냈다.

    윤소정은 연극, 영화, 드라마 등을 넘나들며 주로 성격파 연기를 선보여왔다. 연극 ‘부도덕행위로 체포된 어느 여인의 증언’(1979), ‘신의 아그네스’(1983), ‘따라지의 향연’(1991), ‘매디슨카운티의 다리’(1996)와 악독한 시어머니를 연기한 영화 ‘올가미’(1997) 등이 대표작이다.

    겨울바람이 매섭던 2월의 어느 날, 서울 대학로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두고 윤소정과 마주 앉았다. 영화 얘기가 먼저 오갔다.

    ▼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통해 연기변신을 하셨어요. 항상 강한 역할만 해오셨는데….



    “맞아요. 내 생김새가 사실 한국적이지 않아서 그런가? 그동안 송이뿐 같은 역할이 나한테 오질 않았어요. 그런데 참~ 하고 싶었어요. 안 오니까 못한 거지. 그런데 남다른 눈을 가진 추창민 감독이 저한테 이런 역을 제의한 거죠.”

    ▼ 감독이 남다른 눈을 가져서….

    “추 감독이 내 연극을 보러 왔어요. 제작진 데리고. ‘에이미’라는 연극인데, 제가 거기서도 여배우로 나와요. 처음엔 40대였다가 점점 50대, 60대로 가거든요. 그런데 추 감독이 40대로 나온 날 보고는 ‘에이, 이건 아니다’ 그랬다는 거야. 나이는 40댄데 딱 돌아서는 자태가 20대더래. 그래서 그만두자 그랬다나봐. 그런데 연극 마지막에 60대 후반인 노년의 배우 모습으로 내가 나오는데 그걸 보고는 ‘아, 송이뿐이다’라고 생각했다는 거지. 나중에 내가 감독한테 ‘아주 좋은 눈을 가졌다’고 칭찬해줬어요.”(웃음)

    남자가 오잖아, 남자가

    ▼ 영화 속 송이뿐은 어떤 사람인가요?

    “멋있는 사람이죠. 파지 줍고 혼자서 산다는 설정은 멋이 없을 수 있지만, 아무 욕심도 없이, 의지할 사람도 없는 할머니가 그냥 하루하루 사는 건데, 그 할머니에게 무슨 욕심이 있겠어요?”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 대한 얘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윤소정은 영화 속으로 빨려들어간 듯 표정이 달라졌다. 목소리가 연극대사를 읽는 톤으로 바뀌었다. 듣기가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여자에게 사랑이 찾아오는 거예요. 버림받았던 이 여자에게. 딱 한 번의 상처로 여자로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남자가 오잖아, 남자가. 두근거리고, 눈물이 나게 좋고, 이 남자로 인해 생전 처음 웃어본 여자. 그런데 결국 그 사랑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떠나지.”

    ▼ 왜 사랑을 포기할까요?

    “익숙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사랑을 택하지 왜 떠나느냐’고 쉽게 말하지만, 송이뿐에게는 그게 안 맞는 신 같은 거죠. 너무나 예쁜 신인데, 정말 신고 싶은데, 불편한 거. 결국 익숙한 생활을 찾기 위해 고향으로 가요. 멋있지 않나?”

    연극인  윤소정
    ▼ 글쎄요. 사랑이 그런 건가?

    “자기가 원하는 걸 얻는 게 사랑일까요? 행복일까요? 마지막에 두 남녀가 헤어지는 장면이 있어요. 김만석이 목이 메어 말하지. ‘안아봐도 될까요?’ 그럴 때 이 할머니는 그저 고개만 끄덕여요.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채, 그냥 안겨요. 그리고 그 남자가 떠난 다음에야 우는 거야, 담담하게. 처절하게 목 놓아 울 수도 있지만 꾹꾹 누르는 거죠. 그게 더 가슴이 아파. 옛날에 ‘길’이란 영화가 있었는데, 알아요? 앤터니 퀸 나왔던.”

    ▼ 네, 알아요.

    “그 영화에서 앤터니 퀸이 (여주인공인) 젤 소미나한테 말하죠. ‘돌멩이 하나도 다 이유가 있다’고. ‘너도 이 세상에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송이뿐에게 딱 맞는 말이야. 그래서 송이뿐은 멋있는 할머니예요. 근데 내 얘기가 억지 같아요?”

    ▼ 아니에요. 그리고 선생님 연기도 너무 좋았어요.

