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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액션 영화배우 열전 ③

매혹적인 얼굴 뒤에 숨은 심연과 고독 신성일

도시 뒷골목을 누비던 청춘, 처진 어깨 무력한 눈빛의 사내가 되다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매혹적인 얼굴 뒤에 숨은 심연과 고독 신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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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알랭 들롱

매혹적인 얼굴 뒤에 숨은 심연과 고독 신성일

갓 서른 된 신성일이 문희의 상대역으로 젊은 매력을 선보인 1967년 작 ‘밀월’의 한 장면.

액션과 대사에만 의지해 자신의 캐릭터를 표현해서는 최고의 배우가 될 수 없다. 최고의 배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카메라 앞에만 서 있어도 영화 속 캐릭터를 표현하는 마술사 같은 존재다. 아들 한지일을 만나고 돌아서는 길, 한때 미칠 듯 사랑했던 김지미를 보내고 매미가 우는 들판에 홀로 남아 서 있는 남자. 그는 역사의 질곡을 겪으며 몰락한 비극적인 남자 그 자체였다. 이 두 편의 영화로 나는 신성일이 얼마나 대단한 배우인지 알게 됐다. 그의 1960~70년대 영화의 목소리는 모두 성우의 입을 빌린 발성이었다. 나는 ‘길소뜸’에서 비로소 신성일의 본래 목소리를 들으며 거짓의 장막을 걷어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신성일이 중년이 돼 뿜어내는 원숙한 연기에 찬탄했지만, 그가 1960년대 최고의 배우이고 알랭 들롱에 비교된다는 것에 공감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2000년대 초반, 신성일 주연 이만희 감독의 ‘원점’(1967)을 보게 됐다.

영화가 시작되면 적막하고 어두운 밤거리에 발자국 소리를 울리며 신성일이 나타난다. 굵고 진한 눈썹 밑으로 세상 어떤 것도 믿지 못하는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피고, 아무도 없는 빌딩으로 침입한 그는 금고에서 기밀 서류를 훔쳐낸다. 성공이다. 이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라지기만 하면 되는데, 어디서 실수를 했는지 비상벨이 울리고 경비원이 나타난다. 적막한 빌딩 안. 신성일과 경비원이 격투를 벌인다. 계단에서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며 엎치락뒤치락. 영화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신성일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거친 숨소리와 신음뿐. 안간힘을 쓰며 달려드는 경비원의 집요함에 두려움을 느낀 것일까? 그는 필요 이상으로 잔혹하게, 셔터 사이에 경비원의 목을 끼우고 눌러 죽인다. 산업 스파이 신성일은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자신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며 이 짓을 그만두기로 한다. 그러나 조직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미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직은 신성일을 제거하기 위해 그의 도피를 돕는 척하며 감시역으로 창녀 문희를 붙인다. 신성일은 조직이 자신을 배신해 킬러를 보낸 것도 모르고, 문희와 신혼부부로 가장해 설악산으로 도피한다. 가짜 신혼부부는 서로의 정체에 대해 아무 말 않고 한방에서 지낸다. 살인자 신성일과 창녀 문희. 먼저 정체가 드러난 것은 창녀 문희다. 신혼부부들 사이에서 문희를 알아본 남자가 그녀가 창녀임을 소문낸 것. 문희는 신성일에게 자신이 창녀라는 것과 감시자라는 것을 고백한다. 자신이 조직에 배신당했고, 누군가 죽이러 온다는 것을 알아차린 신성일. 하지만 신성일은 끝까지 문희에게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지 않고 스스로를 봉인하며 고독 속에 칩거하는 길을 택한다. 두 사람의 절망적인 고통은 서서히 서로에게 감염되며 사랑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늘은 과거를 지닌 두 사람을 결코 행복하게 놓아두지 않는다. 킬러가 다가오고, 설악산의 가파른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계단에서 신성일과 킬러는 최후의 대결을 펼친다. 자신을 죽이려는 킬러가 가파른 계단을 올라오자, 신성일은 혁대를 꺼내 자신의 손목과 계단의 난간을 묶는다. 더 이상 도망치지도 않고 여기서 싸우다 죽겠다는 자포자기한 자의 결의다. 결투가 시작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빌딩의 가파른 계단을 구르면서 싸웠듯 이번에는 더욱 가파른 설악산의 절벽 계단에서 격투를 벌이는 것이다. 신성일에게 남은 것은 추락이 아니면 또 한 번의 살인을 저지르는 것뿐. 산 정상으로 도망쳐봐야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절망적인 고통과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처지를 설명할 수 없는 고독. 자신의 세계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킬러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부부로 가장한 창녀뿐. 내가 1960년대 한국 영화 속에서 처음 신성일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순간이다.

매혹적인 절대 고독

그의 연기가 가장 매혹적일 때는 그가 자신의 속내를 절대로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를 세상에서 고립시켜 고독할 때였다. 대한민국의 남자 배우 중 그만큼 고독한 남자의 모습을 잘 표현하는 배우가 있던가? 그의 고독에는 원죄가 후광처럼 둘러쳐져 있고, 그 원죄를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곳에서 매혹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의 탱크들이 굉음을 내며 38선을 넘어 돌진해온다. 탱크는 괴물이다. 괴물은 나무와 집, 사람 가리지 않고 자신의 앞을 막는 모든 것을 씹어 삼키며 앞만 향해 돌진한다. 탱크라는 무섭고 기괴한 물성은 그것을 막아보려 애쓰는 인간들의 인간성을 너무나 초라하게 만들어버린다. 돌진해오는 탱크를 당해내지 못하고 후퇴하는 국군의 행렬 속에서 걷던 중대장 신성일이 걸음을 멈춘다. 그러고는 자신과 함께 후퇴하던 병사에게 말한다. 군인의 임무는 적의 침략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 그런데 우리는 지금 군인의 임무를 저버리는 죄를 저질렀다. 어디서부터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보다 약해서 적을 물리치지 못하고 패배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군인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배신자가 해야 할 일은 죽는 것뿐. 이때부터 대위 신성일은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아 전장을 헤매는 고독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그는 죗값을 쉽게 치르지 못한다. 사랑하는 동료들만이 죽어가고, 신성일이 죽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는 살아남는다. 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감독, 1974)의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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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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