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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조선왕실의궤 반환 주역 혜문 스님

“달라니 주더라 왜 이제껏 아무도 달라 하지 않았나”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조선왕실의궤 반환 주역 혜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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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제자리 찾기

“오늘 오신다고 해서 이거 꺼내놓았어요. 이게 제 운명을 바꾼 책이에요.”

혜문 스님이 책상 위에서 책을 한 권 집어 든다. 일본어를 막 배우던 시기, 교토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쓰에마쓰(末松保和)의 ‘청구사초(靑丘史草)’다. 이 중 ‘이조실록고략청(李朝實錄考略靑)’ 단원에 조선시대 오대산 사고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조실록이 현재는 도쿄대에 소장돼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기자는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까막눈이지만, 한자로 쓰여진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도쿄대’ 등의 단어가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혜문 스님도 그랬다. 막 봉선사와 말사들의 문화재 현황을 점검하고 왔던 터라 실록이 어떤 경로로 도쿄대까지 넘어온 걸까 궁금증이 일었다. 일본에 있는 김에 현지 조사를 시작했다.

조선 왕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국가 기록을 지키고자 전국 4곳(묘향산, 정족산, 오대산, 태백산)에 사고를 마련했다. 특히 오대산 사고는 월정사 승려들이 수호 책임을 맡은 곳이었다. 당시 정부가 사고 관리를 맡기며 월정사 측에 토지와 급료를 지급한 기록, 임명장을 수여한 기록 등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구한말이 되면서 이 사고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는다.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제 침략자들이 조선 연구를 이유로 각종 고서를 약탈, 반출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땅 승려들이 이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월정사 사적기는 “1914년 사고와 선원보각에 있던 사책 150짐을 강릉군 주문진으로 운반하여 일본 도쿄제국대학으로 직행시켰다. 간평리의 다섯 동민이 동원되었는데 3일에 시작하여 11일에 역사를 끝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사를 계속했다. 반출된 실록 788권 대부분이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된 사실이 밝혀졌다. 학자들이 대출해갔던 74권만 화를 피했고, 이 중 27권은 반출 9년 뒤 경성제대로 돌아왔다.



“우리의 국보가 아무 이유 없이 외국 땅에 실려 갔다가 사라져버린 것 아닙니까. 게다가 그게 우리 불교가 지켜야 했던 유물들이었고요. 남은 것이라도 어떻게든 찾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6개월 일정의 연수가 끝난 뒤엔 한국에 돌아와 학자와 문화 정책 담당자들을 찾아다니며 환수 방법이 없을지 의견을 구했다. 이 과정에서 일왕궁 궁내청에 역시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실의궤가 소장돼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조선왕실의궤는 1922년 조선총독부가 반출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 어떤 경로로 일본 왕실 내 도서관까지 흘러갔는지조차 알 수 없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팠다. 문화재를 있어야 할 곳, 제자리에 두고 싶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 내 문화재에 대한 반환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것이다.

著者 乞正

“그런데 이것 좀 보세요. 여기 재미있는 글씨가 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이어가던 혜문 스님이 다시 ‘청구사초’를 집어 들었다. 이번엔 표지 바로 뒷장을 열어 기자 앞에 내민다. 단정한 필체로 ‘著者 乞正(저자 걸정)’ 네 글자가 적혀 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저자가 공손히 바로잡음을 구한다? 네 자의 의미는 대략 그렇게 풀이됐다. 그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네. 이 책이 저자가 지인에게 선물한 초판본인 것 같아요”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말하자면 이렇다. 저자는 이 책을 펴낸 뒤 지인에게 선물하며 맞춤법 같은 오류가 있으면 바로잡아달라는 뜻으로 ‘저자 걸정’ 네 글자를 적어 넣었다. 그런데 그 책이 교토 고서점에 흘러들어가 우연히 일본 내 우리 문화재 현황을 궁금해하던 한 승려의 손에 들어갔다. 승려는 책 앞장 ‘저자 걸정’을 본 순간 생각한다.

“이건 이 책에 적힌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으라는, 나를 향한 메시지가 아닐까. 우리나라 국보로 소중히 간직됐어야 할 조선왕조실록이 일제 총독부에 의해 도쿄대에 옮겨져 여전히 제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 역사의 과오를 바로잡으라고 하기 위해, 내가 지금 일본에 와 있고 이 책을 만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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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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