    “정말이에요?”

    안아봐도 될까요?

    윤소정과의 대화는 유쾌했다. 사람을 빨아들이는 힘이 느껴졌다. 대화에 몰입하게 만드는, 유머도 넘쳐났다. 그런데도 윤소정은 수시로 기자에게 “제가 말을 잘 못해요”라며 ‘겸손’해했다. 사실 전혀 그렇지 않은데….

    ▼ 세상에 예쁜 여배우는 많잖아요. 하지만 멋있는 여배우는 드물어요. 선생님은 참 멋있으세요.

    “어머, 손 한번 잡아야지.”(웃음)

    윤소정이 불쑥 손을 내밀어 기자의 손을 잡았다. 손에서 손으로 따뜻한 기운이 전해졌다.

    “사람 볼 줄 아시네. 고마워요.(웃음) 난 그렇게 생각해요. ‘멋있다’ ‘근사하다’는 건 ‘자연스럽다’는 말과 같다고. 꾸민 거보다 내추럴한 거.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편안한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멋있다’라고 표현하는 거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 주장?

    “네, 그렇게 주장하고 싶어요.”

    ▼ 송이뿐 같은 역할은 처음 해보신 거죠.

    “진짜 없었어요. 내가 이렇게 생겨서.”

    ▼ 생긴 게 왜요?

    “내가 좀 강하잖아. 그래서 내 별명이 동숭동 불륜 전문 여배우예요. 춤바람, 금지된 사랑, 못된 시어머니 같은 걸 많이 했잖아. 불륜을 다룬 연극 ‘매디슨카운티의 다리’ 때도 사실 손숙씨가 굉장히 하고 싶어 했거든. 그런데 여론조사를 하면 내가 딱 나오는 거야. ‘불륜은 윤소정’, 이게 무슨 공식인 거지. 그래서 내가 제작자에게 뭐라고 했냐면, ‘사실 불륜이라는 건 저지르게 생기지 않은 여자가 저질렀을 때 더 재미있다. 봐라, (동명의 영화에서 주연을 했던) 메릴 스트립이 불륜 저지르게 생겼냐’고.”

    ▼ 그건 그렇네요.

    “그런데 나는 불륜을 저지르게 생겼잖아.(웃음) 그래서 나같이 생긴 사람이 송이뿐 역을 했을 때 색다른 재미가 있는 거죠.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이렇게 생겼다고 만날 성격 나쁜 시어머니만 시키는 연출자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야. 안 그래요?”

    ▼ 맞아요. 근데 해보시니 잘 맞던가요?

    “예, 전 좋았어요. 행복했어요.”

    이쯤에서 3대째 영화-연극인을 배출한 윤소정의 집안을 소개하려 한다. 먼저 윤소정의 아버지는 광복 전후 시기 우리나라를 대표했던 영화감독이자 독립운동가 윤봉춘(1975년 작고)씨다. 영화 ‘아리랑’을 만든 나운규 감독의 권유로 영화계에 들어섰다. 주로 민족정신을 계몽하는 영화를 만들었으며 1960년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나 감독은 윤 감독의 품에서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륜 전문 여배우

    윤소정의 오빠 윤삼육(본명 윤태영)씨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이었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인 ‘뽕’, ‘장군의 아들’ 등의 시나리오를 썼다. 직접 메가폰을 잡은 영화 ‘살어리랏다’는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이덕화)을 거머쥐었다.

    연극인 오현경(74)씨가 윤소정의 남편이고 영화배우 오지혜(41)씨가 딸이다. 오지혜씨는 ‘이대로, 죽을 순 없다’를 만든 영화감독 이영은씨와 결혼해 살고 있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에는 오현경, 윤소정, 오지혜씨가 모두 ‘애정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윤소정은 동양방송(TBC) 1기 탤런트로 연기생활을 시작했다.

    ▼ 방송국 출신이 왜 연극을 고집하신 거죠?

    “(TV로) 날 보면 그렇게 맘에 안 드는 거예요. 왜 저렇게 생겼지? 눈코입이 왜 저렇지, 그런 생각만 들고. TV에 나오는 것을 내가 용납할 수가 없더라고요.”

    ▼ 본인 모습을 보면서?

    “예. ‘아~ 이건 아니다’ 싶어서 연극만 했는데, 내가 눈코입이 다 크니까 연극무대에선 좋지요. 메이크업도 많이 안 해도 되고.”

