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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 문명의 교차로에서 ⑤

이슬람-십자군-기독교 전쟁할 것인가, 교류할 것인가

  • 박용진 서울대 HK교수·서양중세사 parktoan@snu.ac.kr

이슬람-십자군-기독교 전쟁할 것인가, 교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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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십자군은 가장 추악한 십자군으로 기록돼 있다. 일찍이 베네치아 상인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무역과 관련해 특권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특권을 경쟁 도시인 제노아와 피사에도 부여하자 베네치아 상인들은 십자군에게 성지로 가는 선박을 제공해줄 테니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달라고 요구했다. 1204년 십자군은 기독교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약탈한 뒤, 그 일대에 라틴 제국을 세웠다. 성지에는 가지도 않았으며 이슬람과의 전투도 물론 없었다. 이후에도 네 차례 더 십자군이 결성됐으나 모두 실패했다.

십자군의 결과

십자군은 원래 목표한 바를 성취하는 데 실패했다. 애초 교황은 성지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서유럽을 단일한 기독교 세계로 만들고자 십자군을 제창했으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교황의 권위가 실추한 반면, 국왕들의 권위는 신장됐다. 국왕들은 십자군에 참가해서 전사한 봉건귀족의 영지를 몰수했고, 자신이 직접 참가한 십자군의 기사 군대를 지휘했다. 물론 십자군이 왕권 강화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십자군이 왕권 강화에 도움을 준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권력관계의 변화는 교회권력과 세속권력의 대립에서 교회권력이 점차 쇠퇴하고, 단일한 기독교 세계라는 개념이 퇴조하는 대신 근대국가가 등장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국왕이 권력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민족적 적대감이 격화되기도 했다. 제2차 십자군 때는 독일인과 프랑스인 사이에 증오감이 커졌으며, 제3차 십자군 때에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영국 국왕 리처드 1세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결국 단일한 기독교 세계를 건설하겠다는 바람은 분열된 민족국가의 길로 들어서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이렇듯 겉으로 드러난 직접적 결과만이 십자군이 남긴 영향은 아닐 것이다. 기독교도에게 십자군은 승리의 표시로 인식됐다. 돌이켜보면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됐을 때부터 십자가 표시는 승리의 상징이었다. 312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는 막센티우스와 서로마의 패권을 놓고 다퉜는데, 하늘의 계시를 받아 방패에 기독교의 십자가 표시를 하고 전투에 임해 승리를 거뒀다. 이 승리에 대한 보답으로 콘스탄티누스가 이듬해 기독교를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결국 십자군은 콘스탄티누스의 방패에 새겨진 승리의 표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했던 셈이다. 오늘날 권력가들도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걸핏하면 십자군 운운하지 않는가.

주목해야 할 점은 십자군이 기독교인에게 승리의 표시로 기억되는 만큼이나, 이슬람 지역에서 십자군은 신성모독이나 유럽인 침략행위의 표시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침략을 단호하게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십자군에게까지 관용을 베푼 살라딘을 이슬람 세계가 영웅으로 받들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해야 할 것이다. 1956년 수에즈 운하 국유화로 인해 이집트가 영국, 프랑스와 벌인 전쟁은 1191년 영국 국왕과 프랑스 국왕이 모두 참여한 제3차 십자군에 비유됐고,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제3차 십자군을 물리친 살라딘에 비유됐다. 그리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역시 서방 세계에 대항해 싸우는 자신을 살라딘에 빗댔다.



지중해 세계의 부활

십자군은 일견 충돌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충돌이란 교류의 한 측면이다. 충돌과 교류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십자군은 원래 목표에는 없던 다양한 결과를 가져왔고, 그 열매들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중해 세계는 십자군을 거치면서 문명 교류의 장으로 부활했다. 로마가 지중해를 지배할 때, 모든 교류는 지중해를 통해 이뤄졌다. 물자와 인력, 그리고 문화가 지중해를 통해 로마로 흘러들어왔고, 로마에서 혼합됐으며, 로마로부터 흘러나갔다.

사실 지중해 세계는 로마 제국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기원전 1000년경 페니키아인이 지중해에 도시를 건설했으며, 이후 그리스인이 지중해에 진출해 여러 식민도시를 세웠다. 우리가 잘 아는 나폴리, 마르세유 등이 바로 그리스인이 세운 식민도시다. 그리스인의 뒤를 이어 로마가 지중해를 내해(內海, mare internum)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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