    ▼ 지금도 본인 얼굴이 마음에 안 드세요?

    “옛날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해. 거울을 봐도 철딱서니 없었던 때보다, 눈코입만 크고 안 예뻤던 예전보다 지금 내 얼굴이 마음에 들어요. 조명, 메이크업 기술이 예전보다 좋아서 그런가 요즘은 화면을 보면 내가 예쁘다니까. 그래서 막 출연하고 싶어. 근데 옛날에는 안 예뻤어, 그래서 연기하기 싫었어요. 진짜 그랬어요.”

    ▼ 눈코입이 큰 게 콤플렉스?

    “외국사람 같다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무용을 해서 워킹이 좋았던 것도 연극에 도움이 됐죠. 근데 무엇보다 연극을 하니까 사람들이 ‘잘한다 잘한다’ 하더라고. 그러니 정말 잘하는 줄 알고 여태껏 연극무대만 고집했죠. 어쩌다가 정말 맘에 드는 영화나 TV드라마가 있으면 하고.”

    윤소정은 원래 고전무용을 하던 사람이다. 학창시절 얘긴데, 그냥 배운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했다. 전국을 다니면서 상을 쓸고 다녔다. 그래서일까. 70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윤소정의 걸음걸이는 남달랐다. 구름 위를 걷듯 사뿐사뿐 걸어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방송국에 처음 들어갔을 때 무용수 출신이던 선우용녀가 날 보고 ‘나, 너 알아. 너 윤태봉(윤소정의 본명)이지? 동명여고 나왔지? 니가 콩쿠르에 나온다고 해서 우리가 그 콩쿠르에 다 안 나갔어’ 그러더라고요. 그 정도였어요.”

    ▼ 소질이 있었나 봐요.

    “중학교 때부터 직접 안무를 할 정도였어요. 제가 국회의원, 예총 회장 하신 강선영 선생님께 춤을 배웠어요.”

    ▼ 무용을 계속 하시죠, 왜.

    “방송이나 영화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춤추는 걸 오빠가 반대했고….”

    ▼ 윤삼육 선생님?

    “네.”

    참고로 얘기하면, 시나리오 작가 겸 영화감독이 되기 전 윤삼육씨는 서울 을지로 일대를 주름잡던 깡패였다. 별명은 ‘똥개’. 깡패 오빠를 둔 덕에 윤소정은 약간의 혜택을 누리기도 했다. 일단 집적대는 남자가 없었다. 남학생들은 쫓아오다가도 ‘야~ 똥개 동생이다’ 그러면 다들 꽁무니를 뺐다. 윤소정은 “보호받아서 좋긴 했는데 ‘좀 쫓아오게 놔둘 걸’ 하는 생각도 들어요”라고 말했다.

    ▼ 오빠는 왜 반대하신 거죠?

    “그 시절엔 고전무용 하는 사람들이 일본에 가서 접대부를 한다는 얘기가 신문에도 나오고 그랬어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반대한 거죠. 주위에서도 연극이나 영화를 하라고 부추겼어요. 박진(전 예총 부회장)이라고 당시 연극계의 ‘오야지’(우두머리)가 있었는데, 그분이 아버지께 ‘딸은 무용보다 연극을 시키면 좋겠다’고 계속 얘기를 했어요. 아버지도 영화감독이니까 ‘(딸을) 배우 시키면 좋겠다’ 생각한 거죠. 그런데 저는 안 예뻤거든요. 지금도 안 예쁘지만, 그러니까 사실 그건 아버지의 욕심이었지. 내가 배우가 된다는 건. 동양TV 들어갈 땐 다행히 사진이 예쁘게 나왔어요. 수전 스트라스버그라고 유명한 영화배우 분위기가 난다고 난리가 났지. 그런데 나중에 내 실물을 보고는 다들 ‘무슨 식모가 왔나’ 그랬대요.”(웃음)

    ‘소정옷집’

    ▼ 한마디로 사진발?

    “그렇지. 그래서 어떤 연출자는 애들 교육 때마다 ‘배우는 옷과 모양을 바꿈으로써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면서 저를 교육사례로 썼대요. 그리고 전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어디서든 당당했어요. 옷을 하나 입어도 그랬어요. 동대문시장의 옷을 입었건 유명한 이탈리아 디자이너 옷을 입었건 내 식으로 소화하는 거죠. 잠옷을 입고 나왔을망정 ‘이게 패션이야’라면서 당당하게. 그러니까 사람들이 ‘멋있다’고 하더라고. 나만의 스타일도 있었고.”

    ▼ 어떤 옷을 주로 입으셨는데요? 젊을 때는.

    “일단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으면 안 입었어요. 그리고 내가 만들어 입었지. 똑같은 옷이 싫어서 중학교 때부터 블라우스를 만들어 입었어요. 자세히 보면 엉망이지, 단춧 구멍도 다 제각각이고.”

    윤소정이 기자의 취재수첩 한 장을 빌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60~70년대 자신이 직접 디자인하고 만들어 입었던 옷을 설명한다면서. 마음에 드는 옷을 구하다 구하다 없어서 직접 만든 옷이라고 했다. 2개의 원피스 그림을 그렸는데 얘기만 들어도 아주 섹시하고 파격적이었다. 그 중 하나는 양쪽 어깨에 리본처럼 끈으로 묶게 만든, 끈만 풀리면 옷이 툭 떨어질 긴 원피스였다. 또 하나는 A라인의 노란색 원피스였다. 둘 다 소매가 없었다.

    “(어깨 쪽을 가리키며) 이 끈을 풀면 툭 떨어지는 거야, 옷이. 앞을 바이어스(비스듬히 자른 천조각)로 만들고, 소매는 없이, 하얀 데다 까만 땡땡이(물방울 무늬). 끈도 까만색.”

    ▼ 그거 풀면 옷이 그냥 떨어지는데?

    “끈은 브래지어에 묶어요. 까만 브래지어하고 딱 묶어. 누구든지 이거 잡아당기면 풀어지는 거지.”

    ▼ 너무 야해요.

    “명동 같은 데 나가면 사람들이 다 쳐다봤어요. 그 당시엔 이런 옷이 없었거든요. 오현경씨하고 연애할 때는 스웨터를 하나 떠서 아주 굉장히 비싸게 팔아먹었어요. 청색에다가 라인 있는 거.”

    연극인  윤소정
    ▼ 선물이 아니고 판매?

    “응. 실값이 1000원쯤 들었는데 한 1만원 받았나? 정식으로 연애할 때도 아닌데, 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 할 때니까, 뭐 10만원이라고 해도 샀겠죠.”(웃음)

    ▼ 옷 만드는 건 어디서 배우셨어요?

    “뭘 정식으로 배운 건 없어요. 그냥 손재주가 좋아요, 내가. 그림도 잘 그려서 스타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팔아 불우이웃 돕는 행사가 있었는데 내 동양화가 제일 먼저 팔렸지. 이태리타월 만드는 사장이 샀다고 그러더라고.”

    실제 윤소정의 옷 만드는 재주는 남달랐다. 정식으로 옷을 배운 적이 없는 그가 동부이촌동에서 20년간 의상실을 운영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것도 아주 성공적으로. 의상실을 하는 언니를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옷을 배웠다는데, 나중에는 그 언니가 윤소정의 의상실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한때는 윤소정의 옷을 사러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언니가 도와준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오히려 언니는 문을 닫았어요. 언니 손님들을 다 내가 뺏었으니까. 재벌 부인도 우리 집에 와서 오랫동안 옷을 해 입었지.”

    재벌이 됐거나 깡통을 찼거나

    ▼ 의상실은 얼마나 하셨어요.

    “서른에 시작하고 쉰 살에 닫았어요.”

    ▼ 딱 20년? 특별한 이유라도….

    “그런 건 없어요. 내가 연극을 많이 하면 할수록 매출이 떨어지더라고. 내가 없으면 손님이 없어요. 그래서 둘 중의 하나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1990년대 말 외환위기가 터진 뒤로 매출이 떨어지길래 ‘그럼 그만 할까?’ 했는데 휙 팔리더라고요. 가게가.”

    ▼ 의상실 이름이 뭐였어요?

    “소정옷집.”

    ▼ 촌스럽네요.

    “요즘 같았으면 영어 넣어가면서 시건방지게 지었을 거예요. 근데 저는 겸손한 사람이잖아요.”(웃음)

    ▼ 돈은 좀 버셨어요?

    “돈 많이 벌었어요.”

    ▼ 근데 왜 그만두셨어요? 계속 키우시지.

    “백화점에서 프러포즈도 왔어요. 숍을 하라고. 그런데 그렇게 되면 정말 연극을 그만둬야 하고, 또 오현경씨도 적극 말렸고요. 우리 오현경씨는 어떤 사람이냐면, 돌다리도 두드려보고는 안 건너요. 뭐든지 못하게 하죠. 하여간 의상실 있던 건물 판 돈으로 그동안 잘 까먹고 살았어요.”

    연극인  윤소정
    ▼ 사업가 기질도 있으시고….

    “우리 오현경씨 왈, 윤소정은 오현경 안 만났으면 지금쯤 재벌이 됐거나 깡통을 찼거나 둘 중 하나라는 거야. 얼마나 맞는 말이야. 자기가 못하게 했으니까, 만약에 다른 사람을 만나서 윤소정을 밀어줬으면 승승장구 재벌이 됐거나 아니면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살다가 쫄딱 망해서 깡통을 찼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는 게 너무나 맞는 말이야. 그래도 난 남편 참 잘 만났어요. 재벌이 되면 거기에 매여서 살았겠지. 남편이 이것저것 못하게 했지만 제가 하고 싶은 작품은 다 했어요. 그럼 됐지 뭐.”

    ▼ 딸인 오지혜씨는 어떻게 영화배우가 됐나요.

    “중학교 때부터 배우 하겠다고 그랬죠.”

    ▼ 그래서 하라고 하셨어요?

    “그래, 영화배우 해라. 여자 직업 중에 배우만큼 매력적인 게 없다 그랬죠. 짧은 삶을 살면서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도 생긴다. 참 매력 있다. 그런데 우리 딸이 별로 안 예쁘잖아. 그래서 잘 안 팔리잖아.”

    “선택은 네가 해라”

    ▼ 오지혜씨 예쁜데.

    “에이~, 뭐 예쁘기만 했으면 (더 잘됐겠죠), 연기는 잘 해요. 딕션(발음)도 아주 좋고. 어릴 때부터 ‘배우를 하려면 책을 많이 봐라’ 그랬더니 책도 많이 봤고.”

    ▼ 자녀들에겐 엄하셨나요?

    “엄하지 않았어요. 이런 일은 있었죠. 예를 들어 우리 아들이 중학교 3학년 때 담배 피우는 걸 봤거든요.”

    ▼ 중학교 3학년 때요?

    “서랍을 여는데 담배가 나왔어요. 그래서 그날 담배 피우지 말라고, 만약 네가 또 다시 담배를 피우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여튼 담배를 안 피우기로 약속했어요. 그런데 한 6개월 후에 또 담배가 나왔지.”

    ▼ 딱 걸렸군요.

    “그날 집에 들어오는 거를 내가 빗자루를 거꾸로 쥐고 아들한테 그랬죠. ‘내가 가만 안 둔다 그랬지?’ 그러곤 엄청 팬 적이 있어요. ‘무기가 이것밖에 없어서 이것밖에 못 때리지만 다른 게 있으면 넌 그거로 죽었어. 엄마하고 한 약속을 네가 저버릴 줄은 몰랐다’. 우리 딸도 위기가 있었죠. 중학교 2학년 땐가? 나쁜 친구를 사귀기 시작한 거예요.”

    ▼ 오지혜씨가?

    “학교를 안 다니고 퇴학을 맞은 뭐 그런 문제아를 사귀기 시작했어요. 굉장히 긴장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혜를 앉혀놓고 ‘친구는 나보다 나은 사람을 사귀라고 했다’ 그랬죠. 그러니까 지혜가 딱 그러는 거예요. ‘그럼 내가 걔보다 나으니까 내가 걔 친구를 해줘야지, 걔가 옳은 길로 올 수 있지 않으냐’고.”

    ▼ 그 말도 맞네요.

    “그렇긴 한데, ‘음~ 그거는 기(氣)라는 게 있다. 너는 바른 생활을 하는 기고 얘는 옳지 못한 생활을 하는 기인데 그 친구의 기가 너무 강해서 네가 끌려가기는 쉬워도 얘를 데려오기는 어렵다’ 그렇게 설명했어요. 그런데 막 대들더라고요. 한 보름 지나니까 ‘엄마, 나 걔 안 만나기로 했어’ 그래요. 전 한 번도 애들한테 뭘 ‘하지 말라’고 한 적 없어요. ‘내 생각은 이런데,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그렇게 말했죠.”

    ▼ 좋은 교육방법이네요.

    “애들 결혼할 때도 그랬어요. 굉장히 조건이 좋은 집에서 지혜한테 반해 가지고 거의 성사 단계까지 갔는데, 오현경씨는 딱 보더니 ‘이 집안은 뼈대 있는 집안이다’라면서 좋아하고. 그런데 난 지혜한테 그랬어요. ‘너, 그런 재벌 집에 갔다간 네 삶은 없는 거야. 니가 네 인생을 살고 싶으면 밤에 헤어지기 싫은 남자하고 결혼해. 종이 되고 싶으면 그 부잣집으로 가고’ 그랬더니 자기도 싫다는 거지.”

    ▼ 선택은 네가 해라?

    “응.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그랬더니 결국 그 부자하고는 안 하고, 정말 불알 두 쪽 가진 영화감독 이영은하고 결혼했잖아. 지금 걔들 너무 행복하고 서로 너무 좋아해요. 수입은 없어도.”(웃음)

    말괄량이와 젠틀맨

    ▼ 행복하게 잘살죠?

    “잘살아요. 내 주위에 부잣집에 시집가서 이혼하고 어쩌고 너무 많지요. 그런데 그건 또 엄마들이 극성을 떨더라고. 그래서 난 우리 아이들이 지금까지 잘 살아준 것에 대해서 참 고맙고. 그런데 애들 아빠는 안 그래요. 오현경씨는 딱 밥상에서부터 시작이야, 교육이. 수저 먼저 들지 마라, 먼 데 있는 반찬 먹지 마라, 수저 먼저 놓지 마라, 아침부터 잘 때까지 교육이에요.”

    ▼ 오히려 선생님께서 그러실 것 같은데….

    “전 말이 없어요. 나는 ‘그건 그렇다’고 하면 그냥 그걸로 끝이지. 아버지(오현경)가 너무 잔소리를 했고 너무 조선시대처럼 교육하니까, 애들한테 스트레스를 주니까, 나는 오히려 반대로 확 풀어놓고 ‘아버지 없으면 맘대로 해도 된다’ 그랬죠. 막 우리끼리 놀다가 ‘띵동’ 하면 각자 방에 들어가서 공부하는 척하고.”

    ▼ 오 선생님께서 잔소리가 좀 많으신가 보네요.

    “처음부터 끝까지요. 오현경씨가 암수술을 2번이나 받았잖아요. 그게 다 이유가 있어요. 오현경씨는 이 세상을 정화하려고 하는 사람이거든. 다 못마땅하지. TV를 보면서도 ‘저건, 저건 왜 저렇고’ 해가면서, 하여튼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 못마땅하니까 어떻게 암이 안 걸리겠어.”(웃음)

    ▼ 근데 오현경 선생님하고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아~ 오현경씨가 동양방송(TBC)에서 탤런트실장을 했어요. 내가 1기로 방송국에 들어갔을 때. 말하자면 선생님이지.”

    ▼ 선생님과 제자의 만남?

    “난 말괄량이였어요. 오현경씨는 너무나 정확한 사람이었고. 정말 젠틀맨이었어요. 그런데 그분은 내가 말괄량이지만 길들이면 참 괜찮을 여자가 될 것 같다고 본거죠. 날 좋아하기 시작한 거야. 그리고 그걸 사람들한테 쫙 소문을 냈더라고.”

    ▼ 못을 박으려고….

    “예. 소문부터 낸 거지. 그런데 소문 나서 좋은 것도 있었어요. 옛날에는 선배들이 ‘야, 가서 담배 사와’ 그러면 내 돈으로도 사다드리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소문이 난 뒤로는 누가 나한테 심부름을 시키면 이순재씨 같은 사람들이 ‘야, 현경이 있어. 현경이한테 야단맞아’ 그러는 거죠. 생활이 아주 편해졌죠. 마치 내가 오현경 소속 같은 느낌이 들고.”

    ▼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

    “다른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그런데 오현경이라는 사람은 참 매력이 없었어요. 그때는 왜 남자답고 멋있고 이런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잖아요. 오현경씨는 그런 건 없잖아. 그런데 내 마음도 점점 기울어가고. 그러다 오현경씨가 나한테 데이트 신청을 했죠. 프러포즈를.”

    ▼ 바로 오케이 하셨어요?

    “아뇨. 난 싫다고 했어요. 그 사람은 나이도 많았으니까. 내가 24세 땐데 그 사람이 32세였으니까. 노총각이지. 그런데 그 사람이 나한테 딱지를 맞고 간 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거예요, 오현경씨 할아버지가. 여자한테 딱지도 맞았는데 할아버지까지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슬프겠어.”

    ▼ 야~ 이거 참.

    “그런데 우리 엄마가, 오현경씨가 날 좋아했던 거 아니까, ‘한번 가라’ 그러더라고요. 봉투에 1000원을 넣어주면서. 그래서 그거 들고 갔어요, 오현경씨 집에.”

    ▼ 상가에?

    “그때 오현경씨 집이 마포였는데, 가보니까 아주 화환이 끝도 없이 서 있더라고요. 아버지가 은행 상무였거든요. 처음엔 ‘아니, 뭐하는 집인가’ 싶더라고. 오현경씨는 항상 자기 집이 아주 가난하다고 그랬거든요. ‘홍수 때문에 집이 물에 잠겼는데 자기 방에 똥이 떠다닌다’고 했다고요. 그래서 동료들이 300원씩 모아서 불우이웃돕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 가니까 오현경씨가 뭐라던가요.

    “천사가 내려온 줄 알았대, 오현경씨 표현이. 그 일이 있고나선 미안함도 있고 해서 그런지 마음이 슬슬 바뀌더라고요. 그러다 뭐….”

    ▼ 연애는 얼마나 하셨어요?

    “1년 반인가?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둘이 정식으로 데이트하는데, 그 사람은 마포 살고 나는 수유리에 살았어요. 버스로 데려다주고 또 헤어지기 싫어서 다시 데려다주고 하다 보니까, ‘아~ 빨리 결혼하는 게 낫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우리 딸보고도 밤에 헤어지기 싫은 사람하고 결혼해라 그러는 거예요.”

    ▼ 부부싸움 안 하세요?

    “난 일단 바가지를 안 긁어요. 뭘 하지 말라고 안 해요.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하지. 오현경씨는 뭘 가르치는 걸 좋아해요. 꿈이 공무원인 사람이니까.”

    ▼ 수십년 연기활동 해오신 분의 꿈이 공무원?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자기와는 맞지 않는 길을 걷고 있는 거죠. 지금도 연극 볼 때 대사가 잘 안 되면 그것 때문에 속상해 해. 집에 와서도. ‘아~ 걔네들…’ 이러고. 나는 ‘저렇게 할 수도 있지’ 하고 끝나는데, 이 사람은 그걸 속상해 해.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대박나면 내가 가장 먼저 이 사람 사무실부터 열어주고 싶어. 후배들 가르치는 사무실. 그리고 이 사람은 지조를 지킨다고 광고도 안 하는 사람이에요. 국제전화 002 처음 나왔을 때 1억5000만원을 준다고 해도 광고 안 했다니까. 20년 전인데. 자기는 그게 혼을 파는 것 같아서 못 하겠다고 그러더라고요. 그게 그 사람의 신조예요.”

    ▼ 화 안 나셨어요?

    “멋있잖아요. 배우들이 다 돈에 팔려 다니는데, 이 사람은 그 자존심 하나로 딱 버티겠다, 선비같이. 그건 또 부인으로서 존경해야 하는 것이죠.”

    아버지, 아버지

    ▼ 부친인 윤봉춘 감독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만인의 아버지였어요.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모든 영화인이 슬퍼했어요. 저에게 아버지는 우주적이었고 자랑스러운 분이에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10년 동안을 아버지 얘기만 하면 울 정도로 그렇게 아버지를 좋아했어요. 등록금도 변변히 내지 못하는 생활이었지만 그런 게 한 번도 부끄럽지 않았어요. 저희 집이 6남매에 아버지 엄마까지 모두 여덟 식구예요. 그런데 항상 밥상에는 수저가 13개, 15개 그랬어요. 오갈 데 없는 영화인들, 죽은 조명기사의 부인, 일이 없는 엑스트라들이 다 우리 집에서 밥을 먹었어요. 우리 식구끼리 밥을 먹을 일이 없지.”

    윤소정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1975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흐른다는 눈물이. 눈물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기자의 눈두덩도 괜스레 붉어졌다. 윤소정이 아버지 얘기를 계속했다.

    “영화 제작해서 다 망했죠. 그런데도 우리 집엔 항상 식구가 그렇게 많았어요. 아버지는 내 기억에는 사람이 아니고 신(神)같이 느껴져요. 미스코리아 심사위원이다, 뭐 영화 심사위원이다 많잖아요. 그러면 전날 우리 집으로 케이크가 와요. 수표가 딱 들어 있는. 그럼 아버지는 케이크만 먹고 수표는 돌려보내는 거예요. 그때 우리가 등록금도 못 낼 땐데. 만날 손들고 교무실에 끌려갈 때야.”

    ▼ 그런 돈은 안 받는다?

    “그거 하나 눈 감고 우리 주면 등록금 다 내잖아. 왜 저러실까 그랬어요. 자기 양심을 판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자식을 가르칠 때도 절대 감정을 앞세우지 않으셨어요. ‘야~ 이 새끼야’ 뭐 이런 적이 없었어요. 우주적인 존재였죠.”

    ▼ 윤 감독님께선 주로 민족영화를 많이 만드셨어요.

    “유관순이라는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도 아버지 영화 때문이었죠. 어느 촌로가 아버지께 들려준 유관순이라는 실존 인물의 스토리에 독립운동을 했던 우리 고모의 얘기를 섞어서 만든 거예요. 고모가 감옥에서 고문당하고 그러셨거든요. 만약 아버지가 유관순 영화를 안 만들었다면 유관순이라는 인물은 아예 없었겠죠.”

    윤 감독은 1948년부터 1966년까지 영화 ‘유관순’을 모두 세 번 만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관순’ 스토리가 이 세 편의 영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영화 유관순에는 당대 최고 여배우들이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고춘희, 도금봉, 엄앵란이다. 윤소정은 엄앵란 주연의 세 번째 ‘유관순’ 영화에서 유관순 동생 관복으로 나왔다.

    “한번 안아봅시다”

    지난해 윤소정씨는 무척 바쁜 시간을 보냈다. 영화도 영화지만 연극 ‘에이미’와 ‘33개의 변주곡’에 출연하며 정신없이 지냈다. 사실 ‘33개의 변주곡’은 연극인 박정자씨가 준비하던 것이었다. 윤소정은 막 올리기 두 달 전에야 투입됐다. 대본도 못 보고 내린 결정. 대상포진까지 앓아가며 이를 악물고 연기해냈다.

    “막 올리면서 기자간담회를 하는데, 딱 목이 메더라고. 혼자 느끼는 감격이지. 아마 내가 했던 어떤 연극보다 기억에 남는 첫날이었을 거예요. 이틀째 공연이 끝났을 땐가, 히서연극상을 만드신 연극평론가 구히서(72)씨가 오셔 가지고 나를 꼭 안아주시는 거예요. 극장 앞에 서서 날 기다리더라고. 그러더니 ‘한번 안아봅시다’ 하시더니 날 안아. 그렇게 좋았다는 거예요.”

    ‘에이미’와 ‘33개 변주곡’으로 윤소정은 지난해 말 제15회 히서연극상 ‘올해의 배우’상과 제3회 대한민국연극대상 여자연기상을 받았다.

    “그런데 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또 큰 상일수록 공정하지 못해요. 이름 없는 상일수록 공정하지. 히서연극상이 가장 공정하죠. 사실 독재지, 구히서씨 혼자 만든 상이고, 자기 혼자 심사하고, 자기 혼자 주는 상이니까. 얼마나 독재입니까? 그런데 가장 공정해요. 그것도 30~40대들에게 포커스를 맞춰서 앞으로 연극계를 끌고 갈 유망한 배우나 연출작가에게 주는 상이에요. 자기가 연극인으로서 주는 거니까. 잘난 위치에서 주는 게 아니라 정말 연극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는 상이니까. 그래서 연극인들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상이에요.”

    ▼ 몰랐어요.

    “상금도 있어요.(웃음) 어느 날 느닷없이 ‘선생님이 그 상 받으셔야 되겠네요’하고 극단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내가 ‘그건 젊은 애들이 받는 건데 내가 왜?’ 그랬더니 ‘구히서 선생님이 아무리 딴사람을 생각해도 올해는 줄 사람이 없다’고 하셨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가 혼자 주는 상이니까 내 맘 아니냐’ 그러더래요. 너무 감사한 일이죠.”

    연극인  윤소정
    ▼ 마지막으로 선생님만의 연기철학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철학은 무슨 철학. 글쎄요~ 항상 새 남자를 만난다는 생각으로 연기하죠. 연애하는 기분으로, 연애할 때는 정말 같이 있고 싶고, 주고 싶고 그렇잖아. 짜릿함, 그런 거. 나에겐 연극이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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